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전설 야담

고리백정 사위 이장곤(李長坤)

목눌인 2016. 11. 24. 16:12

고리백정 사위 이장곤(李長坤) 이야기

.

조선조 연산군 때 교리(校理 正五品 문관) 이장곤(李長坤)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연산군이 잡아 죽이려 하자 허둥지동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함경도 함흥땅으로 줄행랑을 쳤다.

때는 한 여름,옷은 땀 범벅,숨도 차고 목도 엄청나게 타올랐다.

어느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우물에서 물 긷는 처녀가 있었다.

"내가 목이 몹시 마른데, 물 한 바가지 떠 줄 수 있겠느나?"

나그네의 몰골을 살펴보던 처녀, 바가자로 물을 뜨더니

우물가에 흐늘어진 버들잎을 훑어 물위에 띄우고 건넸다.

교리 이장곤, 바가지에 뜬 버들잎을 후후 불어 마시고

갈증을 풀고나니 그제서야 제 정신이 돌아왔다.

이장곤은 바가지를 돌려 주면서 ,수줍은듯

고개 숙이고 서 있는 처녀에게 물었다.

"왜? 물에 버들잎을 띄워 주었느냐?"

"선비님이 급히 마시다가 체할 것 같아서 그랬사옵니다"

듣고 보니 옳은 말이다,참으로 영특한 처녀로구나.

치렁치렁 땋아내린 긴 머리는 발밑에 닿을듯 하고,

얼굴은 달덩이, 미소 지을때 옴폭 파인 보조개 , 앵두같은 입술,

보면 볼 수록 사랑스럽고 입맛이 쩍쩍 당기는 처녀였다.

그러나 어쩌랴, 쫓기는 신세 이장곤,

더 이상 아릿다운 시골처녀의 환상에 젖어 있을

겨를이 없다. 당장 오늘밤 숙식부터가 문제 아닌가.

아직 해는 남았으나 더는 걸어 갈 기력이 없다.

그래서 그는 이동네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하고

이집 저집 찾아가 잠자리를 청했더니

다행히도 어느 허름한 집에 들게 되었다.

그 후에 안 일이지만 이 마을은 버들가지로 고리짝이나 바구니

가재도구를 만들어 먹고 사는 천민계급 고리백정 마을이었다.

암튼, 이날 저녁상을 들고 들어 온 여인은 놀랍게도 낮에 봤던 그 처녀.

처녀는 밥상을 내려놓고 입술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되돌아 나갔다

.

교리 이장곤은 처녀의 뒷태를 보면서

마음 한 구석에 야릇한 불꽃을 느꼈다.

저녁상을 물린 후 그는 주인을 불러 수 인사를 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자기는 한양 사는 이선달,

과거에 낙방하고 상심해서 무작정 유랑길에 나섰다는 것등등,

철저히 신분을 속였다.그리고 주인에게 청을 넣었다..

"여보게 자네딸 날 주게"였다.

지금의 상식으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화법(話法)이지만

그 시대 상황에선 양반과 천민간엔 당연한 말투였다.

천민으로 태어나 한스럽게 살아 온 처지에

양반 사위를 본다는 것은 천지개벽(天地開闢)을 할 노릇,

그야말로 신분 상승의 좋은 기회가 아닌가.

"미천한 딸년이지만 그렇게 하시죠"

이렇게 해서 교리 이장곤이 고리백정의 사위가 되었고

피신길에 숨어 지낼 안가(安家)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뭐가 있는가?

먹고 자고 먹고 자고가 일과였다.

처음엔 양반사위님 보았다고 끔찍히도 위하든 장인도

놀고먹는 사위가 미워 말투도 차츰차츰 변했다.

"이서방님 일어 나셨습니까?" "이서방 일어 니셨는가?"

"이서방 일어 났나?""야,이놈아 이서방 아직도 자빠져 자냐?"

"밥도 아깝다 그자식 밥 주지 마라"

고리백정 장인의 말투가 이처럼 갈 수록 거칠어 졌다.

그럴 수록 누구편도 들 수 없는 딸은 눈물만 흘릴뿐이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낸지 몇해 후, 어느날 게으름뱅이 사위가

느닷없이 장구경을 다녀오더니 내일 관가에 보낼 고리짝은

자기가 받치고 오겠다고 자청했다. 장인은 생각했다.

