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선덕여왕
선덕 여왕은 한반도 최초의 여왕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신라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왕, 불교를 숭상하고 많은 사찰을 세운 왕, 당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한 왕, 특히 국민의 생활에 관심 많은 애민정신이 투철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준비된 여왕, 혼란의 시기를 책임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는 BC 57년 ‘박혁거세’부터 935년 ‘경순왕’까지, 무려 56명의 왕과 992년을 존속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되고 역사 깊은 왕조이다. 물론 그 시작은 원시적인 부족 국가였지만 후에 고구려, 백제와 함께 팽팽하게 정립했고 결국 660년 백제, 666년 고구려와의 영토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가능했던 요인은 많다.
그 요인에는 긍정과 부정의 시선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당나라, 즉 외세의 힘을 이용한 통일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당시 삼국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연대의식이나 감성적 통일감이 전혀 없었다. 그저 국가의 존립과 국민의 생존을 위해 전쟁을 하고, 상대는 없애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삼국 중 신라는 제일 약체였다. 지리적 위치에서 한반도 남동쪽 끝에 자리 잡고 있어 대중국 무역이나 외교에서도 취약했고 가장 가까운 외부 세력인 일본 역시 백제와 밀접한 관계였다. 이렇게 고립된 지정학적 위치에서 신라는 성장은커녕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한 실정이었다. 그러다 6세기경 법흥왕 때 이르러 신라는 나라의 골격과 제도를 세우고 이후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을 거치면서 삼국의 하나로서 실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는 BC 57년 ‘박혁거세’부터 935년 ‘경순왕’까지, 무려 56명의 왕과 992년을 존속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되고 역사 깊은 왕조이다. 물론 그 시작은 원시적인 부족 국가였지만 후에 고구려, 백제와 함께 팽팽하게 정립했고 결국 660년 백제, 666년 고구려와의 영토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가능했던 요인은 많다.
삼국 중 신라는 제일 약체였다. 지리적 위치에서 한반도 남동쪽 끝에 자리 잡고 있어 대중국 무역이나 외교에서도 취약했고 가장 가까운 외부 세력인 일본 역시 백제와 밀접한 관계였다. 이렇게 고립된 지정학적 위치에서 신라는 성장은커녕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한 실정이었다. 그러다 6세기경 법흥왕 때 이르러 신라는 나라의 골격과 제도를 세우고 이후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을 거치면서 삼국의 하나로서 실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때 신라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가 함께 뿌리를 내렸다. 성골, 진골, 육두품으로 구분된 골품제도는 그 장벽이 두터워 한 단계의 신분 상승도 불허하는 견고함과 폐쇄성을 띄며 신라의 역사와 함께 했다. 부계, 모계가 다 왕족인 성골과 한쪽만 왕족인 진골 그리고 6개의 품계로 신분, 계급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역사서에는 법흥왕이 자신이 거주하는 궁의 지근거리에 있는 왕족, 즉 4촌 이내를 성골로 정했고 그 외는 진골로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당시 신라는 ‘왕과 부처’를 동일시했다. 그런 면에서 신성한 뼈의 가문, 즉 성스러운 석가모니의 뼈를 이어받은 성골만이 왕통의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 같은 전통은 진흥, 진지, 진평왕 때에도 이어졌다. 진지왕은 형 동륜 태자가 일찍 죽자 형제상속으로 왕이 되었다. 하지만 왕으로서의 능력이 모자라고 선정을 베풀지 못해 재위 4년 만에 왕위에서 쫓겨나고(병으로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동륜 태자의 아들이 왕위를 이었는데 이가 바로 진평왕이다. 하지만 진평왕은 남자 후계가 없었다. 진평왕에게는 덕만, 천명, 선화 등 세 명의 공주만 있었다. 결국 진평왕은 자신의 남동생이 두 명이나 있었음에도 왕위를 덕만 공주에게 물려주었다.
이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 여왕이다. <삼국사기>에는 덕만 공주가 진평왕의 장녀로 되어있지만 <삼국유사>, <화랑세기>에는 천명 공주가 맏딸로 되어 있다. 천명 공주는 후에 신라의 명군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어머니로, 만약 천명 공주가 맏딸이었는데 왕위를 이어받지 못했다면 이는 골품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즉 천명 공주는 폐위당한 진지왕의 아들로 성골에서 진골로 격하된 김용수와 결혼해 자동적으로 성골에서 진골이 되었다는 설이다.
선덕 여왕은 한반도의 최초 여왕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신라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왕, 불교를 숭상하고 많은 사찰을 세운 왕, 당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한 왕, 특히 애민정신이 투철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물론 반대 의견도 많다. 당나라에 대한 굴종과 조공 외교,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에 대응치 못하고 많은 성과 영토를 빼앗긴 점, 전쟁 중에도 끊임없는 불사를 일으킨 점, 이미지 정치를 통해 자신을 신화의 세계로 진입시킨 점 등을 들어 선덕 여왕이 적어도 명군이 아니라는 의견인 것이다.
선덕 여왕에 대한 기록은 <화랑세기>,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에 남아 있지만 픽션이 대부분인 <화랑세기>는 제외하더라도 나머지 역사서의 기록을 통해 그녀가 여왕이 될 자질은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민첩했다’ ‘준비된 왕재로 관대하고 인자하며 사리에 밝았다’라고 선덕 여왕을 평가했다.
그녀는 ‘성조황고聖祖皇姑’ 즉 ‘성스러운 조상을 둔 황실의 여인’이라는 호를 화백회의에서 받으면서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가 632년이다. 선덕 여왕의 나이에 대해서는 태어난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의 나이를 40대에서 50대 초까지 추정하고 있다.
선덕 여왕이 즉위하기 1년 전, 중앙 귀족인 칠숙과 석품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를 보면 진평왕은 20대의 선덕 여왕을 후계로 정하고 긴 시간 동안 제왕학을 가르치고 있었고 ‘여왕’ 탄생에 반심을 보인 귀족들의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선덕 여왕이 즉위할 당시의 정세는 신라에게 유리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수시로 신라 영토를 침범했다.
