우리나라 풍경

가야 구형왕능(산청)

목눌인 2015. 10. 28. 11:51

 
경남산청군 금서면에 있는 가야의 마지막 구형 왕능

참 이상한것은 늦가을에도 낙엽이 떨어지지 않고 파충류는 얼씬도 못한대요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번지 가야의 마지막 왕(10대) 구형왕 이 누운 돌무덤 이 하나 있지.

구형왕 의 후손 서현. 서현의 아들이 바로 김 유신 장군..

서현은 신라의 유능한 장수며 무시못하는 특권층이 였고 김유신은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명장이며 사후 흥무왕 으로 추존 되었지요

  

구형왕 은 양왕 또는 구해라고도 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532년에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주었다고 하며 재위 기간은 11년간 이다.

521년 가야 왕이 되어 531년 까지 왕으로 있다가 신라로 통합 된 것이다.

전쟁없이 나라를 통체로 신라로 통합한 사정이야 여러 설명이 많지만 뒤로 하고 

돌이 많은곳 산청 이며 현재도 수석으로 산청돌을 제일로 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무덤은 잡석으로 만들어저서 어떤 기록에서는 일종의 돌탑이라 고도 하지만..

왕릉으로 보는이유 는 동국여지승람 이란 책에 왕릉이란 기록이 나온다.

 

그 후손 들이 수 많은 세월이 흐른 후인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 이 왕릉이라 기록한 것이 시초요

그 후로는 김해김씨 들의 할아버지로 또 왕으로 섬김을 받으며 지금 까지 잘 보존되어 왔다.

 

이 무덤 부근에 왕산사 라는 절이 있었고 그 절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 녹이난 칼 좀이 설은 비단옷 활등이 발견되어 돌무덤이 구형왕릉으로 밝혀 졌다고 하고 때는 조선조 정조임금 때다.

 

무덤이라면 흙으로 조성한 봉토 무덤이 전부인데 이 구형왕릉은 잡석을 주어다가 쌓은 돌무덤 이며

이지방 특산품인 산청돌로 비탈에 층단을 이용해 조성되어 있다.

 

전체의 높이는 7.5m 로 모양은 봉토 무덤과 별반 다른바 없지만 석조무덤 이란 점이 특별나고

그 주변은 마을과도 심히 가까워서 접근도 쉽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왕릉위로는 새가 날지 못하고 나무나 잡초도 뿌리를 내리지못한다고 한다. 지금도...

홍살문 솟을 대문 무지개다리 왕능을 수호하는 호능각여러 구조물들이 운치나게 들어서 있다.

 

특히 왕릉앞에는 계곡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물 역시 옥수하더니 정말 옥수다.

1957년과 1970년대에 조성한 무덤앞 비석과 문무석 장명등 골고루 만들어 져 있어나 어쩐지 왕의 무덤이라기에는 조금 초라해 보이기도 하다..

수로왕이 가락국을 개국한지 491년 만에 신라의 침공을 받고 백성을 지키기 위해 나라를 선양 했다고 “양왕”이라고도 한다.

능역 중간쯤에 이상한 구멍이 있는데 이 구멍은 큰돌로 되어있으며 이를 바로 감실 이라고 한다.

감실은 영혼이 쉬어가는 곳이라고 하며 크기는 세로40cm 깊이가 68cm 이며 아마 처음부터 만들어 진듯 하다.

 

감실은 신주를 모시거나. 등잔불을 놓기 위한 것 쯤 으로 여겨지고 아마 등잔이 능앞에 있는 장명등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여기를 후손들은 양왕 의 영혼이 쉬어가는 곳이라하여 신성시 하고있다.

 

 

구형 왕릉의 수수께기

 

산청 가락국 마지막왕 "傳 구형왕능"

국가지정 사적 제214호(‘71. 2. 9)

 

한국에도 피라미드와 같은 형태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의 주인공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가야시대의 구형왕능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구형왕은 구충왕(仇衝王) 또는 구해왕(仇亥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겸지왕이며, 어머니는 각간(角干) 출충(出忠)의 딸인 숙(淑)이다. 