"관가에 고리짝 받치기가 얼마나 까다롭고 어려운데

제깐놈이 감히 고리짝을 받치러 가겠다고?

오냐 못 받치고 오기만 해 봐라"

이튿날 교리 이장곤, 지게위에 고리짝 한 짐 짊어지고

관가를 찾아가 문을 지키는 관졸들을 물리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고리백정 사위 교리 이장곤이 버들고리 받치러 왔소"

관무를 보던 현령(縣令)이 깜짝 놀랐다.

"뭣이라고 ? 이장곤이라고?"

당시 조정은 중종반정 이후 임금이 이장곤을 백방으로 찾았다.

각 고을 수령 방백에게 이장곤을 찾아 보내라는

통문을 내렸으나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현령이 벌떡 일어나 고리짝 짐을 지고 마당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사나이를 보았다.

비록 의복은 남루하지만 번쩍이는 눈빛이

동문수학하고 함께 벼슬길에 올랐던

죽마고우, 이장곤.

바로 그 이장곤이가 분명했다.

버선발로 뛰어 내려 간 현령,

"이사람 장곤이 자네 이게 웬 일인가?

자네 그동안 어디서 숨어 지냈나?

전하께서 자네를 백방으로 찾고 걔신다네"

"그동안의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어쩔텐가?

이 고리짝 받아 줄란가 말란가?"

"그야, 여부있겠나"

두 벗은 대청마루에 올라앉아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며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털어 놓았다.

저녁 늦게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 온 사위를 본 장인,

"고리짝은 받쳤느냐?"

"받쳤네" 그리곤 암말도 않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 보니 게으름뱅이 사위놈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갑자기 마당은 왜 쓰느나?"

"손님이 온다네"

"이놈이 미쳤나?어제 고리짝 받치고 오더니

헛소리를 다 하구.

그래 누가 온다더냐?"

"좀 있으면 알게 될걸세"

잠시 후, 동구밖이 시끌시끌했다.

시종배 거느리고 쌍나발 불고 ,

이 고을 현령이 말타고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사람들은 길바닥에 엎드려 머리 조아리면서

현령이 어딜 가시나 지켜보고 있는데.

아니 이게 웬일?

게으름뱅이 이서방놈 처가로 들어가지 않는가?

느닷없이 찾아 온 현령 행차에 장인도 장모도 이서방 색시도

마당에 무릎 꿇고 엎드려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태연하게 웃고 있는 천덕꾸러기

이서방이 현령을 밎이했다.,

"자네 왔는가. 어서 이리로 올라 오게,

그리고 자네 형수한테 인사 올려야지,

여보 당신도 이리 올라와 인사 나눠"

마당위에 엎드려 있던

이장곤의 색시가 마루위로 올라와

하늘보다 더 높다고 생각한 이고을 현령과

형수씨. 계수씨, 허물없는 농담을 하면서 인사가 오갔다.

그리고 장인 장모도 불러 올렸다.

주변에 모여서 이 희안한 광경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이들의 웃음소리는

산넘어 물건너 멀리 더 머얼리 메아리져 흩어졌다.

그후 교리 이장곤은 박원종(朴元宗)의 천거로

복직되어 승승장구, 병조판서까지 지냈다는 이야기.

이것은 野話다.

 

 

 고리백정 사위 이장곤(李長坤) 그리고 그의 부인 양씨는 정경부인이 된 실화입니다

 

조선조 연산군 때 교리(校理 ) 벼슬을 하던 이장곤(李長坤)이과 양씨부인간의 사랑이야깁니다

연산군은 예쁜 여자라면 유부녀건 처녀건 가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산군은 이장곤이라는 관리의 아내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여자로 결정하고 궁궐로 불러들이도록 한다.

이장곤은 한숨만 쉴 수밖에 없었는데 정작 부인은 거울을 보며 치장을 하고있느게 아닌가?

이에 격분한 이장곤은 홧김에 아내를 죽이고 함경로 도망친다.

(사실은 문무를 겸하며 기골이 장대한 이장곤을 연산군은 어려워했다고 한다. 더구나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연산군이 잡아 죽이려 하자 ) 허둥지동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함경도 함흥땅으로 줄행랑을 쳤다 한여름 삼복더위에 옷은 땀에 흠뻑 젖었고 숨도 차고 갈증도 심했다.

어느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우물에서 물을 긷는 처녀를 만났다.