즉위 초, 선덕 여왕은 당연히 백제,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한 국방력 강화에 힘썼지만 정책의 최우선은 민심 안정이었다. 여왕은 특히 가난한 백성 구제를 위해 각종 제도를 마련하는데 온 힘을 쏟았고 심지어 감옥을 찾아 죄수들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전했다고 한다.
이 같은 전통은 진흥, 진지, 진평왕 때에도 이어졌다. 진지왕은 형 동륜 태자가 일찍 죽자 형제상속으로 왕이 되었다. 하지만 왕으로서의 능력이 모자라고 선정을 베풀지 못해 재위 4년 만에 왕위에서 쫓겨나고(병으로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동륜 태자의 아들이 왕위를 이었는데 이가 바로 진평왕이다. 하지만 진평왕은 남자 후계가 없었다. 진평왕에게는 덕만, 천명, 선화 등 세 명의 공주만 있었다. 결국 진평왕은 자신의 남동생이 두 명이나 있었음에도 왕위를 덕만 공주에게 물려주었다.
이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 여왕이다. <삼국사기>에는 덕만 공주가 진평왕의 장녀로 되어있지만 <삼국유사>, <화랑세기>에는 천명 공주가 맏딸로 되어 있다. 천명 공주는 후에 신라의 명군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어머니로, 만약 천명 공주가 맏딸이었는데 왕위를 이어받지 못했다면 이는 골품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즉 천명 공주는 폐위당한 진지왕의 아들로 성골에서 진골로 격하된 김용수와 결혼해 자동적으로 성골에서 진골이 되었다는 설이다.
선덕 여왕은 한반도의 최초 여왕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신라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왕, 불교를 숭상하고 많은 사찰을 세운 왕, 당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한 왕, 특히 애민정신이 투철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물론 반대 의견도 많다. 당나라에 대한 굴종과 조공 외교,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에 대응치 못하고 많은 성과 영토를 빼앗긴 점, 전쟁 중에도 끊임없는 불사를 일으킨 점, 이미지 정치를 통해 자신을 신화의 세계로 진입시킨 점 등을 들어 선덕 여왕이 적어도 명군이 아니라는 의견인 것이다.
선덕 여왕에 대한 기록은 <화랑세기>,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에 남아 있지만 픽션이 대부분인 <화랑세기>는 제외하더라도 나머지 역사서의 기록을 통해 그녀가 여왕이 될 자질은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민첩했다’ ‘준비된 왕재로 관대하고 인자하며 사리에 밝았다’라고 선덕 여왕을 평가했다.
그녀는 ‘성조황고聖祖皇姑’ 즉 ‘성스러운 조상을 둔 황실의 여인’이라는 호를 화백회의에서 받으면서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가 632년이다. 선덕 여왕의 나이에 대해서는 태어난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의 나이를 40대에서 50대 초까지 추정하고 있다.
선덕 여왕이 즉위하기 1년 전, 중앙 귀족인 칠숙과 석품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를 보면 진평왕은 20대의 선덕 여왕을 후계로 정하고 긴 시간 동안 제왕학을 가르치고 있었고 ‘여왕’ 탄생에 반심을 보인 귀족들의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선덕 여왕이 즉위할 당시의 정세는 신라에게 유리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수시로 신라 영토를 침범했다.
즉위 초, 선덕 여왕은 당연히 백제,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한 국방력 강화에 힘썼지만 정책의 최우선은 민심 안정이었다. 여왕은 특히 가난한 백성 구제를 위해 각종 제도를 마련하는데 온 힘을 쏟았고 심지어 감옥을 찾아 죄수들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전했다고 한다.

▶김춘추·김유신을 중용하다
634년, 선덕 여왕은 분황사를 창건하고 인평이라는 독자 연호를 채택해 신라의 자주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나라 밖의 정세는 일촉즉발이었다. 백제 의자왕은 수시로 신라 땅을 넘었다. 수많은 전투가 이어졌고 그때마다 신라는 번번이 백제에게 패하며 약 40여 개의 성을 백제에게 빼앗겼다. 하지만 신라에게 가장 뼈아픈 패배는 대야성과 당항성 전투였다. 백제의 윤충은 대야성을 공격했다. 대야성은 신라의 수도 경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 잡은 요충지이다. 대야성을 빼앗긴다는 것은 경주의 목에 백제의 칼끝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대야성과 함께 가야 지역마저 백제에 점령당해 신라는 그야말로 풍전등화 상태였다.
비극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당항성을 빼앗겼다. 당항성은 신라의 유일한 동맹국인 당나라와의 소통 창고이자 무역항이었다. 이곳마저 함락 당하자 신라는 나라의 존립을 걱정할 지경에 달했다.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는 선덕 여왕 통치기의 실력자 김춘추의 사위 품석이 대야성을 수비하다 전사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선덕 여왕은 온 국력을 동원해 백제를 막아내면서 당나라에 지속적인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외교적 압박을 요구했다. 당나라는 신라의 요구를 처음에는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라가 패망할 경우 한반도 힘의 균형이 깨지고, 그것이 결국 당나라 에게도 득이 될 게 없다는 판단으로 고구려와 백제에 군사 외교적 압력이 가해 신라는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위기를 넘긴 선덕 여왕은 인재 부족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성골 남자 왕족이 없어 왕위에 올랐지만 진골 출신 야심만만한 귀족들은 은근히 여왕을 얕보았고 무장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여왕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도 존재했고 아버지 진평왕의 아우 백반과 국반 등 두 삼촌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선덕 여왕은 자신의 강력한 지지 세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선덕 여왕은 두 가지 전략을 세워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첫째는 자신의 친위세력 형성이고 두 번째는 왕위 계승과 정통성의 대외적 인정이었다. 선덕 여왕은 과감하게 두 명의 인재를 자신의 세력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관계 개선과 동맹, 문물의 교류, 공식적 책봉을 요구했다.