김유신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 에 있으며 현재 사적  제21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돌무덤은 1m 높이의 담장이 에워싸고 있으며 무덤 앞에 '가락국양왕릉(가락국은 가야,양왕은 구형왕)'이라고 적힌 비석과 석등 및 석단 좌우에 문인석, 돌짐승이 한 쌍씩 세워져 있으나 모두 20세기 들어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 무덤을 구형왕릉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왕산은 현의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산중에 돌을 포개서 만든 둔덕이 있고, 사면이 모두 층계로 돼 있는데 왕릉이라는 전설이 있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또 조선시대 문신 홍의영(1750~1815)이 지은 '왕산심릉기'에도 "무덤 서쪽에 왕산사가 있고, 절 위쪽에는 왕대(王臺)가, 아래쪽에는 왕릉이 있으며 신라에 멸망하자 이곳으로 와 살다가 세상을 떠나 장사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이 지역에서는 "구형왕이 나라를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에 묻히겠느냐, 차라리 돌로 덮어달라" 고 해 "살아남은 군졸들이 왕의 시신을 매장하고 잡석을 포개 얹었다"고 구전돼 오고 있다. 

 

 

그러나 이 돌무덤이 석탑이나 제사를 지낸 제단이었을 수도 있다는 추정이 제기되고 정확한 사료의 뒷받침이 부족해 지금까지 구형왕릉으로 공식 인정 받지 못한 채 '전 구형왕릉'으로 불리고 있다. 

 

 

화계리 덕양전에서 1km남짓 위에 위치한 구형왕릉은 돌무덤으로 구조가 특이한데 7층 계단에 전체 높이가 22m...시릉살이를 하며 무예를 연마하였다는 부분도 이 돌무덤이 구형왕릉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은 청년시절 화랑도를 이끌고 증조부의 왕능을 지키면서 지리산 일원에서 호연지기를 키워 훗날 삼국통일의 주역으로서 명성을 드높였다. 

통일신라의 주역으로 활약한 후손들의 선조인 구형왕은 5년간의 지리산 칩거 생활후 쓸쓸한 최후를 맞고 왕산 기슭의 돌무덤의 주인공이 됐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 기원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가 1798년 민경원이라는 유생이 왕산사의 궤짝에서 "왕산사기”를 

찾아 냄으로써 구형왕릉으로 확인됐다. 

또한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이 화랑으로 활동하던 청년시절 이곳에 들어와 능을 지키는 시릉살이를 하며 무예를 연마하였다는 부분도 이 돌무덤이 구형왕릉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돌무덤 100여m 아래 길가에 김유신장군이 활을 쏘던 곳을 기린 사대가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한국식 피라미드이다. 

경사진 산비탈을 그대로 이용하여 삼태기 모양의 너른 묘역과 거대한 돌무더기를 형성하고 있다. 

 

일반적인 봉토무덤과는 다른형태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경사면에 크고 작은 돌을 7단으로 쌓아올려 층과단을 이루고 있으며, 정상부는 타원형이다. 

앞면 전체의 높이가 7.15m, 최하단의 길이 20.6m, 4단동쪽면 중앙에 가로 40cm, 세로 40cm, 

길이 68cm의 감실형태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나 내용물은 없다. 

 

왕산의 입구에는 후손들이 사적의 보호를 위해 지었다는 덕양전과 왕릉 100m 아래에는 김유신장군이 활을쏘던 자리라고 하여 "신라 태대각간 순충장렬(新羅太大角干 純忠壯烈) 흥무왕 김유신 사대비(興武王 金庾信 射臺碑)’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다. 

 

역대 가락국 왕들이 이곳 왕산 기슭 엄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별궁인 태왕궁(太王宮, 별칭으로 水晶宮)을 세워 놓고 왕족들이 자주 찾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조 수로왕이 기름진 김해벌판에 나라를 세우고 근 5백년 역사의 왕조로 번성해 오다. 

제10대 구형왕이 왕위에 오른 뒤 재위 11년째인 532년 이웃 신라의 침공을 받지 않고 나라를 신라에 넘겨 주었다. 