"내가 몹시 목이 마른데, 물 한 바가지 떠 줄 수 없겠나?"

나그네의 몰골을 살펴보던 처녀, 바가자로 물을 떠서 우물가에 휘늘어진 버들잎을 훑어 물 위에 띄우고 건네 주었다.

이장곤은 버들잎을 후후 불어 마시고 바가지를 돌려주며 "왜? 물에 버들잎을 띄워서 주었는가?"하고 물었다. "선비님이 급히 마시다가 체할 것 같아서 요" 듣고 보니 옳은 말, 참으로 심기가 깊고 영특한 처녀였다

치렁치렁 땋아내린 긴 머리는 발목까지 닿을듯하고, 수줍어서 붉어진 달덩이 같은 얼굴. 미소 지을때 옴폭 파인 보조개 , 앵두 같은 입술,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고 입맛이 쩍쩍 당기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쫓기는 신세 이장곤. 더는 아리따운 시골 처녀의 환상에 젖어 있을 겨를이 있었겠는가?

당장 오늘 밤 숙식부터가 문제 . 아직 해는 남아 있으나 더는 걸어갈 기력이 없다.

그래서 그는 이 동네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하고 이집 저집 수소문 끝에 다행히도 어느 집에 들게 되었다.

이 마을에 들어서서 안 일이지만 이 마을은 버들가지로 고리짝이나 바구니등 가재도구를 만들어 팔아먹고 사는 고리백정 마을이었다.

그 당시 고리백정은 천민계급에 속했다.

암튼, 이날 저녁상을 들고 들어온 여인은 놀랍게도 낮에 봤던 그 처녀. 처녀는 밥상을 내려놓고 입술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되돌아 나갔는데 그 모습이 그럴 수 없이 예뻐보였다

교리 이장곤은 처녀의 뒷태를 보면서 마음 한 구석에 야릇한 불꽃이 타오름을 느꼈다.

저녁상을 물린 후 그는 주인을 불러 수 인사를 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자기는 한양 사는 이생원, 과거에 낙방하고 상심끝에 무작정 유랑길에 나섰다는 것 등등, 철저히 신분을 감췄다.

그리고 주인에게 청을 넣었다.

"여보게 자네 딸 내게 줄 수 없겠나?"

지금의 상식으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화법(話法)이지만 그 시대의 상황으로선 양반과 천민계급간엔 당연한 말투였다.

천민으로 태어나 한스럽게 살아온 고리백정 처지에 양반 사위를 본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못했던 일,그야말로 신분 상승의 절호한 기회가 아닌가.

 "미천한 딸년이지만 선비님이 원하신다면 거두어 주시지요"

이렇게 해서 교리 이장곤은 고리백정의 사위가 되었고 앞으로 숨어 지낼 안가(安家)까지 마련된 셈이었다. 그동안 글이나 읽었지, 노동이란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이장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뭐가 있었겠는가?

처가에 얹혀 살면서 하는 일이란 고작 먹고 잠이나 자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처음엔 양반사위 보았다고 끔찍히도 위하던 이집 식구들도 놀고먹는 사위가 미워져 말투도 차츰 거칠어졌다.

"이서방님 일어 나셨습니까?" "이서방 일어 났는가?" "이서방 일어 났느냐?" "야,이놈아 이서방 아직도 자빠져 자냐?" "밥도 아깝다.

그자식 밥 반그릇만 주거라" 그럴 수록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는 새각시는 남몰래 눈물만 흘릴뿐이었다.

그렇게 미움 받고 눈치밥 얻어먹고 천덕꾸러기로 3년 넘게 세월을 보내던 어느날, 게으름뱅이 사위가 느닷없이 장구경 간다고 나갔다 오더니 중종반정으로 세상이 변한것을 알게 되었다

내일 관가에 납품할 고리짝은 자기가 바치고 오겠노라고 자청했다.

장인은 생각했다. "관가에 고리짝 납품하기가 얼마나 까다로운데 제깐놈이 감히 고리짝을 바치러 가겠다고? 어림없는 소리. 오냐, 못 바치고 오기만 해 봐라" 이튿날 교리 이장곤은 지게위에 고리짝을 한 짐 짊어지고 나갔다.

관가 앞에서 관문을 지키는 관졸들을 물리치고 찌렁찌렁 큰 소리로 외쳤다.