그 두 명의 인재가 바로 김춘추와 김유신이다.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이며 천명 공주의 아들로, 선덕 여왕에겐 조카였다. 부모 양쪽인 왕족인 성골이다. 그에 비해 김유신은 무너진 가야 왕족 출신으로 신라 중앙귀족의 입장에서는 ‘변방 출신 굴러온 돌’이었다. 바로 김춘추, 김유신의 발탁과 중용은 선덕 여왕에게는 신의 한 수이자 가장 중요한 리더십 발휘의 수단이 되었다. 인재를 알아보는 선구안, 그들의 능력을 키우는 경력관리,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일을 맡기는 것이야말로 리더의 덕목 중 으뜸이기 때문이다.
선덕 여왕은 김춘추에게는 정치 자문관이자 외교를 총괄하는 직책을 맡겼다. 그리고 김유신에게는 신라의 군대를 지휘하게 했다. 당연히 반발이 일어났다. 경주의 귀족들은 왕위계승서열 선두권인 김춘추의 정치적 부상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가야 출신의 김유신이 군부의 실력자로 등장하는 것에 반발했다. 이때 선덕 여왕이 꾀를 냈다. 바로 김춘추와 김유신을 혼인 동맹을 맺게 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선덕 여왕이 궁을 걷고 있는데 궁 밖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 올랐다. 선덕 여왕은 “무엇이 타고 있는 것이냐? 연유를 알아 보아라” 지시를 내렸다. 곧이어 “김유신이 자신의 누이동생인 문희를 불태워 죽인다고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지폈다 하옵니다”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선덕 여왕은 더 자세히 그 내막을 알아보게 했다. “부인이 있는 김춘추가 문희와 정을 통해 이미 아이를 가졌다고 합니다. 이에 김유신이 격분해 누이를 죽인답니다”하자 선덕 여왕이 중재에 나서 김춘추와 문희를 혼인시켰다는 것이다. < 삼국유사> 등에는 김춘추와 김유신이 사돈이 된 것을 마치 돌발적인 스캔들로 묘사했지만 이는 당시 신라의 지배구조를 바꿀 수 있는 대사건이었다. 김춘추는 왕족으로 성골의 위치에 있었지만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라는 출신 성분은 정통 성골에 비해 약점이 있었다.
634년, 선덕 여왕은 분황사를 창건하고 인평이라는 독자 연호를 채택해 신라의 자주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나라 밖의 정세는 일촉즉발이었다. 백제 의자왕은 수시로 신라 땅을 넘었다. 수많은 전투가 이어졌고 그때마다 신라는 번번이 백제에게 패하며 약 40여 개의 성을 백제에게 빼앗겼다. 하지만 신라에게 가장 뼈아픈 패배는 대야성과 당항성 전투였다. 백제의 윤충은 대야성을 공격했다. 대야성은 신라의 수도 경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 잡은 요충지이다. 대야성을 빼앗긴다는 것은 경주의 목에 백제의 칼끝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대야성과 함께 가야 지역마저 백제에 점령당해 신라는 그야말로 풍전등화 상태였다.
비극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당항성을 빼앗겼다. 당항성은 신라의 유일한 동맹국인 당나라와의 소통 창고이자 무역항이었다. 이곳마저 함락 당하자 신라는 나라의 존립을 걱정할 지경에 달했다.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는 선덕 여왕 통치기의 실력자 김춘추의 사위 품석이 대야성을 수비하다 전사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선덕 여왕은 온 국력을 동원해 백제를 막아내면서 당나라에 지속적인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외교적 압박을 요구했다. 당나라는 신라의 요구를 처음에는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라가 패망할 경우 한반도 힘의 균형이 깨지고, 그것이 결국 당나라 에게도 득이 될 게 없다는 판단으로 고구려와 백제에 군사 외교적 압력이 가해 신라는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위기를 넘긴 선덕 여왕은 인재 부족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성골 남자 왕족이 없어 왕위에 올랐지만 진골 출신 야심만만한 귀족들은 은근히 여왕을 얕보았고 무장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여왕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도 존재했고 아버지 진평왕의 아우 백반과 국반 등 두 삼촌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선덕 여왕은 자신의 강력한 지지 세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선덕 여왕은 두 가지 전략을 세워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첫째는 자신의 친위세력 형성이고 두 번째는 왕위 계승과 정통성의 대외적 인정이었다. 선덕 여왕은 과감하게 두 명의 인재를 자신의 세력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관계 개선과 동맹, 문물의 교류, 공식적 책봉을 요구했다.
그 두 명의 인재가 바로 김춘추와 김유신이다.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이며 천명 공주의 아들로, 선덕 여왕에겐 조카였다. 부모 양쪽인 왕족인 성골이다. 그에 비해 김유신은 무너진 가야 왕족 출신으로 신라 중앙귀족의 입장에서는 ‘변방 출신 굴러온 돌’이었다. 바로 김춘추, 김유신의 발탁과 중용은 선덕 여왕에게는 신의 한 수이자 가장 중요한 리더십 발휘의 수단이 되었다. 인재를 알아보는 선구안, 그들의 능력을 키우는 경력관리, 그들에게 가장 적합한 일을 맡기는 것이야말로 리더의 덕목 중 으뜸이기 때문이다.
선덕 여왕은 김춘추에게는 정치 자문관이자 외교를 총괄하는 직책을 맡겼다. 그리고 김유신에게는 신라의 군대를 지휘하게 했다. 당연히 반발이 일어났다. 경주의 귀족들은 왕위계승서열 선두권인 김춘추의 정치적 부상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가야 출신의 김유신이 군부의 실력자로 등장하는 것에 반발했다. 이때 선덕 여왕이 꾀를 냈다. 바로 김춘추와 김유신을 혼인 동맹을 맺게 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선덕 여왕이 궁을 걷고 있는데 궁 밖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 올랐다. 선덕 여왕은 “무엇이 타고 있는 것이냐? 연유를 알아 보아라” 지시를 내렸다. 곧이어 “김유신이 자신의 누이동생인 문희를 불태워 죽인다고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지폈다 하옵니다”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선덕 여왕은 더 자세히 그 내막을 알아보게 했다. “부인이 있는 김춘추가 문희와 정을 통해 이미 아이를 가졌다고 합니다. 이에 김유신이 격분해 누이를 죽인답니다”하자 선덕 여왕이 중재에 나서 김춘추와 문희를 혼인시켰다는 것이다. < 삼국유사> 등에는 김춘추와 김유신이 사돈이 된 것을 마치 돌발적인 스캔들로 묘사했지만 이는 당시 신라의 지배구조를 바꿀 수 있는 대사건이었다. 김춘추는 왕족으로 성골의 위치에 있었지만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라는 출신 성분은 정통 성골에 비해 약점이 있었다.

