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목눌인 2015. 9. 22. 10:14

세종도 감탄한 천재소년 김시습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했기에 그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을까? 사람들은 그를 방랑한 천재시인으로 꼽기도 하고, 절의를 지킨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하며, 선비 출신이면서 승려가 되어 기행을 벌인 기인이라고, 또 최초로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은 작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농민의 고통을 대변한 저항의 시인으로, 철저하게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창한 성리학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어느 것 하나 틀린 것은 없을 것이요 또 그는 이런 모든 모습을 고스란히 갖추었다.

김시습 초상화

김시습은 냉철하게 현실을 보고 비뚤어진 세상을 등졌다. 그는 조선 전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현실 모순에 철저히 저항한 시인이었고 사상가였다.

최초로 그의 전기를 쓴 명신 이이와 또 김시습의 시문집을 수집하고 또 다른 전기를 쓴 윤춘년 등은 그를 흠모해 공자에 비길 정도로 극찬했다. 이처럼 그는 비록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죽은 지 1백 년도 못 되어 이런 흠모와 찬탄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를 단순한 시인이나 충절로만 평가해서는 그의 깊은 삶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한다.

이제부터 그의 삶의 궤적을 찾아 참모습을 살펴보자.

1455년(단종 3) 여름, 스물한 살의 김시습은 삼각산 중흥사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그는 한 가지 일에 빠지면 거기에만 몰두하는 성격이었으니 시원한 산속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서울 나들이를 하고 온 사람이 말했다.

“수양대군이 금상(今上)이 되었다 하오. 금상은 상왕으로 모셨고······.”

김시습은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고 책을 덮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사흘 동안 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난 어린 시절도 돌아보고 오늘의 현실도 따져보았을 것이다. 사흘째 되던 날 저녁, 그는 갑자기 통곡을 해댔다. 그리고 읽던 책을 모두 불살랐다. 그러고는 미친 척하며 칙간(뒷간)에 빠져 들어가 있다가 중흥사를 빠져나왔다(윤춘년의 전기).

이후부터 그는 통곡하거나 거름통에 빠지는 일을 곧잘 되풀이한다. 이런 모습의 김시습은 당시 어떤 청년이었고 어떤 출생배경을 지니고 있었을까?

그는 서울의 성균관이 있는 북쪽 마을 반궁리(泮宮里)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성균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공자의 꿈을 꾸었다고 한다(그에 대해 말할 때 이런 과장된 이야기가 많이 보인다. 김시습 역시 자신에 대해 과장되거나 잘못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강릉 김씨인 김일성(金日省)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 집안은 신라 알지왕의 후예였고, 고려 때에 그의 선조들은 시중(侍中)과 같은 높은 벼슬을 했으며, 그의 증조부 윤주(允柱)는 안주목사, 아버지 일성은 조상 덕분에 음직의 낮은 벼슬을 받았다. 이렇게 그의 집안은 뼈대는 약간 있지만 별로 행세는 하지 못했다. 세도도 그다지 없고 재산도 넉넉하지 않았다.

그는 태어난 지 8개월부터 배우지 않고도 글을 알았다고 한다. 마침 이웃에 먼 할아버지뻘 되는 최치운이라는 학자가 살았다. 최치운은 그의 재주를 보고 그의 외할아버지에게 ‘시습’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시습’의 뜻은 바로 《논어》의 첫머리에 나오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따온 것으로, 재주만 믿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을 계속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최치운은 이조참판을 지낸 명신(名臣)으로 세종의 총애를 받은 청렴한 벼슬아치였다.

그는 다섯 살에 이웃에 사는 수찬 이계전의 문하에서 《중용》과 《대학》을 배웠다. 보통 10대에 배우는 사서 중 두 가지를 다섯 살에 배운 셈이다. 이계전은 고려의 학자 이색의 손자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의 아버지이다. 소문을 들은 정승 허조가 그의 집으로 찾아와 그를 시험했다.

허조 : 내가 늙었으니 늙을 노 자를 넣어 시를 지어보거라.
김시습 :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
老木開花心不老

이렇게 해서 그는 신동으로 소문났고 마침내 대궐에까지 불려가게 되었다. 세종은 신동 시습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알아보라고 지신사(知申事, 도승지의 별칭)인 박이창에게 명했다. 박이창은 대궐에서 어린 시습을 무릎에 앉히고 말했다.

