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예술품

빈센트 반 고흐가 말하는 그림이야기

목눌인 2013. 4. 26. 10:31

 

 

빈센트 반 고흐가 말하는 그림이야기

 

 

 


Vincent van Gogh(1853.3.30~1890.7.29)

영혼의 화가, 태양의 화가, 천재 화가로 불리는 빈센트 반 고흐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의 Zundert에서 빈민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1890년 7월 파리 근처 Auvers-sur-Oise에서 사망한 후기 인상파 시대의 화가랍니다.

하지만 특이한 사실은 그가 태어나기 바로 1년전에, 태어난 형이 있었어요.

부모님은 얼마 되지 ㅇ낳아 사망한 그 형의 이름을 반 고흐에게 그대로 물려 주었죠.

장남을 잃은 어머니는 그 슬픔을 차남인, 지금의 고흐가 태어난 후에도 지우지 못하고 매일같이

죽은 큰 아들의 무덤을 찾아가곤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애정이 부족함을 느낀 고흐의

 맘 한구석에는 항상 슬픔과 울적함이 있었던 것이에요.

 

고흐는 다양한 직업을 거쳐서 뒤늦게 그림을 시작한 후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때까지 그림이

전부인 화가의 삶을 살았어요. <해바라기> , <감자 먹는 사람> , < 삼나무와 별이 있는 길>등

여러분이 잘 아는 작품들과 비롯하여 800여점의 많은 작품을 남겼답니다.

 

고흐는 렘브란트처럼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였고, 일반적으로 렘브란트 이후로 가장 뛰어난

네덜란드의 화가로 손꼽혀요. 인물화를 그리고 싶은데, 모델을 구할돈이 없어서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고 하죠.

살아있는 동안 그림을 단 한점도 팔지 못한 비운의 화가였고.., 그는 근대 예술에서 인상주의의

흐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어요. 그의 작품은 모두 오직 10년도안 만들어진 것이랍니다.

색의 개념을 파괴하고 거친 화풍과 결국은 그를 자살에 이르게 한 정신적

고통의 표현이 그려진 그런 작품이 전부랍니다.

 

 

 

 

고흐는 색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고 해요. 햇빛을 받으며 반짝이는 자연의 색을 그리기 위해

어두운 방을 벗어나 들판으로 달려나가고 했답니다.

 

그의 걸작중에 많은 자화상과 잘알려진 <The Starry Night(1889)>가 있어요.

2차 세계대전 말에 소련이 독일로부터 철수할때 그들은 많은 독일의 예술 작품을 함께 가지고 갔어요.

이 명작들은 레닌그라드의 Hermitage의 지하에 숨겨졌답니다. 이것은 거의 반세기 동안

소련의 비밀이었다고 해요. 그들은 현재 국립박물관에 전시해 놓고 있답니다.

 

 

 

 

헤이그 시절은 반 고흐의 삶에서 가장 밝은 시절이었다고 해요.

 

구필 화랑은 네덜란드 왕국의 후원을 얻을 정도로 번창했고, 그 화랑은 돈 많고 지위 높은 고급 손님을

끌기 위해 멋지게 장식되었다고 해요.  그로서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낸 부르주아 분위기였답니다.

1872년부터 아우인 테오가 화랑에서 함께 일하게 되자, 반 고흐는 몹시 행복해 했고, 그해 8월

학교를 다니다가 일시 귀향한 테오에게 보낸 짧은 편지를 쓴것이 그 후 그들 사이에서

평생을 두고 오간 편지의 시작이었답니다.

 

그후,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전근가게 된 반 고흐는 첫사랑의 고배를 들게 되는데, 외로운

미국 땅에서 감성이 풍부한 청년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만, 자신이 열심히

사랑하기만 하면 상대도 자연히 자신을 사랑할것이라는 비현실적인 착각에 빠진 것이 문제였답니다.

상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 약속을 한 상태였고, 크게 낙담한 반 고흐는 영국을 떠나고 말아요.

 

 

 

    네덜란드 시절의 반고흐     

 

이 시기 동안 그는 두텁고 어두운 황토색과 고동색을 사용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개인 날을 보기가

드물었고, 대낮에도 새벽녘같이 어둑어둑했던 드렌테의 자연에서 받은 느낌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당한 색깔이었을 거에요. <감자 먹는 사람들>은 이 시기를 배표하는 작품으로,

경건한 노동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작품이랍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농부들의 손을 보면 그들이 흘린 땀방울을 읽을 수 있지.
거친 손은 직접 일구어낸 감자를 식탁에 올리는 정당한 노동의 표시야."