김유신 역시 가야 왕족 출신이지만 멸망한 가야에서 신라의 귀족사회로 병합되는 과정에서 진골을 부여 받은 처지였다. 두 사람 모두 정치적 야망을 펴기에는 약점이 있었다. 선덕 여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평왕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여왕이라는 점, 또한 자신의 대를 이을 후계를 얻지 못해 귀족의 반발과 진심의 충성을 받고 있지 못했다.
바로 이 두 세력이 모인 것인 ‘김유신의 문희 화형 퍼포먼스’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마도 김유신, 김춘추와 선덕 여왕이 머리를 맞대고 고안해낸 공동 연출 작품인 것이다. 물론 김춘추는 진골인 문희와 혼인함으로써 골품이 성골에서 진골로 격하되었지만 훗날 진골 출신 신라 최초의 왕 태종무열왕이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을 양 날개로 삼자 선덕 여왕의 리더십은 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왕이라고 무시하던 당나라로부터 ‘주국낙랑군공신라왕’이라는 책봉을 정식으로 받았다. 이어 선덕 여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 동맹을 요청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보장왕은 김춘추에게 오히려 “진흥왕 시절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성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풀어주지 않겠다”고 감옥에 가두었다. 김춘추는 “내 목을 가져가도 성을 다시 돌려줄 수는 없다”고 버텼다. 김춘추는 능란한 외교관이었다. 외교관은 고금이래로 ‘국익을 위해 합법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은 공무원’이었다. 김춘추는 “나를 풀어주면 신라로 돌아가 왕에게서 성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당시 고구려의 실력자인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신라로 돌려보냈다.
물론 연개소문이 김춘추의 거짓말을 믿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춘추가 투옥되자 선덕 여왕은 군대를 보내 한강 지역의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 같은 무력시위는 김춘추를 석방하지 않으면 고구려와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당나라와의 전쟁에 직면한 고구려로서는 실익도 없는 신라와 전면전을 할 형편이 되지 않아 김춘추를 풀어 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군을 지휘해 고구려를 압박한 장군은 김유신이었다.
선덕 여왕은 이 두 사람의 능력을 100% 활용했다. 김춘추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국제 관계를 총괄하며 신라의 존재감을 돋보였다. 김유신은 군권을 장악하며 고구려, 백제와의 전투를 이끌었고 또한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반란에도 대비했다.
바로 이 두 세력이 모인 것인 ‘김유신의 문희 화형 퍼포먼스’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마도 김유신, 김춘추와 선덕 여왕이 머리를 맞대고 고안해낸 공동 연출 작품인 것이다. 물론 김춘추는 진골인 문희와 혼인함으로써 골품이 성골에서 진골로 격하되었지만 훗날 진골 출신 신라 최초의 왕 태종무열왕이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을 양 날개로 삼자 선덕 여왕의 리더십은 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왕이라고 무시하던 당나라로부터 ‘주국낙랑군공신라왕’이라는 책봉을 정식으로 받았다. 이어 선덕 여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 동맹을 요청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보장왕은 김춘추에게 오히려 “진흥왕 시절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성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풀어주지 않겠다”고 감옥에 가두었다. 김춘추는 “내 목을 가져가도 성을 다시 돌려줄 수는 없다”고 버텼다. 김춘추는 능란한 외교관이었다. 외교관은 고금이래로 ‘국익을 위해 합법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은 공무원’이었다. 김춘추는 “나를 풀어주면 신라로 돌아가 왕에게서 성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당시 고구려의 실력자인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신라로 돌려보냈다.
물론 연개소문이 김춘추의 거짓말을 믿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춘추가 투옥되자 선덕 여왕은 군대를 보내 한강 지역의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 같은 무력시위는 김춘추를 석방하지 않으면 고구려와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당나라와의 전쟁에 직면한 고구려로서는 실익도 없는 신라와 전면전을 할 형편이 되지 않아 김춘추를 풀어 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군을 지휘해 고구려를 압박한 장군은 김유신이었다.
선덕 여왕은 이 두 사람의 능력을 100% 활용했다. 김춘추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국제 관계를 총괄하며 신라의 존재감을 돋보였다. 김유신은 군권을 장악하며 고구려, 백제와의 전투를 이끌었고 또한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반란에도 대비했다.

▶국익을 위해 개인적 수모를 감수하다
선덕 여왕은 민심 안정과 왕권 강화를 위해 불교를 적극 활용했다. 분황사에 이어 영묘사와 황룡사 9층탑을 만들었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인 첨성대를 만들어 1년을 24절기로 구분해 농사에 적극 활용했다. 또한 자장 법사를 당나라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고 국비 장학생을 선발해 당나라의 국자감에서 공부하게 했다.