박이창 : 동자의 공부는 백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것 같도다.
김시습 : 성주(聖主)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 가운데를 뒤집는 형국이로다.

박이창은 벽에 걸린 산수도를 가리키며 시를 지어보라고 말했다. 김시습은 이에 또 화답했다.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어떤 사람이 있을지.
小亭舟宅何人在

이 말을 들은 세종은 이런 전지를 내렸다.

“내가 불러 보고자 하나 남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렵다. 너무 드러내지 말고 잘 가르치도록 하라. 나이가 들고 학업이 성취되면 내가 크게 쓰겠노라.”

그리고 비단 50필을 내려주면서 혼자 힘으로 가져가라 했다. 그러자 김시습은 모든 벼슬아치들이 보는 앞에서 비단의 끝을 죄다 묶어서 끌고 나갔다. 이를 계기로 어린 그를 ‘오세’라고 불렀다. 이 ‘오세’라는 별칭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이름이 되었고, 설악산에 있는 ‘오세암’이란 사찰명도 그로 인해 생겼다는 소문이 돌았다.

세상에 대한 저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균관 언저리에 살아서인지 여러 명사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의 나이 열세 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외가로 옮겨가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열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었다는 기존의 설은 오류이다).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잃은 시습을 애지중지 키워, 뒷날 김시습은 “아들처럼 길러주었다”(《해동잡록》)고 감회에 젖어 적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가 죽자, 병골인 그의 아버지는 양양의 농장으로 가족을 거느리고 내려가서 다시는 그를 서울로 보내지 않았다. 어린 시습은 3년 동안 관례대로 어머니의 묘소에서 복상했는데, 이 기간을 채 마치기도 전에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불행은 계속되었다. 이제 아버지마저 병석에 누워버려 더 이상 가사를 돌볼 수가 없게 되었다. 가세가 기울 수밖에 없었다. 이어 계모가 들어왔고, 그 자신도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스무 살에 장가를 들었다.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이 무렵 서울로 올라와 다시 글공부를 하고 친구들과 사귀었다. 이때의 심사를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어릴 적부터 영달은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친척과 이웃이 지나치게 칭찬을 하여 부끄러웠다. 이미 심사가 어긋나서 고꾸라지고 엎어질 무렵, 세종과 문종이 연이어 승하하셨다.
- 〈상유양양진정서(上柳襄陽陳情書)〉

여기에서 왜 심사가 어긋났다고 했을까? 그것은 가정적인 불행보다도 시세를 한탄한 것이다.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고 또 누구보다도 애민의식에 철저했고 불우한 사람들의 벗이었다.

당시 조선왕조가 건국하고 난 뒤, 토지제도 개혁으로 지주와 사찰의 토지가 몰수되어 공전으로 편입되었다. 그리하여 농민들이 토지를 경작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공신이나 벼슬아치들에게 다시 토지를 나누어주고 보니, 새로운 지주가 생겨나고 따라서 조세 · 지대 따위로 농민들은 점차 토지를 잃고 조세에 허덕이며 비참한 생활로 돌아가고 있었다.

또 공신들과 그 자제들은 많은 토지와 큰 저택을 가지고 있으면서 권세를 잡고 위세를 부리고 있었다. 그들은 과거제도를 문란하게 하며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덕택으로 벼슬을 받았다. 이런 속에서 수양대군은 정인지, 한명회, 정창손 같은 무리들과 음모를 꾸미고 자신이 영의정으로 앉아 권력을 흔들면서, 세종이 기르고 아끼던 학자와 문사들을 압제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그는 영달을 누릴 수 있는 벼슬을 포기했고 그로 인해 심사가 틀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가 삼각산에서 글을 읽었던 것도 과거공부를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마침내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그의 인생에는 새로운 계기가 만들어졌다. 비탄에 젖은 그는 현실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끝내 방랑의 길을 떠났다. 결코 세종에 대한 은의와 충성 그리고 단종에 대한 충절만으로 삼각산을 나와 방랑의 길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그 뒤의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런 이야기가 충분히 납득될 것이다.