 

춥고 어두운 흙속에서 수확을 여물어 내는 농부의 표정에서 고흐가 오랫동안 그리고 싶어하던

삶의 진실이 자연스럽게 묻어났을 것이랍니다.

 

 

 

 

그가 네덜란드에서 그린 또 하나의 중요한 작품으로 성서가 있는 정물화가에요.

왜 성서를 그렸는지, 그리고 에밀졸라의 책을 왜 같이 그렸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당시 고흐의

심리를 이해하는데에 가장 큰 도움이 될것이라고 생각이 된답니다.

 

이 그림이 목사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려진 것임을 고려해 본다면,

목사인 아버지에 대한 추도의 의미가 아니였을까요? 그리고 옆에 놓여진 에밀졸라의 삶의 기쁨이

놓여져 있는 것을 아버지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답니다.

이는 그의 기독교와의 단절과도 연결되는데, 어떤 이유로 기독교와의 단절을 결심했는지를 알 수 없지만,

이후 그의 정신적 고통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답니다.

 

 

  

 

       파리시절의 반 고 흐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반 고흐는 "프랑스의 공기는 나의 생각을 맑게 해주어 작업을 더 없이

훌륭하고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게 해준다."고 적었답니다.

 

하지만 1년 6개월이 지나자 그는 파리에 대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하면서 "인간적으로

혐오스러운 화가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남프랑스의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해요.

그에게 반감을 느끼면서도 그나마 너그럽게 함께 있어주고 인도해준 사람들은 세잔, 고갱, 쇠라,

정도를 꼽을 수 있답니다. 반 고흐는 갑자기 파리에 왔던 것처럼 어느날 갑자기

파리를 떠났고, 16시간 동안 기차여행을 하고 1888년 2월 20일 하얗게 눈이 내린

아를에 도착한답니다. 이제 그의 나이는 서른네살이었고 화가에 입문한지 6년째에 접어들었답니다.

 

 

 

 

   아를시절의 반 고흐  

 

"나는 결혼하고 싶은 생각도 자식을 갖고 싶은 생각도 안하게 되었다만, 그리고 그런 식으로는

전혀 생각도 안 했건만,그래도 서른 다섯 살이나 돼 가지고 이 꼴로 있는 것이 때로는 우울하다.

그래서 그림하고의 악연이 지겨워진다. 예술에 대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을 잃게 한다."

 

1888년 아를에 간 그는 여관과 식당을 겸한 레스토랑 카렐에 머물었어요.

진신ㄹ한 관계를 여성에게서 추구했다가, 좌절한 그는 육체적인 관계만을 맺었지만, 차차 라셸이라는

조용한 창녀와 친해지기 시작했고, 그녀와 함께 삶을 나누었다고 해요.

 

아를에서의 그림은 색채의 해방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새로운 것이었어요.

대담한 색으로 고양된 격렬함, 확고하고 분명하며 향상된 이미지가 분명하게 드러났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짙은 블랙 커피를 몇잔이나 마시고 몸으로 고통을 느끼면서, 그리는 가운데

황색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어요. 해가 뜨면 질때까지 온종일 죽도록 그림을 그리고

밤이 되면 머리가 아파올때까지 독한 압셍트를 마시면서 창녀를 찾거나,

집으로 돌아와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썼답니다.

 

 

 

  고갱과 함께한 반 고흐 

 

1888년 10월 23일, 고갱은 아를에 도착했어요. 두 사람은 테오가 보내주는 돈으로 살았고

절약을 위해서 고갱이 요리를 했고, 함께 그림을 그렸답니다.

 

반 고흐의 생활은 참으로 건전하고 질서가 잡히게 되어 건강도 회복했다고 해요.

하지만 서로 화를 내게되고, 1888년 12월 23일 일요일밤 11시 반에, 아를의 창녀 촌 1번 집의

라셸은 반 고흐에게 불려나가 그로부터 무엇을 잘 맡아달라는 말을 들었답니다.

피범벅의 붕대를 머리에 두른 반 고 흐는 그렇게 사라졌어요.

 

그녀가 신문지를 펼치자 잘린 귀가 나왔고 그녀는 바로 실신했답니다.

 

 

 

 

 

다음날 경찰이 반 고흐가 사는 노란집에 가보니, 그는 죽은듯이 침대에 누워 있었어요.

반 고흐는 곧 병원에 수용되었고, 2월 초 그는 상당히 회복되었지만 건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답니다.