선덕 여왕은 국교인 불교와 왕실의 정통성을 동일시하는 민심을 적극 활용했다. ‘왕즉불王卽佛’, 즉 ‘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적 전파를 통해 대내외적인 정치적 위기와 흔들리는 리더십을 지탱한 것이다. 선덕 여왕은 약 21개의 사찰을 창건했다. 특히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혼령을 모신 영묘사를 매년 참배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나라를 위해 전사한 일개 병사의 혼령도 위로하는 왕’이라는 인식을 주었다. 이는 국가와 국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유도하는 훌륭한 장치가 되었다. 그리고 자장 법사를 종교와 문화 분야 참모로서, 특히 그의 당나라 불교 인맥을 활용하는 외교 전략을 구사했다. 이 같은 활동을 통해 선덕 여왕은 왕으로서의 권위를 신화적인 존재로 상징화함으로써 이를 통치에 반영한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선덕 여왕의 대대적인 불사에 대한 비판도 있다. 국경에서는 매일 패전 소식만 들리는데 막대한 국고가 소요되는 사찰 건립에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오히려 민심은 더 흉흉해지고 각처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신정일치의 전제군주 하에서 종교는 정치, 군사, 경제 분야에 못지않은 중요한 부분이었다. 특히 국민 통합, 민심 즉 여론 형성과 통제에도 불교는 유용한 통치의 수단이었고 이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선덕 여왕의 리더십을 통틀어 무능한 암군이었다는 지적은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왕정에서, 군주가 국가와 민심의 구심점이 되는 것이 가장 완벽한 통치체제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왕권이 여러 이유로 이를 이끌어낼 수 없는 상황일 때는 민심과 국력을 하나로 집중시킬 상징이 필요한 것이고 선덕 여왕은 불교를 선택한 것이다. 이는 고려조에서도 있었다. 억불숭유 정책을 썼던 조선에서는 종묘와 종묘 제례의식 자체가 조선 사회의 도덕률,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이다.
선덕 여왕에게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는 군사적인 부분이었다. 물론 김유신을 중용하면서 나름 고구려, 백제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것은 국력과 비례한 국방력의 강화였지만 이는 당장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선덕 여왕은 “우리에게 지금 힘이 없다면 빌리기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대상은 당나라였다. 줄기차게 당나라에 군사적 원조와 고구려, 백제에 대한 압박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선덕 여왕은 당 태종에게 굴욕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당 태종은 “신라가 왕이 여왕이기 때문에 이웃나라들이 얕보는 것이다. 신라가 원한다면 내가 당나라 종친을 신라 왕으로 보낼 수 있다. 그러면 군대를 보내 신라를 지켜줄 것이다”라는 오만한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뿐이 아니다. 당 태종은 선덕 여왕에게 진홍색, 자색, 백색 모란 그림과 씨앗 석 되를 보냈다. 이를 보고 선덕 여왕은 “이 꽃은 피어도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하들은 반신반의했지만 씨앗을 뿌려 시간이 지난 후 꽃이 피었는데 과연 선덕 여왕의 말대로 꽃은 향기가 없었다. 신하들이 “어찌하여 꽃이 향기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까?”라고 묻자 선덕 여왕은 이렇게 답변했다.
“화려한 꽃을 그리면서 벌과 나비를 그리지 않은 것은 향기가 없다는 뜻이다. 물론 당 태종은 이 그림을 통해 나를 조롱한 것이다. 그것은 남편이 없는, 즉 내가 여왕이라 것을 비꼬아 희롱한 셈이다.”
선덕 여왕은 이런 수모와 조롱을 당하면서도 당나라와의 교류를 끊거나 멈추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나라의 도움이 없다면 당장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는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한 행동인 것이다. 한 국가의 군주로서 선덕 여왕 역시 자존심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군주는 국가의 존립, 국민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자리다. 개인적인 감정이 결코 국익보다 먼저일 수 없다는 리더로서의 책임감으로 개인적인 모욕을 이겨낸 것이다.
▶신화와 현실이 공존하다
<삼국유사>에는 모란꽃 일화에 더불어 선덕 여왕의 현명함과 예지력을 드러내는 일화가 있다. ‘지기삼사知機三事’ 즉 ‘미리 기미를 알아채고 준비를 해 위기를 막았다’는 뜻이다. 이는 한마디로 선덕 여왕을 미화하면서 정통성을 부각하는 일화이다. 첫 번째는 앞서의 당 태종이 보낸 모란꽃이고 두 번째는 개구리 울음소리로 백제군의 기습을 알아낸 일이다.
636년, 영묘사의 저수지 옥문지에서 개구리들이 일제히 울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순식간에 경주를 뒤덮었다. 관리들과 백성들은 이유를 몰라 우왕좌왕할 때 선덕 여왕은 군대를 불렀다. “지금 즉시 여근곡으로 가라. 그러면 백제군이 매복해 있을 것이다.” 군사들이 가보니 과연 그곳에 백제군 500명이 숨어 있었다. 신라군은 백제군을 물리쳤다. 선덕 여왕은 궁금해 하는 신하들에게 “개구리가 일제히 우는 것은 병사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구리가 있는 옥문지는 여자의 국부를 상징한다. 여자의 음은 그 빛이 백색이라 백색은 서쪽 방위를 나타내며 군사인 남근이 여근곡에 들어가면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신하들은 일제히 선덕 여왕의 현명함과 예지력에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세 번째는 선덕 여왕이 자신이 죽을 날을 예언했다고 한다. “내가 모월모일에 죽을 것이니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서 장사를 지내거라.” 그 날이 되자 선덕 여왕은 숨을 거두었고 신하들은 선덕 여왕이 알려준 낭산 남쪽에 장사 지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이 선덕 여왕의 능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웠다. 그런데 불교에 의하면 도리천은 사천왕천 위에 있다고 쓰여 있어 결과적으로는 선덕 여왕의 예언대로 도리천에 능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647년, 선덕 여왕이 재위 16년을 맞았다. 기록에는 선덕 여왕의 남편은 음 갈문왕이라고 하지만 후사는 없었다. 국내외 정세는 김춘추의 외교적 노력과 김유신의 군지휘력으로 안정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내정은 평탄치 않았다. 중앙귀족, 지방관, 무장, 국민들 역시 여왕이라는 통치 형태는 처음 경험이었다. 모두가 만족할 수는 없었다. 특히 귀족과 진골 출신 왕족들은 후계가 없는 선덕 여왕의 ‘다음’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선덕 여왕의 후계를 이을 수 있는 유일하게 남은 성골 남자는 당연히 없었다. 선덕의 자매인 천명은 진골이 되었고 선화 공주는 백제왕과 ‘서동요’의 주인공이 되는 등 왕이 될 수 없었다.
