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삼국시대
관우의 죽음
형주를 지키고 있던 촉한의 관우는 동쪽의 손권과 북쪽의 조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촉의 형주 경영의 중심지는 강릉(江陵)에 있었고, 유비와 손권의 타협으로 나누어진 오나라측의 형주 경영 중심지는 육구(陸口)였다. 이때 육구에는 오나라 명장 여몽(呂蒙)이 버티고 있었다.
관우는 동쪽의 육구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조조가 있는 북쪽 중원도 노리고 있었다. 조조 세력의 남방 전선 기지는 번성(樊城)에 있었다. 번성은 조조의 장군 조인(曹仁)이 지키고 있었다. 관우는 번성을 공략하기 위해 강릉에서 북상하였다. 그러나 강릉에 있는 군사를 전원 동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손권의 명장 여몽(呂蒙)이 육구에서 버티고 있어 강릉의 허점을 노릴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병력은 강릉에 남겨 놓고 북상하였다. 번성만 함락하면 조조의 중원이 바로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관우는 항시 이곳을 노렸다.
형주의 북부 지방을 거의 지배하고 오직 번성 하나만 남겨 놓았던 관우는 강릉으로부터 북상하여 번성의 전초 기지 양양(襄陽, 호북성)을 탈취하였다. 조조도 관우의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꼈다. 일찍이 자신의 포로였지만 손님으로 대접했던 관우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조조는 허창에 있는 도읍을 딴 곳으로 옮기고 관우의 예봉을 피하고자 막료들과 의논하였다. 그러자 사마의(司馬懿)가 진언하였다.
“유비와 손권은 외면상으로는 화해한 듯 보이나 속마음은 견원지간이나 다름 없습니다. 손권에게 사람을 보내 관우의 배후를 습격하게 하십시오.”
조조는 사마의의 계책에 따랐다. 이때가 건안 24년(219)으로 손권과 조조는 2년 전에 화친을 맺은 일이 있었다. 당시 손권 쪽에서도 여몽이 관우를 공략할 것을 제의하였다. 조조와 손권이 모두 관우의 맹렬한 위엄에 위기의식을 느껴 마침내 군사 동맹을 체결한 것이다.
관우가 번성 공격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 육구에 있는 오나라 사령관이 교체되었다. 여몽이 사임하고 그 후임에 육손(陸遜)이라는 무명 인물이 사령관이 되었다. 여몽은 진작부터 지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관우는 오나라 군사 따위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여몽이 두려워 강릉에 꽤 많은 군대를 남겨 놓았던 것인데 육손은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기에 안심하였다.
이 시대에는 어느 지역에서나 인물을 평론하는 습관이 유행처럼 퍼졌다. 웬만한 인물이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육손이란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이었기에 관우는 재능이 없는 사람으로 단정했던 것이다.
여몽의 건강은 확실히 좋지 않았으나 육손의 임명은 관우를 안심시키기 위한 작전상 후퇴였다. 목구멍에서 손이 나올 정도로 병력이 필요했던 관우는 마침내 강릉에 남겨 두었던 군대에게 북상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사임한 줄로 알았던 여몽이 오나라 대장으로서 장강에 그 모습을 나타내어 텅빈 강릉을 힘들이지 않고 점령하였다. 오나라로서는 사전에 계획한 일이었기 때문에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번성을 공략하던 관우는 강릉에서 원군이 도착하자 용기백배하여 조인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번성이 함락 일보 직전의 위기에 몰렸을 무렵, 조조는 손권으로부터 받은 군사 동맹 요구서를 복사하여 강한 화살에 매어 쏘아 보냈다. 함락 직전의 위기에서 사기가 떨어져 있던 조인군은 이 글을 보자 금세 뛸듯이 힘이 솟구쳤다. 반면 관우는 비록 손권이 조조와 군사 동맹을 맺었다 하더라도 여몽이 없는 오나라 군사는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관우의 생각과는 달리 비참한 보고가 들어왔다.
“강릉이 함락되었으며 적의 사령관은 여몽이라 합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다. 바로 이런 경우를 비유한 말일 것이다. 관우는 여몽의 계책에 완전히 속아넘어간 것이다. 관우군은 갑자기 사기가 떨어져 퇴각하여 당양의 맥성(麥城)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번성을 공략하고 있던 관우군은 이제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다 오군의 사령관은 관우가 가장 꺼려 하는 여몽이고 부사령관은 손권의 사촌동생 손호(孫皓)였다.
관우는 맥성을 탈출, 위험 지역을 벗어나려 하였으나, 손권의 군사에게 퇴로를 차단당해 마침내 체포되었다.
관우는 양아들 관평과 함께 목이 베어졌고, 관우의 머리는 낙양에 보내졌다. 이때가 건안 24년(219) 12월의 일이었다. 관우의 목을 벤 손권의 군사는 형주를 무난히 차지하였다.
이듬해 정월 조조는 낙양에 이르러 손권에게서 보내온 관우의 머리를 확인하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조조는 그 달 경자일에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조조는 건안 13년(208) 스스로 승상이 되고 건안 18년(213)에는 위공(魏公)이, 건안 21년(216)에는 다시 위왕(魏王)이 되어 천자와 똑같은 수레와 의복을 착용하고 그가 거동할 때는 경호병을 앞세웠다. 그의 아들 조비(曹丕)를 왕태자(王太子)라 일컬었다.
조조가 죽자 왕태자 조비가 뒤를 이었다. 위의 군신들은 제위를 조비에게 물려주도록 한의 헌제를 협박하였다. 나라 이름을 위(魏)로 고치고 도읍을 낙양에 두었다. 그해가 건안 25년(220)으로 오랫동안 명맥만 유지해오던 후한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여몽의 수훈으로 관우를 제거하고 형주를 차지한 손권은 1억 전(錢)의 돈과 황금 500근을 포상하려 하였으나 여몽은 이를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손권은 포상 대신 그를 봉작(封爵)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으나 봉작이 주어지기 전에 여몽이 42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여몽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하여 당시 사람들은 관우의 원혼이 저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설사 여몽은 지병으로 죽었다손 치더라도 당시 부사령관으로 있었던 손호까지도 얼마 후에 죽은 것은 확실히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관제묘(關帝廟)를 세우게 된 것도 이 같은 사실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관우는 죽었지만 그는 무신(武神)으로서 추앙되고 있다. 그의 주군이며 의형이었던 유비보다도 오히려 더 융숭하게 백성들로부터 받들어져 중국 전역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관제묘가 세워져 있다. 황제도 아니고 왕도 아니었던 그를 제(帝)로서 받들어 제사 지내는 것은 백성들의 동정심이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번성 함락의 숙원을 이루기 직전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기에 죽었으면서도 차마 죽을 수 없었던 관우에 대하여 당시 사람들은 무한한 동정을 보냈다. 이러한 동정심은 민족이나 국경을 초월한 공통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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