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 그리고 비잔티움, 비잔틴 투어
차가운 새벽을 가르는 기도 소리가 막 밝아오는 골목 사이로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 저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억지로 침대에서 일어나곤 했습니다. 비틀비틀 작은 방을 걸어가 굳게 닫힌 창문의 빗장을 느린 손으로 열어 젖혔을 때 기다렸다는 듯 나에게로 쏟아져 오는 아침 공기. 푸르스름한 아침 하늘 아래 거대하게만 보였던 이름 모를 사원의 흰 첨탑들과 햇살처럼 눈부시게 쏟아지던 황금빛 모자이크의 잔영. 밝은 미소를 지닌 마음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던 홍차 한 잔의 온기.
이 모든 순간들을 어떻게 쉽게 잊을 수 있을까요. 언젠가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마치 첫사랑을 겪는 소녀처럼 마음 아파하며 그리워하였습니다. 그 도시와 내가 다시 함께할 수 있기를 꿈꾸는 나날들이 고통스럽게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의 한 조각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기적처럼 저를 찾아왔고 저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비록 내가 태어난 곳은 스스로 정할 수 없었지만 앞으로의 행복을 찾으며 살아갈 곳만은 내 의지로 결정하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런 끝없는 그리움과 이별의 끝에 마침내 현실로 마주하게 된 이 곳, 이스탄불.
서울의 지하철 2호선 못지 않은 만차의 이스탄불 트램에 나의 몸을 꼭 맞게 싣고, 콩나물 시루처럼 촘촘한 사람들 사이로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며 간신히 손을 뻗어 보지만 어디에도 내가 잡을 만한 손잡이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애타는 심정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보니 마침 제 앞에 서 있는 장신의 터키 청년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는 덥수룩한 수염을 미세하게 씰룩거리며 무언가 제게 말을 할 듯 말 듯 하다가, 꽉 쥐고 있던 트램 손잡이에서 수줍고 느린 동작으로 손을 뗍니다. 대신 그것을 잡으라는 배려겠죠. 얼른 손잡이를 받아 쥔 후 작은 목소리로 테셰큘 에데림, 하고 감사의 인사를 건네 보지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을 스윽 돌려 창 밖만 바라봅니다.
아, 이제야 출입문이 닫히고 트램이 출발하는군요. 동시에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립니다. 알료? 에펜딤 메흐멧 암자, 센 나슬슨.. 처음에는 낲설고 어렵기만 하던 터키어가 이제 영어보다 친숙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저도 이스탄불 사람이 다 되었나 봅니다. 혼자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달리는 트램의 창 밖을 바라보면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과거 영광의 흔적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기억을 더듬으며 테오도시우스가 누구더라, 하고 고민해 보지만 야속한 트램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네요. 또 출발합니다. 얼마나 달려갔을까, 이번엔 양 팔을 벌려 한아름 안아도 못 다 안을듯한 굵기의 낡은 자주빛 기둥이 시장 한 켠에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저건 또 무엇이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세운 기둥? 그리고 그 다음에 보이는 저 부러진 돌은… 로마 제국 시절에 사용된 이정표, 그 뒷편의 건물은 고대 지하 저수조의 입구라고?
어림잡아도 천 년은 가뿐하게 뛰어넘는 역사의 파편들입니다. 흔히 십 년이 지나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저 돌들이 이 자리에 있기까지 세상은 도대체 몇 번이나 바뀌어 왔을까요. 감탄하며 바라보니 어느새 트램은 술탄아흐멧 역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내릴 때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지금은 너무나도 낯선 이름이지만, 고대 지중해 세계 사람들은 이 도시를 환상처럼 가슴에 품고 살아갔습니다. 4세기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서방의 끝자락까지 달려와 야심차게 계획해낸 새로운 수도가 바로 이 곳, 콘스탄티노플입니다. 황제는 마치 로마처럼 일곱 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이 땅에 친숙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언덕들 아래로 보이는 크고 깊은 바다는 적군의 침입을 막아주는 동시에 유용한 무역로가 되어 주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이 주는 특유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에 홀리듯 이끌려 이 땅에 많은 보금자리를 만들기 시작했고,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함께하는 로마는 이후 약 천 년의 역사를 이어갑니다.