선덕 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의 두 남동생 백반, 국반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왕통을 이을 자격을 상실했다. 유일한 성골은 국반 갈문왕의 딸 김승만이었다. 선덕 여왕은 승만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가 바로 진덕 여왕이 된다. 그러자 귀족들이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여왕이 다스리는 것을 한 번은 넘어갔지만 다시 여왕 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다.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 중심 인물이 바로 선덕 여왕이 중용한 상대등 비담이었다. 그는 염종 등 여러 귀족과 명활성에 주둔하면서 대규모 군사를 일으켰다. 선덕 여왕은 김유신을 불러 이에 진압을 명령했다. 김유신은 김춘추와 함께 진압에 나섰지만 반란군의 세는 만만치 않았다.
그 와중에 선덕 여왕이 병석에 누웠다. 어느 날 밤, 월성에 큰 별이 떨어졌다. 그러자 비담은 “이는 여왕의 군대가 패하고 여왕이 죽는다는 하늘의 계시이다”라고 주장해 반란군의 사기가 올랐다. 김유신은 밤중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후 연에 달아 하늘에 날렸다. 마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김유신은 “별이 다시 승천했다. 이는 여왕의 군대가 승리한다는 하늘의 계시이다”라고 선전했다. 전투는 일진일퇴였다. 647년 1월8일, 선덕 여왕은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선덕 여왕의 장례를 치르고 군대를 재정비한 김유신은 그 달 17일에 마침내 승리하면서 비담을 비롯 반란에 가담한 모든 귀족을 숙청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진덕 여왕이 신라 제28대 왕위에 올랐다. 당연히 김춘추와 김유신이 신라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선덕 여왕이 설계한 신라의 집권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선덕 여왕은 민심 안정과 왕권 강화를 위해 불교를 적극 활용했다. 분황사에 이어 영묘사와 황룡사 9층탑을 만들었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인 첨성대를 만들어 1년을 24절기로 구분해 농사에 적극 활용했다. 또한 자장 법사를 당나라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고 국비 장학생을 선발해 당나라의 국자감에서 공부하게 했다.
선덕 여왕은 국교인 불교와 왕실의 정통성을 동일시하는 민심을 적극 활용했다. ‘왕즉불王卽佛’, 즉 ‘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적 전파를 통해 대내외적인 정치적 위기와 흔들리는 리더십을 지탱한 것이다. 선덕 여왕은 약 21개의 사찰을 창건했다. 특히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혼령을 모신 영묘사를 매년 참배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나라를 위해 전사한 일개 병사의 혼령도 위로하는 왕’이라는 인식을 주었다. 이는 국가와 국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유도하는 훌륭한 장치가 되었다. 그리고 자장 법사를 종교와 문화 분야 참모로서, 특히 그의 당나라 불교 인맥을 활용하는 외교 전략을 구사했다. 이 같은 활동을 통해 선덕 여왕은 왕으로서의 권위를 신화적인 존재로 상징화함으로써 이를 통치에 반영한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선덕 여왕의 대대적인 불사에 대한 비판도 있다. 국경에서는 매일 패전 소식만 들리는데 막대한 국고가 소요되는 사찰 건립에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오히려 민심은 더 흉흉해지고 각처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신정일치의 전제군주 하에서 종교는 정치, 군사, 경제 분야에 못지않은 중요한 부분이었다. 특히 국민 통합, 민심 즉 여론 형성과 통제에도 불교는 유용한 통치의 수단이었고 이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선덕 여왕의 리더십을 통틀어 무능한 암군이었다는 지적은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왕정에서, 군주가 국가와 민심의 구심점이 되는 것이 가장 완벽한 통치체제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왕권이 여러 이유로 이를 이끌어낼 수 없는 상황일 때는 민심과 국력을 하나로 집중시킬 상징이 필요한 것이고 선덕 여왕은 불교를 선택한 것이다. 이는 고려조에서도 있었다. 억불숭유 정책을 썼던 조선에서는 종묘와 종묘 제례의식 자체가 조선 사회의 도덕률,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이다.
선덕 여왕에게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는 군사적인 부분이었다. 물론 김유신을 중용하면서 나름 고구려, 백제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것은 국력과 비례한 국방력의 강화였지만 이는 당장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선덕 여왕은 “우리에게 지금 힘이 없다면 빌리기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대상은 당나라였다. 줄기차게 당나라에 군사적 원조와 고구려, 백제에 대한 압박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선덕 여왕은 당 태종에게 굴욕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당 태종은 “신라가 왕이 여왕이기 때문에 이웃나라들이 얕보는 것이다. 신라가 원한다면 내가 당나라 종친을 신라 왕으로 보낼 수 있다. 그러면 군대를 보내 신라를 지켜줄 것이다”라는 오만한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뿐이 아니다. 당 태종은 선덕 여왕에게 진홍색, 자색, 백색 모란 그림과 씨앗 석 되를 보냈다. 이를 보고 선덕 여왕은 “이 꽃은 피어도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하들은 반신반의했지만 씨앗을 뿌려 시간이 지난 후 꽃이 피었는데 과연 선덕 여왕의 말대로 꽃은 향기가 없었다. 신하들이 “어찌하여 꽃이 향기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까?”라고 묻자 선덕 여왕은 이렇게 답변했다.
“화려한 꽃을 그리면서 벌과 나비를 그리지 않은 것은 향기가 없다는 뜻이다. 물론 당 태종은 이 그림을 통해 나를 조롱한 것이다. 그것은 남편이 없는, 즉 내가 여왕이라 것을 비꼬아 희롱한 셈이다.”
선덕 여왕은 이런 수모와 조롱을 당하면서도 당나라와의 교류를 끊거나 멈추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나라의 도움이 없다면 당장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는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한 행동인 것이다. 한 국가의 군주로서 선덕 여왕 역시 자존심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군주는 국가의 존립, 국민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자리다. 개인적인 감정이 결코 국익보다 먼저일 수 없다는 리더로서의 책임감으로 개인적인 모욕을 이겨낸 것이다.
