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풍경

터키의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비잔티움, 비잔틴 투어

목눌인 2015. 1. 17. 20:39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비잔티움, 비잔틴 투어

 

눈을 감으면 늘 아련하게, 꿈처럼 떠오르던 한 도시가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그 거리에, 그 사람들 사이에 내가 한 때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아름다운 그 곳..

차가운 새벽을 가르는 기도 소리가 막 밝아오는 골목 사이로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 저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억지로 침대에서 일어나곤 했습니다. 비틀비틀 작은 방을 걸어가 굳게 닫힌 창문의 빗장을 느린 손으로 열어 젖혔을 때 기다렸다는 듯 나에게로 쏟아져 오는 아침 공기. 푸르스름한 아침 하늘 아래 거대하게만 보였던 이름 모를 사원의 흰 첨탑들과 햇살처럼 눈부시게 쏟아지던 황금빛 모자이크의 잔영. 밝은 미소를 지닌 마음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던 홍차 한 잔의 온기.

이 모든 순간들을 어떻게 쉽게 잊을 수 있을까요. 언젠가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마치 첫사랑을 겪는 소녀처럼 마음 아파하며 그리워하였습니다. 그 도시와 내가 다시 함께할 수 있기를 꿈꾸는 나날들이 고통스럽게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의 한 조각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기적처럼 저를 찾아왔고 저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비록 내가 태어난 곳은 스스로 정할 수 없었지만 앞으로의 행복을 찾으며 살아갈 곳만은 내 의지로 결정하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런 끝없는 그리움과 이별의 끝에 마침내 현실로 마주하게 된 이 곳, 이스탄불.

그로부터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 어느 곳에서든 시선을 돌리면 청명한 이스탄불의 하늘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옵니다. 이스탄불의 아침 공기를 빠르게 가르며 트램역으로 헐레벌떡 걸어가면 그 곳은 이미 출근길 인파로 북적입니다.

서울의 지하철 2호선 못지 않은 만차의 이스탄불 트램에 나의 몸을 꼭 맞게 싣고, 콩나물 시루처럼 촘촘한 사람들 사이로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며 간신히 손을 뻗어 보지만 어디에도 내가 잡을 만한 손잡이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애타는 심정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보니 마침 제 앞에 서 있는 장신의 터키 청년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는 덥수룩한 수염을 미세하게 씰룩거리며 무언가 제게 말을 할 듯 말 듯 하다가, 꽉 쥐고 있던 트램 손잡이에서 수줍고 느린 동작으로 손을 뗍니다. 대신 그것을 잡으라는 배려겠죠. 얼른 손잡이를 받아 쥔 후 작은 목소리로 테셰큘 에데림, 하고 감사의 인사를 건네 보지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을 스윽 돌려 창 밖만 바라봅니다.

아, 이제야 출입문이 닫히고 트램이 출발하는군요. 동시에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립니다. 알료? 에펜딤 메흐멧 암자, 센 나슬슨.. 처음에는 낲설고 어렵기만 하던 터키어가 이제 영어보다 친숙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저도 이스탄불 사람이 다 되었나 봅니다. 혼자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달리는 트램의 창 밖을 바라보면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과거 영광의 흔적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회색빛 돌길이 깔린 좁은 골목 사이로 문득문득 보이는 푸른 바다의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길에서, 오래된 집과 건물들 사이에서 갑자기 맞닥뜨리는 바다의 모습이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습니다. 발길 닿는 장소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이스탄불의 바다는 그 이름도 모습도 다양합니다. 마르마라, 골든 혼, 보스포러스.. 고대부터 지금까지 아름다운 바다와 함께 해온 이스탄불은 어릴 때부터 육지에서 자라온 저의 혼을 쏙 빼놓을 만한 멋진 풍광을 가진 곳이기도 하지요.

이스탄불 바다의 희미한 실루엣을 지나면 이번엔 오래된 건축물의 잔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트램 차창에 코를 박듯 얼굴을 바짝 들이밀어 바깥을 살펴보니, 분명 고대 유적의 기둥들로 보이는 것이 바닥 한켠에 무너져 있는데 그곳에 새겨진 문양이 꽤나 독특합니다. 눈물 흘리는 눈처럼 보이는 무늬가 기둥 전체에 가득 새겨져 있네요. 그런데 저게 도대체 뭐지? 테오도시우스의 포룸이라고? 그 이름은 분명..