승려 ‘설잠’이 되어 사육신의 시체를 거두다

그는 삼각산에서 나와 어디로 발길을 돌렸을까? 어떤 행색이었을까? 그는 서울을 떠나오자마자 세상 돌아가는 꼴을 여기저기서 얻어들었을 것이다. 그는 조상치, 박도 같은 몇 사람과 뜻이 맞았다. 조상치는 집현전 부제학으로, 박도는 깨끗한 선비로 처신하고 있던 터였다. 두 사람은 김시습의 선배였다. 이들과 함께 강원도 금화로 발길을 돌렸는데, 이때 박도의 동생인 박제와 두 사람의 아들과 조카인 규손, 효손, 천손, 인손, 계손 등이 따라왔다. 모두 아홉 명으로 김시습보다 나이가 많았다.

이들은 금화현에서 남쪽 10리 지점인 사곡촌 산골짜기에 초막을 짓고 머물렀다. 이곳에서 담소도 나누고 때로 한탄도 하고 바람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방외인(方外人)으로 자처했다. 나무 잎사귀에 시를 쓰며 통곡하다가 물에 띄우기도 했다.

방외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한마디로 세상을 등지고 사는 사람이다. 사림(士林)은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마음에 맞지 않으면 향리로 돌아가 독서에 열중했다. 그러다가 시세가 흡족하다고 생각되면 다시 슬슬 조정에 나와 절개와 지조를 은근히 자랑했다. 하지만 방외인은 이들과 전혀 달랐다. 방외인은 시속의 통념에 맞추지 않고 몸가짐을 흐트러뜨리며 아무렇게나 살았다.

그들은 산속에서 갓끈을 씻다가 싫증이 나면 바위에 올라가 바위에 시를 새기기도 했다. 박효손이 김시습의 화상을 바위에 새겼고, 또 김시습이 손수 새긴 시구도 있다고 한다.(《매월당집》 부록 : 구운사 상량문)

그들은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서울에서는 수양대군이 임금이 된 이듬해, 상왕 복위의 음모를 꾸몄다고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고해바쳐, 정창손이 주동이 되어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을 재빨리 잡아들여 참형시켰다.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인 뒤에 이어진 2차 대량살육이었다. 이런 상황이 닥치자 이들 아홉 은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각기 새로운 행로를 모색했다. 나날이 다가오는 위험도 느꼈다.

사육신 등의 시체는 길가에 버려져 있었다. 그들의 가족은 모두 잡혀가 있었으니 누가 시체를 거두지도 못할 절박한 현실이었다. 이때 한 승려가 나타나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노량진 길가 남쪽 언덕에 묻었다고 한다. 이 승려가 바로 김시습이라고 한다.(《연려실기술》)

이때 김시습은 승려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승려치고는 형상이 괴이했다. 머리는 깎았지만 수염은 기르고 있었다. 이에 대해 그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

머리를 깎은 것은 세상을 피하기 위해서요,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의 기상을 나타낸 것이다.
- 《계곡만필(溪谷漫筆)》

김시습은 작은 키에 얼굴은 오종종하고 못생겼다(자신이 그린 자화상이 있다). 게다가 머리에는 승려의 모자가 아닌 시커먼 벙거지를 쓰고 다녔다. 형색도 기인의 차림이었다. 승명을 ‘설잠(雪岑)’이라 했는데 깨끗함을 나타내는 ‘눈 설’ 자를 쓴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의 방랑과 기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백성이 무슨 죄인가

그는 맨 먼저 평안도 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때 동행자가 있었는데 아마 앞의 박씨 중의 두어 사람이 함께 길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개성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이어 청천강을 거쳐 압록강 언저리에서 백두산을 바라보기도 했다. 이때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김수온을 만나기도 했다. 이 만남에서 그들은 학문을 토론했고, 김수온은 김시습이 승려가 된 것에 대해 타일렀다. 김수온의 형 역시 고승이 된 신미(信眉)였다. 그 뒤 김수온은 남달리 김시습을 돌봐주었다.

그는 스물네 살 되던 가을에 이 지방의 여행을 마치고 역사의 흥망, 곧 고조선, 고구려, 고려의 성쇠를 시로 남겼다.(《매월당집》 〈유관서록〉) 이어 발길을 강원도로 돌려 임진강 상류를 건너 금강산에 이르렀다. 그는 금강산 만폭동의 절벽에 이런 석각을 해두었다.