▶신화와 현실이 공존하다
<삼국유사>에는 모란꽃 일화에 더불어 선덕 여왕의 현명함과 예지력을 드러내는 일화가 있다. ‘지기삼사知機三事’ 즉 ‘미리 기미를 알아채고 준비를 해 위기를 막았다’는 뜻이다. 이는 한마디로 선덕 여왕을 미화하면서 정통성을 부각하는 일화이다. 첫 번째는 앞서의 당 태종이 보낸 모란꽃이고 두 번째는 개구리 울음소리로 백제군의 기습을 알아낸 일이다.
636년, 영묘사의 저수지 옥문지에서 개구리들이 일제히 울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순식간에 경주를 뒤덮었다. 관리들과 백성들은 이유를 몰라 우왕좌왕할 때 선덕 여왕은 군대를 불렀다. “지금 즉시 여근곡으로 가라. 그러면 백제군이 매복해 있을 것이다.” 군사들이 가보니 과연 그곳에 백제군 500명이 숨어 있었다. 신라군은 백제군을 물리쳤다. 선덕 여왕은 궁금해 하는 신하들에게 “개구리가 일제히 우는 것은 병사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구리가 있는 옥문지는 여자의 국부를 상징한다. 여자의 음은 그 빛이 백색이라 백색은 서쪽 방위를 나타내며 군사인 남근이 여근곡에 들어가면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신하들은 일제히 선덕 여왕의 현명함과 예지력에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세 번째는 선덕 여왕이 자신이 죽을 날을 예언했다고 한다. “내가 모월모일에 죽을 것이니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서 장사를 지내거라.” 그 날이 되자 선덕 여왕은 숨을 거두었고 신하들은 선덕 여왕이 알려준 낭산 남쪽에 장사 지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이 선덕 여왕의 능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웠다. 그런데 불교에 의하면 도리천은 사천왕천 위에 있다고 쓰여 있어 결과적으로는 선덕 여왕의 예언대로 도리천에 능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647년, 선덕 여왕이 재위 16년을 맞았다. 기록에는 선덕 여왕의 남편은 음 갈문왕이라고 하지만 후사는 없었다. 국내외 정세는 김춘추의 외교적 노력과 김유신의 군지휘력으로 안정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내정은 평탄치 않았다. 중앙귀족, 지방관, 무장, 국민들 역시 여왕이라는 통치 형태는 처음 경험이었다. 모두가 만족할 수는 없었다. 특히 귀족과 진골 출신 왕족들은 후계가 없는 선덕 여왕의 ‘다음’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선덕 여왕의 후계를 이을 수 있는 유일하게 남은 성골 남자는 당연히 없었다. 선덕의 자매인 천명은 진골이 되었고 선화 공주는 백제왕과 ‘서동요’의 주인공이 되는 등 왕이 될 수 없었다.
선덕 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의 두 남동생 백반, 국반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왕통을 이을 자격을 상실했다. 유일한 성골은 국반 갈문왕의 딸 김승만이었다. 선덕 여왕은 승만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가 바로 진덕 여왕이 된다. 그러자 귀족들이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여왕이 다스리는 것을 한 번은 넘어갔지만 다시 여왕 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다.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 중심 인물이 바로 선덕 여왕이 중용한 상대등 비담이었다. 그는 염종 등 여러 귀족과 명활성에 주둔하면서 대규모 군사를 일으켰다. 선덕 여왕은 김유신을 불러 이에 진압을 명령했다. 김유신은 김춘추와 함께 진압에 나섰지만 반란군의 세는 만만치 않았다.
그 와중에 선덕 여왕이 병석에 누웠다. 어느 날 밤, 월성에 큰 별이 떨어졌다. 그러자 비담은 “이는 여왕의 군대가 패하고 여왕이 죽는다는 하늘의 계시이다”라고 주장해 반란군의 사기가 올랐다. 김유신은 밤중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후 연에 달아 하늘에 날렸다. 마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김유신은 “별이 다시 승천했다. 이는 여왕의 군대가 승리한다는 하늘의 계시이다”라고 선전했다. 전투는 일진일퇴였다. 647년 1월8일, 선덕 여왕은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선덕 여왕의 장례를 치르고 군대를 재정비한 김유신은 그 달 17일에 마침내 승리하면서 비담을 비롯 반란에 가담한 모든 귀족을 숙청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진덕 여왕이 신라 제28대 왕위에 올랐다. 당연히 김춘추와 김유신이 신라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선덕 여왕이 설계한 신라의 집권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리더십 | 인재를 등용하고 인재를 키우는 것이 진짜 리더십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신라계 왕족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던 인물이다. 고려조의 명신이자 세도가로서 또한 남성우월의식도 강했으리라 짐작된다. 그의 선덕 여왕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선덕 여왕은 관인명민寬仁明敏, 즉 너그럽고 어질며 현명하다’는 평가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신라는 어찌 늙은 할미로 하여금 국가의 정사를 재단하게 했는가. 여자를 세워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덕 여왕의 리더십이 부족했다면 16년간 신라를 다스릴 수 있었을까. 그 선대인 진지왕이 남자 군주임에도 리더십 부족으로 폐위되었던 선례를 보면 선덕 여왕 역시 통치를 지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김춘추, 김유신이 친위대 역할을 했지만 한 국가가 몇몇 개인의 능력으로 지탱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연히 리더십과 그 리더십을 믿고 따르는 민심이 있어야 군주는 존재할 수 있는 명분을 얻는 것이다.
선덕 여왕의 리더십 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것은 ‘애민정신’ 그리고 ‘인재 등용’이다. 선덕 여왕은 당시 김유신과 김춘추에 의해 제기된 삼국통일론을 받아들였지만 최우선으로 생각한 것은 국민들의 안정된 삶이었다. 매일같이 전쟁이 일어나고 생사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삶에서는 통일론조차 허망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즉 모든 국민과 관리, 사회 지도층이 하나된 마음으로 민심을 모을 때 국력의 신장, 삼국통일론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통일을 위한 전제조건이 군사력이 아닌 민생 안정과 국민의 정신적 통합이어야 하다는 선덕 여왕의 리더십은 지금 보아도 옳은 순서인 것이다.