기억을 더듬으며 테오도시우스가 누구더라, 하고 고민해 보지만 야속한 트램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네요. 또 출발합니다. 얼마나 달려갔을까, 이번엔 양 팔을 벌려 한아름 안아도 못 다 안을듯한 굵기의 낡은 자주빛 기둥이 시장 한 켠에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저건 또 무엇이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세운 기둥? 그리고 그 다음에 보이는 저 부러진 돌은… 로마 제국 시절에 사용된 이정표, 그 뒷편의 건물은 고대 지하 저수조의 입구라고?

어림잡아도 천 년은 가뿐하게 뛰어넘는 역사의 파편들입니다. 흔히 십 년이 지나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저 돌들이 이 자리에 있기까지 세상은 도대체 몇 번이나 바뀌어 왔을까요. 감탄하며 바라보니 어느새 트램은 술탄아흐멧 역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내릴 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터키를 살아가는 이스탄불 사람들은 그야말로 '쿨'합니다. 저 예쁜 소녀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터앉아 있는 주춧돌은 적어도 팔 구백 년쯤 전에 건물을 지탱하던 것이고, 저 청년이 커피 컵을 살짝 올려놓은 계단처럼 보이는 돌은 고대 정교회의 사제가 낭랑한 목소리로 복음을 전하려 사용하던 봉독대입니다. 이리도 귀하고 오랜 역사의 흔적들이 전혀 놀랍지 않다는 듯, 당연히 이 자리에 있어 왔다는 듯 익숙하게 행동하는 그들의 모습이 참 재미있어 한참을 바라보게 됩니다. 아마 그들에게는 당연하겠지요. 우리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버텨온 이스탄불인 탓에 오 백년 된 건물의 조각이, 천 년된 유적의 기둥이 발길에 채일 정도로 거리 곳곳에 산재해 있으니까요. 모든 것이 너무나도 익숙한 탓에 많은 사람들은 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먼 옛날, 이 도시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곤 했었다는 것을요.

콘스탄티노플. 지금은 너무나도 낯선 이름이지만, 고대 지중해 세계 사람들은 이 도시를 환상처럼 가슴에 품고 살아갔습니다. 4세기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서방의 끝자락까지 달려와 야심차게 계획해낸 새로운 수도가 바로 이 곳, 콘스탄티노플입니다. 황제는 마치 로마처럼 일곱 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이 땅에 친숙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언덕들 아래로 보이는 크고 깊은 바다는 적군의 침입을 막아주는 동시에 유용한 무역로가 되어 주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이 주는 특유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에 홀리듯 이끌려 이 땅에 많은 보금자리를 만들기 시작했고,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함께하는 로마는 이후 약 천 년의 역사를 이어갑니다.

이러한 옛 영광의 흔적 하나가 이스탄불의 심장부에 남아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이름과 모습을 조금씩 달리하였지만 여전히 드높은 명성을 잃지 않고 있는 제국의 기억, 아야 소피아.

중학생 시절 역사 교과서에서 보았던 사진 속 아야 소피아는 참으로 낯설었습니다. 그 이름도, 그 모습도요. 옛 동방 정교회의 대성당이라고는 하는데, 이제까지 제가 보아 왔던 교회와 성당들의 하늘을 찌를 듯 뾰족뾰족하고 높은 외관과는 다르게 둥글고 큰 지붕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 마치 생일 케이크처럼 보이기도 하고 포근한 엄마의 품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역사에 큰 관심이 없던 한 없이 어린 시절 한 번 읽고 던져버린 교과서 안에서 이상하게 기억에 선명히 남던 이름 아야 소피아. 그로부터 십 수년이 지난 지금의 저는 이스탄불에서 아야 소피아를 매일 만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 동방 정교회의 영적 상징이었던 아야 소피아는 15세기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된 이후 약 오백 여년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후 등장한 터키 공화국의 시대에는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다시 한 번 이름을 달리하여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실내에 들어와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모두에게 개방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거대한 아야 소피아의 모습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완성되었으니, 이 건물은 대략 천 오백년의 세월을 한 자리에서 버텨온 셈입니다. 당시 제국에는 아야 소피아의 반만한 규모의 건물조차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는 기적에 가까운 건물이자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건축이었습니다. 아야 소피아가 준공된 직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처음으로 건물 내부에 들어섰을 때, 성당의 위용과 아름다움에 감탄한 황제는 감동에 벅찬 얼굴로 '위대한 솔로몬 왕이여, 내가 드디어 당신을 이겼습니다!' 라고 외쳤다는 전설이 전해올 정도니까요. 지혜의 왕 솔로몬은 예루살렘 대성전을 만든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아야 소피아의 뜻 자체가 '신성한 지혜'이기도 하니 황제가 그의 이름을 콕 집어 되뇌였을만 하지요.