"고리백정 사위 이장곤이 버들고리 바치러 왔소" 관무(官務)를 보던 함흥부윤(咸興府尹)이 깜짝 놀라 일어섰다.

"뭣이라고 ? 이장곤이가 왔다고?"

당시 조정은 중종반정 (中宗反政)이후 임금이 교리 이장곤을 백방으로 찾고 있었다.

각 고을 수령 방백에게 이장곤을 찾아 보내라는 통문을 내렸으나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부윤(府尹)이 벌떡 일어나 고리짝 짐을 지고 마당 한가운데 떡 하니 버티고 서있는 사나이를 내려다 보았다. 비록 의복은 남루하나 번쩍이는 눈빛이 동문수학하고 함께 벼슬길에 올랐던 죽마고우 이장곤. 바로 그 이장곤이가 분명했다.

버선발로 뛰어 내려 간 함흥부윤(咸興府尹), "이사람 장곤이 자네 이게 웬 일인가?

자네 그동안 어디서 숨어 지냈나? 전하께서 자네를 백방으로 찾고 계신다네"

 "그동안의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어쩔셈인가? 이 고리짝 받아 줄란가 말란가?

" 부윤이 껄껄 웃으며 "그야, 여부있겠나" 두 벗은 대청마루에 올라앉아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며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털어 놓았다.

저녁 늦게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 온 사위를 본 장인, "고리짝은 바쳤느냐?" "바쳤네" 그리곤 암말도 않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 보니 게으름뱅이 사위놈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갑자기 마당은 왜 쓰느냐?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나"

"손님이 온다네" "이놈이 실성을 했나?

어제 고리짝을 바치고 오더니 헛소리를 다 하구. 그래 누가 온다더냐?" "좀 있으면 알게 될걸세" 잠시 후, 동구밖이 쌍나발 소리로 시끌벅적한 가운데. 나졸.시종배들을 거느린 이 고을 부윤이 말타고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길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면서 부윤이 어딜 행차하시나 지켜보고 있는데, 아니 이게 웬일?

게으름뱅이 이서방놈 처가로 들어가지 않는가?

느닷없이 찾아 온 부윤 행차에 장인 장모등 이집 온 식구들이 마당에 무릎 꿇고 넙죽 엎드려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천덕꾸러기 이서방이 껄껄 웃으며 부윤을 밎이했다.

"자네 왔는가. 어서 이리로 올라 오게, 그리고 자네 형수한테 인사 올려야지, 여보 당신도 이리 올라와 인사 나눠" 마당위에 엎드려 있던 이장곤의 각시 버들부인이 마루위로 올라와 하늘보다 더 높다고 생각한 이 고을 부윤과 맞대면을 했다.

꿈만 같았다. 이 고을 윗어른인 부윤과 남편이 " 형수씨. 계수씨,여보게 자네 ...

" 하면서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 받는 광경을 지켜보고 버들부인은 지난 날 버들잎이 맺어 준 인연에 무한한 축복을 느끼고 눈물을 흘렸다.

장인 장모도 마루위로 불러 올렸다. 주변에 모여서 이 희안한 광경을 지켜보는 동네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에 반사된 이들의 웃음소리는 산 넘어 물 건너 멀리멀리 메아리져 갔다.

며칠후 이장곤은 한양으로 올라가 주상을 배알했다.

그동안의 도피생활 경위를 들으신 임금님은 이장곤의 처가를 면천(免賤)시켜 주시고 지혜롭고 기특한 버들부인을 가상하게 여기시여 가마를 보내 한양으로 불러 올렸다.

그리고 후처의 첩지까지 내려 주셨다.

자료에 남는 후기 해설 이장곤은 학문과 무예를 겸비한 인물로 중종의 신임을 받았다.

1512년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이듬해에 이조참판이 되었다.

1514년 예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이후 대사헌 ·이조판서 ·좌찬성과 병조판서를 겸하는 등을 역임하여 정승반열에 올랐다

혁신세력인 조광조일파의 처형에 반대하는 등 소신있는 행동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아쉬운건 양씨 부인은 정경부인이 되고서도 사후에 이장곤과 나란히 무덤에는 묻히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배가 다른 본처소생의 자식들이 그렇게 처리했겠지요.

에이구! 쯧쯔~ 당시나 지금이나 계부 계모가 등장하면 가정문제가 복잡해지고 씁쓸한 비하인드 스토릴 남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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