그때가 신라 법흥왕 19년(가락국 기원으로는 491년)으로 구형왕은 나라를 넘겨준 왕이란 의미로 양왕이라 불렸다.

구형왕은 밀양의 이궁대에서 신라 법흥왕에게 선양의 절차를 마친 뒤 낙동강을 지나 이곳 왕산의 태왕궁으로 들어와 은거하다 5년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을 인용한 “가락국2000년사”에 기록돼 있다

 

 

산청군 금서면 왕산(王山). 

 

왕산(925m)은  옛날 가락국의 궁궐 이름인 태왕궁에서 이름을 따서 태왕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수로왕이 말년에 이 산에서 휴양했다고 가락국 양왕 신도비에 새겨져 있기도 한 이 산은 가락국의 왕과 많은 사연이 있음을 알려주는 지명인 왕등재, 국골, 깃대봉 등이 각종 기록이나 문헌에도 나와 있다. 

 

산기슭에는 가락국 시조대왕 김수로왕의 별궁인 태왕궁(일명 수정궁)을 짓고 (*지금은 빈터만 있음)  지금은 왕릉이 있다고 해서 그냥 왕산(王山:923M)이라고 부른다.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 가운데 1천m를 웃돌면서도 아직 그 이름조차 얻지못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닌데도 해발 923m에 불과하며 큰 봉우리 들에 가려 그것도 끝자락에 위치한 이곳은 왕을 대명사로해“왕산”이란 이름까지 챙겨 두고 있다. 

 

하늘의 임금을 상징하는 “천왕봉”이외에 인간세상의 왕을 지칭하는 봉우리는 “왕산”밖에 없다. 

그것은 가락국 5백년 최후의 왕이 잠들고 있는 일곱층의 돌무덤과 가락국 왕조의 별궁등 유적들이 남아있는 역사의 숨결이 스며들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락국의 멸망을 지켜본 구형왕릉과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이 활쏘기를 했다는 사대가 있는 해발 923미터의 산이다. 

 

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이곳에 묻혔으니 산 이름은 당연히 왕산으로 불린다. 

뿐만 아니라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별궁인 수정궁도 이곳에 있었다고 전해온다. 

 

산청읍에서 북서쪽으로 길을 잡아 30분쯤 달리면 금서면 화계리 면소재지가 나온다. 

화계리는 옛날 빨치산들의 출몰이 심했던 지역인 만큼 산청땅 중에서도 오지에 속했다. 

하지만 요즘은 길이 잘 포장되어 아름다운 산수를 구경하며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소재지 도착하기 직전 길 왼쪽으로 커다란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덕양전이다. 

가락국 10대왕 양왕(구형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왕산의 산행은 이 구형왕릉에서 시작된다. 

등정은 능선에 샘이 있는 왕릉의 돌담을 따라 오르는 길을 택하는 것이 좋다. 

5분 가량 힘든 비탈길을 오르면 소나무 사이로 난 부드러운 흙길이 한동안 계속 나온다.  

 

 

                유의태 약수터 ( 예전에 ' 약물통'이라 불리던 곳 )

 

이 오솔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유의태 약수터’라는 팻말을 만나게된다. 

여기서 다시 산길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드라마 허준’에 나오는 명의 유의태가 약수로 사용했다는 약수터가 있다. 

약수터 오르기전 200미터 지점엔 왕산사지로 알려진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별궁인 수정궁터가 있다. 

구형왕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전해온다. 

약수터는 왕릉에서 1.8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이다. 

천하 명의 유의태가 약수로 사용한 물이어서 물 맛은 그야말로 천하일품이다. 

 

여기서 물통을 준비해 오지 않은 사람들은 비로소 후회를 하게 된다. 

산청 물이야 어디에 있더라도 좋은 물 아닌 것이 없지만, 이 물만큼 하겠는가. 그 옛날 허준도 이 왕산자락 어디선가 약초를 캐다가 목을 축였을 법한데, 그 흔적은 찾을 길이 없고 기도처가 들어서 찾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유의태 약수터로 오르는 길에 고로쇠 나무를 심어 놓았다. 