그러면 다시 한 번 현재로 시간을 되돌려 볼까요. 제국의 황제들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는 신성한 문을 지나 소피아 내부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거대한 실내 전경과 함께 사람들의 머리 위 까마득히 높게 위치한 둥근 돔이 보입니다. 하늘과 우주를 상징하는 거대한 돔에 부착된 수많은 창문들은 부서지는 햇살을 천장으로부터 신비롭게 투과시킵니다. 돔으로부터 떨어져 내린 빛은 아직도 옛 문양과 색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벽과 바닥의 대리석 장식을 환하게 밝히고, 마침내 제국의 역사와 믿음을 그대로 담고 있는 황금빛 모자이크를 찬란하게 비춥니다.

옛 사람들은 이토록 찬란한 황금 모자이크로부터 무엇을 보았을까요. 어떤 이는 신성하고 평온한 예수와 성인들의 모습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가슴 깊이 느꼈을 것이고, 또 다른 이는 인간의 손으로 빚어낸 예술의 무한한 아름다움에 감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소피아 내부에 뒤덮인 황금으로부터 제국의 부유함을 엿보았을지도 모르지요. 돔 높은 곳에 자리한 온화한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마주하고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한 따뜻했던 옛 추억을 더듬으며 눈물을 보였던 이들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천 년동안 이토록 많은 이들의 깊은 믿음과 감탄으로 가득했던 이 공간이 함락되던 1453년의 그 때에도 콘스탄티노플의 마지막 시민들은 이곳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수 천 개의 손이 간절함을 담아 함께 포개지던 그 날, 사람들은 눈물로 기도하며 밤을 지새웠지만 아야 소피아와 콘스탄티노플은 결국 오스만 제국의 것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하지만 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 했었던가요. 이대로 맥없이 스러지는 듯 보이던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활해 오늘날까지 그 모습을 이어 옵니다.

이제 발길을 돌려 아야 소피아 바깥으로 향해 볼까요. 작은 신호등을 건너 바닥에 깔린 돌길을 따라 걷다 보면 눈 깜짝할 새에 당도하게 되는 '예레바탄 사르느즈'. 낯설고 어려운 이름이지만 이를 한국어로 해석해 보면 매우 단순합니다. 지하 물 저장고! 예레바탄 사르느즈로 향하는 출입구는 생각보다 너무 작은 탓에 초행자들은 이를 쉽사리 찾지 못하고 고생하기도 하지요. '이처럼 작고 좁은 문 안에 무엇이 있을까' 하고 반신반의하며 들어서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이처럼 놀라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지금은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군데군데 조명을 설치해 두었지만 천 년 전의 이곳에서는 한 줄기 희미한 빛조차 찾아볼 수 없었을 겁니다. 칠흑처럼 어두운 지하 공간을 튼튼히 버티도록 하기 위해서 고대의 이름 모를 신전들에서 가져온 기둥을 내부에 촘촘히 세웠고, 그 사이로는 도시의 밤을 닮은 차가운 물을 콘스탄티노플의 외곽으로부터 흘려 보내 비상시를 대비한 물을 비밀스레 비축해 두곤 했습니다. 수면에 비친 수많은 기둥들이 지하에 가라앉은 궁전의 환상처럼 보이는 덕에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곳을 예레바탄 사라이, 즉 지하 물 궁전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예레바탄 사르느즈를 거닐다 보면 내 자신이 콘스탄티노플의 고대 유적을 조사하는 탐험가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옛 사람들은 이 신비한 수면 아래에는 무엇이 잠들어 있을지 끊임없이 궁금해하며 두려워했겠지요. 옛 황제가 도망치듯 몰래 숨겨둔 금화가 지금도 이 공간 어딘가에 비밀스럽게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닐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상상하며 가장 깊은 안쪽으로 발걸음을 향하여 봅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규모의 이스탄불의 지하세계에 깜짝 놀랐겠지만, 그 뿐만이 아닙니다. 아야 소피아와 예레바탄 사르느즈의 근처에는 터키인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작은 광장 하나가 존재하는데 이 곳은 과거 황제와 시민들의 대전차 경주장으로 쓰이던 공간이었습니다. '히포드럼'이라 불리곤 했지요. 물론 현재의 히포드럼은 과거의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탓에 이 곳을 전차 경주장으로 한 번에 상상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곳입니다.