시민들은 두려운 나머지 그를 병원에 수용시켜야 한다는 탄원서를 보냈고, 반 고흐는 독방에 수용되었어요.

1889년 5월 초, 아를 병원측은 빈센트를 생-레미 부근의 사립 요양원에 보냈답니다.

 

 

 

 

< Banks of the Seine with Pont de Clichy in the Spring > (봄날의 끌리쉬 다리와 세느 강둑)

Oil on canvas 50.0 x 60.0 cm.Paris: June, 1887Dallas: Dallas Museum of Art

 

 

 

  생 레미 오베르 시절의 반 고흐  

 

 

생 레미 시절은 참으로 평온한 시기였고, 미술사에서는 가장 "소용돌이 치는" 광기의 작품으로

해석되는 그림을 그린 시기이기도 했어요. 1889년 5월 8일, 반 고흐는 프랑스의 생레미에 있는 생폴

드 무솔 요양원으로 들어갔어요. 닥터 레와 수간호사인 플레가 그를 맞아 주었답니다.

테오의 요정으로 그를 위해 나란히 있는 방 두개가 마련되었는데,

 하나는 화실로, 하나는 고흐가 기거할 방이었답니다.

 

반 고후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환청과 환각 증세가

이어지고 그에 따른 공포가 엄습해 오는 발작증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어요.

하지만 그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때마다 엄청난 자책감에 시달린답니다.

9월에 <별이 빛나는 밤>과 <붓꽃> 두점이 파리 앵데팡당 살롱전에 전시되었고 좋은 평가를 받았답니다.

 

 

 

 

그쯤, 고흐의 작품은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테오의 집은 물론 탕기 영감의

미술용품 가게에도 전시가 되었답니다. 11월, 고흐는 제 8회 살롱 전시회에 그의 작품을

몇점 출품해 달라는 옥옥타브 마우스의 요청을 받기도 했어요.

 

하지만 12월 24일, 갑자기 심한 발작증세를 보이더니 1주일 동안 발작상태가 계속되었답니다.

그는 갑자기 물감 튜브를 빨아먹다가 발작이 진정되면, 평소처럼 그림을 그리곤 했어요.

1890년 1월 18일 브뤼셀의 20인전에 그의 유화 여섯 점이 전시되었고, 권위 있는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르의 지극히 호의적인 평론, " 고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르 메르퀴르 드프랑스>에 실리게 된답니다.

 

 

 


< Lilacs > (라일락) Oil on canvas

 


닥터 페이롱은 빈센트의 병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믿었지만, 2월 22일 아를을 방문했다가

 발작증세가 다시 일어나는 바람에 그러한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4월 말 편지를 다시 쓸 정도로 회복된 빈센트는 테오에게>

 

"제발 오리에에게 내 그림에 대해서 더 이상 쓰지 말라고 부탁해라. 나는 슬픔 때문에

너무나 상심해 그가 공개한 내용을 차마 볼 수가 없다. 그림을 그린다는 일이 나를 혼란시키고 있다.
그러나 내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보다 더욱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라고 편지를 쓴답니다.

 

1890년 1월, 그의 그림이 브뤼셀에서 전시되었어요. 빈센트의 작품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비평가들은 빈센트의 강렬한 색채를 야만적일 정도로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단 한 편이었지만

빈센트를 극도로 찬양하는 글이 사회주의 경향의 잡지에 실렸답니다.

 

 

 

 

알베르 오리에의 글로 생전에 그에 대해 쓰여진 유일한 글이기도 했어요.

1890년 5월 17일 빈센트는 혼자서 파리로 떠났고 그후 오베르로 간 빈센트는

그곳에서의 2달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해요. 이곳에서 그는 가셰를 만납니다.
빈 센트는 도착 이튿날부터 맹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의 최후의 비극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목격담에 의하면 그는 총상을 입고서 밤늦게 하숙집에 돌아와 2층 자기 방에 들어가 누웠다고 합니다.

 

 

 

 

"곧 의사들이 불려 와서 치료를 했으나 그들은 모두 외과전문의가 아니었다.
밤이되자 호흡 곤란이 격심해졌고 "이렇게 죽고 싶어"라고 말한 형은 30분 뒤에 죽었다.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반이었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혼자 남은 테오는

형의 저고리 주머니에서 접혀진 종이를 찾았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

 

그후 테오는 형이 죽은 지 6개월 뒤에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으나 33세 의 나이로 죽었답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들을 함께 감상해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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