그를 바탕으로 선덕 여왕은 서두르지 않았다. 불사를 통해 국민들에게 정신적인 일체감을 부여했고 당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신라의 힘을 배가시킬 수 있는 방편을 찾았다. 그리고 이러한 선덕 여왕의 리더십, 통치철학을 공유하고 실천할 수 있는 시스템, 즉 인재를 등용했다.
집권 초기에는 올제를 상대등으로 기용했고, 종교에는 자장 법사를, 그리고 무엇보다 김춘추와 김유신을 적재적소에 기용해 국가의 기둥으로 만든 것이다. 리더십 학자들은 특히 김춘추의 중용에 대해 남다른 시선을 제기한다. “선덕 여왕이 여자 군주였기에 김춘추가 성장할 수 있었다. 혈통, 능력, 인맥, 국제 감각 등에서 탁월했던 김춘추가 중용되고 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남성이 왕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남성 군주는 그를 경쟁자로 여겨 아마도 제거했을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또한 가야 출신으로 충성심, 애국심을 확인하기 어려웠던 김유신에 군사권을 맡긴 대범함 또한 선덕 여왕의 리더십에서 돋보이는 부분인 것이다.
선덕 여왕의 리더십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대외관계이다. 개인적으로 당 태종에게 수모를 겪으면서도 대의, 국익을 위해 선덕 여왕은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당나라를 이용해 백제와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을 견제하면서 한편으로 당나라의 선진 문물과 정치, 학문, 문화 제도를 받아들여 신라의 학문과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이다.
한반도 최초의 여왕이었던 선덕 여왕. 그녀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가 공존하지만 삼국통일의 대업으로 가는 신라의 첫걸음을 뗀 리더임은 분명하다. 총명하고 현명했으며 관대한 마음으로 국민을 살폈고 다양한 인재를 등용해 국가와 사회에 생동감을 불어넣은 리더였다. 여왕이라는 사실에 앞서, 존경을 보내야 할 리더인 것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인용 및 참고 (<선덕여왕> 한소진 저/ 해냄출판사 펴냄)]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신라계 왕족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던 인물이다. 고려조의 명신이자 세도가로서 또한 남성우월의식도 강했으리라 짐작된다. 그의 선덕 여왕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선덕 여왕은 관인명민寬仁明敏, 즉 너그럽고 어질며 현명하다’는 평가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신라는 어찌 늙은 할미로 하여금 국가의 정사를 재단하게 했는가. 여자를 세워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덕 여왕의 리더십이 부족했다면 16년간 신라를 다스릴 수 있었을까. 그 선대인 진지왕이 남자 군주임에도 리더십 부족으로 폐위되었던 선례를 보면 선덕 여왕 역시 통치를 지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김춘추, 김유신이 친위대 역할을 했지만 한 국가가 몇몇 개인의 능력으로 지탱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당연히 리더십과 그 리더십을 믿고 따르는 민심이 있어야 군주는 존재할 수 있는 명분을 얻는 것이다.
선덕 여왕의 리더십 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것은 ‘애민정신’ 그리고 ‘인재 등용’이다. 선덕 여왕은 당시 김유신과 김춘추에 의해 제기된 삼국통일론을 받아들였지만 최우선으로 생각한 것은 국민들의 안정된 삶이었다. 매일같이 전쟁이 일어나고 생사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삶에서는 통일론조차 허망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즉 모든 국민과 관리, 사회 지도층이 하나된 마음으로 민심을 모을 때 국력의 신장, 삼국통일론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통일을 위한 전제조건이 군사력이 아닌 민생 안정과 국민의 정신적 통합이어야 하다는 선덕 여왕의 리더십은 지금 보아도 옳은 순서인 것이다.
그를 바탕으로 선덕 여왕은 서두르지 않았다. 불사를 통해 국민들에게 정신적인 일체감을 부여했고 당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신라의 힘을 배가시킬 수 있는 방편을 찾았다. 그리고 이러한 선덕 여왕의 리더십, 통치철학을 공유하고 실천할 수 있는 시스템, 즉 인재를 등용했다.
집권 초기에는 올제를 상대등으로 기용했고, 종교에는 자장 법사를, 그리고 무엇보다 김춘추와 김유신을 적재적소에 기용해 국가의 기둥으로 만든 것이다. 리더십 학자들은 특히 김춘추의 중용에 대해 남다른 시선을 제기한다. “선덕 여왕이 여자 군주였기에 김춘추가 성장할 수 있었다. 혈통, 능력, 인맥, 국제 감각 등에서 탁월했던 김춘추가 중용되고 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남성이 왕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남성 군주는 그를 경쟁자로 여겨 아마도 제거했을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또한 가야 출신으로 충성심, 애국심을 확인하기 어려웠던 김유신에 군사권을 맡긴 대범함 또한 선덕 여왕의 리더십에서 돋보이는 부분인 것이다.
선덕 여왕의 리더십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대외관계이다. 개인적으로 당 태종에게 수모를 겪으면서도 대의, 국익을 위해 선덕 여왕은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당나라를 이용해 백제와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을 견제하면서 한편으로 당나라의 선진 문물과 정치, 학문, 문화 제도를 받아들여 신라의 학문과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이다.
한반도 최초의 여왕이었던 선덕 여왕. 그녀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가 공존하지만 삼국통일의 대업으로 가는 신라의 첫걸음을 뗀 리더임은 분명하다. 총명하고 현명했으며 관대한 마음으로 국민을 살폈고 다양한 인재를 등용해 국가와 사회에 생동감을 불어넣은 리더였다. 여왕이라는 사실에 앞서, 존경을 보내야 할 리더인 것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인용 및 참고 (<선덕여왕> 한소진 저/ 해냄출판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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