하지만 눈을 살짝 감고 광장이 전해주는 옛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과거의 군중들이 내지르던 열띤 함성 소리와 전차에 매인 말을 부리나케 채찍질하던 기수들의 땀방울이 분명 느껴집니다. 거리마다, 그리고 건물마다 얽혀 있는 전설을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가슴 뛰기 시작하는 장소들이 가득한 도시가 바로 이 곳입니다.

하지만 옛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현재 이스탄불의 진정한 매력을 느끼고 싶다면 반드시 바다로 향해야 합니다. 이 도시는 바다에서 보았을 때 가장 아름다우며, 그 진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바다를 가로질러 유럽과 아시아를 한 품에 끌어안고 있는 이스탄불. 그 지리적 특성 덕에 이 곳 사람들은 조그만 페리를 타고 보스포러스 해협을 매우 자유롭게 왕래하곤 합니다. 에미노뉴에서 출발해 카드쿄이로 향하는 페리에 탑승한 후 야외 테라스에 앉으면 유럽을 거쳐 아시아까지 닿는 그림 같은 이스탄불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집니다. 15분간 펼쳐지는 황홀한 마법처럼 말이지요…

그렇게 도착한 이스탄불의 아시아 한 켠, 카드쿄이. 현재 이 곳은 젊은 터키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거리이자 세련된 주거지역이지만 아주 먼 옛날에는 '칼케돈'이라 불리었던 유서깊은 지역입니다. 사실 이스탄불은 콘스탄티노플 외에도 감추어진 옛 이름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데, 그와 깊은 연관이 있는 지역이 이 곳 칼케돈이지요.

기원전 7세기경 그리스의 '비자스'라는 이는 델포이 신전에서 수수께끼 같은 신탁을 받았습니다. 바로 <눈 먼 자들이 모여 사는 곳 반대편에 새로운 도시를 세워라> 라는 내용이었지요. 그는 신탁을 따라 눈 먼 자들의 땅을 찾아 헤매던 중 이 곳까지 흘러오게 되었고, 당시의 칼케돈 사람들에게 장님들의 마을에 대하여 물어 보았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지친 그가 칼케돈을 떠날 준비를 하며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 보았을 때 푸른 파도 너머 보이는 아름다운 땅이 있었습니다. 한 눈에 보아도 사람들이 살기 좋아 보이는 높은 언덕 위의 땅이었지요.

그 멋진 곳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고작 칼케돈에 모여 사는 이들이야말로 안목이 없는, 눈 먼 자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칼케돈이 바로 '눈 먼 자들의 도시' 라고 판단한 그는 바다 건너 반대편 땅에 자신의 이름을 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합니다. '비잔티움'… 그것이 이스탄불이 가졌던 최초의 이름이며, 서로마가 멸망한 후 살아남은 동로마를 후대 역사가들이 따로 떼어내어 일컫곤 했던 명칭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모두 떠나고, 세상이 새롭게 변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생명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고를 반복했을까요. 그 긴 시간과 아픔을 뛰어넘어 마침내 찾아온 21세기…

이제는 전설로만 남아있는 제국의 기억을 끊임없이 뒤쫓는 내 자신이 지금 이 장소에 존재합니다. 운명을 따라 찾아온 이 도시에서 저는 오래된 역사의 흔적들과 매일 마주하곤 합니다. 거리 한 켠에 놓여진 옛 기둥에서 황제의 기개를 느끼고, 때로는 아야 소피아의 황금 모자이크에서 고대 수도사들의 신심 가득한 눈물을 봅니다.

갈라타 탑에 한 줄기 바람이 불 때면 먼 옛날 탑 위에서 직접 만든 날개를 달고 뛰어내려 아시아 땅까지 날아갔다는 이의 용기와 설레임이 희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만약 당신이 지금 이 도시에 있다면 이들로부터 무엇을 보았을까요? 당신에게도 이 도시의 옛 이름이 꿈처럼 떠올랐다 사라지곤 할까요…

▼ 비잔틴투어 미리보기

글 : 유로자전거나라 신영아
사진 : 유로자전거나라 신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