과거 동방 정교회의 영적 상징이었던 아야 소피아는 15세기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된 이후 약 오백 여년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후 등장한 터키 공화국의 시대에는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다시 한 번 이름을 달리하여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실내에 들어와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모두에게 개방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거대한 아야 소피아의 모습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완성되었으니, 이 건물은 대략 천 오백년의 세월을 한 자리에서 버텨온 셈입니다. 당시 제국에는 아야 소피아의 반만한 규모의 건물조차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는 기적에 가까운 건물이자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건축이었습니다. 아야 소피아가 준공된 직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처음으로 건물 내부에 들어섰을 때, 성당의 위용과 아름다움에 감탄한 황제는 감동에 벅찬 얼굴로 '위대한 솔로몬 왕이여, 내가 드디어 당신을 이겼습니다!' 라고 외쳤다는 전설이 전해올 정도니까요. 지혜의 왕 솔로몬은 예루살렘 대성전을 만든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아야 소피아의 뜻 자체가 '신성한 지혜'이기도 하니 황제가 그의 이름을 콕 집어 되뇌였을만 하지요.
천 년동안 이토록 많은 이들의 깊은 믿음과 감탄으로 가득했던 이 공간이 함락되던 1453년의 그 때에도 콘스탄티노플의 마지막 시민들은 이곳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수 천 개의 손이 간절함을 담아 함께 포개지던 그 날, 사람들은 눈물로 기도하며 밤을 지새웠지만 아야 소피아와 콘스탄티노플은 결국 오스만 제국의 것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하지만 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고 했었던가요. 이대로 맥없이 스러지는 듯 보이던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활해 오늘날까지 그 모습을 이어 옵니다.
예레바탄 사르느즈를 거닐다 보면 내 자신이 콘스탄티노플의 고대 유적을 조사하는 탐험가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옛 사람들은 이 신비한 수면 아래에는 무엇이 잠들어 있을지 끊임없이 궁금해하며 두려워했겠지요. 옛 황제가 도망치듯 몰래 숨겨둔 금화가 지금도 이 공간 어딘가에 비밀스럽게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닐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상상하며 가장 깊은 안쪽으로 발걸음을 향하여 봅니다.
하지만 눈을 살짝 감고 광장이 전해주는 옛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과거의 군중들이 내지르던 열띤 함성 소리와 전차에 매인 말을 부리나케 채찍질하던 기수들의 땀방울이 분명 느껴집니다. 거리마다, 그리고 건물마다 얽혀 있는 전설을 듣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가슴 뛰기 시작하는 장소들이 가득한 도시가 바로 이 곳입니다.
기원전 7세기경 그리스의 '비자스'라는 이는 델포이 신전에서 수수께끼 같은 신탁을 받았습니다. 바로 <눈 먼 자들이 모여 사는 곳 반대편에 새로운 도시를 세워라> 라는 내용이었지요. 그는 신탁을 따라 눈 먼 자들의 땅을 찾아 헤매던 중 이 곳까지 흘러오게 되었고, 당시의 칼케돈 사람들에게 장님들의 마을에 대하여 물어 보았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지친 그가 칼케돈을 떠날 준비를 하며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 보았을 때 푸른 파도 너머 보이는 아름다운 땅이 있었습니다. 한 눈에 보아도 사람들이 살기 좋아 보이는 높은 언덕 위의 땅이었지요.
이제는 전설로만 남아있는 제국의 기억을 끊임없이 뒤쫓는 내 자신이 지금 이 장소에 존재합니다. 운명을 따라 찾아온 이 도시에서 저는 오래된 역사의 흔적들과 매일 마주하곤 합니다. 거리 한 켠에 놓여진 옛 기둥에서 황제의 기개를 느끼고, 때로는 아야 소피아의 황금 모자이크에서 고대 수도사들의 신심 가득한 눈물을 봅니다.
갈라타 탑에 한 줄기 바람이 불 때면 먼 옛날 탑 위에서 직접 만든 날개를 달고 뛰어내려 아시아 땅까지 날아갔다는 이의 용기와 설레임이 희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만약 당신이 지금 이 도시에 있다면 이들로부터 무엇을 보았을까요? 당신에게도 이 도시의 옛 이름이 꿈처럼 떠올랐다 사라지곤 할까요…
▼ 비잔틴투어 미리보기
사진 : 유로자전거나라 신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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