이 약수터를 관광상품화 하려는 군당국에서 앞으로 고로쇠 액도 함께 맛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라 한다.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길을 따라 오르면 왕산 정상이 나오는데 대략 40분정도 걸린다. 

 

거대한 바위들이 모여 암봉을 이루고 있는 정상에 서면 산청읍 일대와 경호강 엄천강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또한 지리산 천왕봉에서 웅석봉까지 길게 뻗은 산자락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하산은 아래로 뻗은 길로 곧장 내려서 망경대쪽으로 향하면 좋다. 

소나무 숲을 따라 1.4킬로미터쯤 내려오면 망경대라는 바위를 만나게 된다. 

고려에서 판서벼슬을 한 농은 민암부가 나라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산청에 낙향해 살면서 이 바위에 올라 송도를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래서 후대인들이 서울(개성)을 바라보는 바위로 이름을 붙인 것이라 추측된다. 

여기서 구형왕릉까지 1.6킬로미터쯤 남는다. 

 

정상까지 길이 멀다고 생각되면 유의태 약수터까지만 갔다 오는 것도 좋은 산행 코스가 된다. 

 

* 등산로 주코스 

덕양전-왕릉(1km)-바람재(4km)-왕산(1km)-필봉산(2km)-향양마을(4km) 

* 망경대코스 

특리강구폭포-필봉산(2.7km)-왕산(2km)-망경대(1km)-왕릉(2km)-덕양전(1km) 

* 류의태 약수터코스 

덕양전-왕릉(1km)-류의태약수터(2km)-왕산(2.5km)-망경대(1km)-왕릉(2km)-덕양전(1km) 

 

 

덕양전 (德讓殿)전경

문화재자료 제50호(‘83. 8. 6) 로 지정된 덕양전은 구형왕과 왕후의 영정을 모시고, 봄 가을과 매달 삭망때 향례를 드리는 곳이다. 

 

德讓殿은 금서면 화계리 화계마을 가락국 제10代왕 양왕(위 仇衡)과 왕비(위 桂花) 양위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향례와 삭망향화를 드리는 덕양전이다. 

그 유래는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19년(가락기원491년) 나라를 신라에 선양하고 이곳 왕산 수정궁으로 이어하여 5년후 돌아가셨다. 

그후 향화를 계속하다 전화로 중단되었으며  1798년 심릉후 능하에 능침을 짓고 다시 향례를 올렸다. 

서기 1898년 숭선전(김해수로왕 능침)이 사액됨과 동시에 덕양전으로 개칭하여 서기1930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어 1991년 문화재 정화사업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구형왕(仇衡王) 영정

(생몰연대 미상.금관가야의 제10대 왕)

표준영정지정년도 : 1997, 제작작가 : 김종섭, 

 

"가야왕조계보" 

代 왕명 재위기간 약사 

1 수로왕(首露, 42~199) 42~199 42년 알에서 낳아서 곧 즉위. 아유타국(인도의 한 국가) 

  공주 허황옥과 결혼함 

2 거등왕(居登, ?~253) 199~259 수로왕의 아들. 어머니는 허황옥 

3 마품왕(麻品, ?~291) 259~291 거등왕의 아들 

4 거질미왕(居叱彌, ?~346) 291~346 마품왕의 아들. 

5 이시품왕(伊尸品, ?~407) 346~407 거질미왕의 아들 

6 좌지왕(坐知, ?~421) 407~421 이시품왕의 아들. 금토왕(金吐王), 김질(金叱). 왕비 용녀의 

  사람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시끄러웠다. 후에 왕비를 귀양 보내고 백성을 편안히 다스렸다. 

7 취희왕(吹希, ?~451) 421~451 좌지왕의 아들. 질가(叱嘉) 

8 질지왕(?~492) 451~492 취희왕의 아들 

9 겸지왕(鉗知, ?~521) 492~521 고이왕 아들. 

10 구형왕(仇衡, ?) 521~532 겸지왕의 아들. 신라 진흥왕이 쳐들어오자 영토를 바치고 귀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