산수를 좋아하는 것은 사람의 평상의 감정이지만 나는 산에 오르면 웃고 물에 다다르면 통곡한다.
- 최남선 〈금강예찬〉

최남선은 이를 보고 〈금강예찬〉에 이렇게 썼다.

이 새긴 글씨를 보고 그를 조상하는 동시에 도로 그 눈물로써 저를 조상하게 됩니다. 아름다움의 덤불이요 기쁨의 더덕인 금강산에서 오직 한 군데 눈물로 대할 곳이 여기입니다.

금강산에 이어 오대산과 강릉을 보고 돌아온 김시습은 이 여행에서 자연의 장관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창해의 좁쌀 한 알’에 비유했다. 이 두곳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각각 두 권의 시집 《관서록(關西錄)》 《관동록(關東錄)》을 꾸미고 그 내력을 썼다. 이것이 자신의 시를 손수 모아 엮은 최초의 시집이다. 그는 시를 쓰면 모두 불태우거나 내버리거나 물에 띄워버렸는데 이들 시는 기행시라 시세와 관계없어서 엮어둔 것일까?

그는 발길을 남쪽으로 돌렸다. 청주를 거쳐 전주, 금산사, 나주, 영광, 무등산, 송광사, 지리산 그리고 함양을 거쳐 해인사를 두루 돌아보았다. 여기서 그는 매화와 대나무와 남국의 정취를 보았고, 풍부한 물산에도 감탄했다. 다시 그는 경상도로 발길을 돌려 경주를 두루 구경했다. 이제 그는 나라 안의 사정을 두루 돌아보았고 따라서 세상물정도 알 만했다. 또한 말로만 듣거나 관념으로만 알고 있었던 농민의 참상을 목도했다. 이 무렵 그는 이런 시를 남겼다.

10년 동안 떠돌이되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보니
이내 몸은 도시 밭둑가의 쑥대로구나
세상 살아가는 길은 모두 험하고 위태로우니
아무 말 없이 꽃떨기나 냄새 맡고
지내는 것이 좋으리로다.

신세는 고단했다. 술을 통음하며 울어보았자 마음에 얼마만큼 위안을 얻겠는가? 그가 데리고 다니는 상좌는 아주 맑은 목소리로 구슬픈 소리를 곧잘 했다. 그는 달 밝은 밤에는 이 상좌를 시켜서 〈이소경〉을 읽게 했다. 그 소리를 들으며 그는 울음으로 옷깃을 적셨다. 이래본들 무슨 소용이랴. 그는 이때쯤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은 소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심적 갈등을 겪으며 정착을 결심했다. 그러던 중 1463년(세조 9) 책을 사러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임금 세조는 불사(佛事)를 크게 벌이고 있었다. 자기 손에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이성계 역시 수많은 살육을 거쳐 새 나라를 건설했다. 그 또한 불사를 벌였는데 그중 하나가 《묘법연화경(妙法蓮花經)》 간행이다. 그 뒤 세종은 소현왕후가 죽자, 효령대군의 도움을 받아 내불당을 세웠고, 이어 수양대군의 도움을 받아 《석보상절(釋譜詳節)》을 국문으로 지어 반포했다.

세조는 다시 효령대군의 도움으로 《묘법연화경》 번역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많은 승려들이 이 일을 맡을 사람으로 김시습을 추천했다. 효령대군이 김시습에게 이 일을 간청하자 그는 신미, 학조(學祖) 등 이름난 승려와 함께 내불당에 들어갔다.

김시습은 일단 임금의 공덕을 칭송했다. 그답지 않게 이제 굴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듯했다. 세조는 그를 융숭하게 대우했다. 때는 가을이었다. 세조는 햇과일이 들어오면 관례대로 궁중과 종친에게 나누어주었는데 내불당에 있는 김시습에게도 포도, 배 따위를 번번이 보내주었다. 이에 김시습은 이렇게 썼다.

“물건은 비록 작은 것이지만 성의는 크다.”(《매월당집》 부록)

그가 내불당에 열흘쯤 머물고 있었는데 이때 또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임금이 내전에서 승려들을 불러들여 법회를 열었는데 설잠도 여기에 끼여 있었다. 그런데 설잠이 이른 새벽에 도망을 가버리자 사람을 시켜 행방을 찾으니 거리의 거름 구덩이에 빠져 얼굴만 내놓고 있었다고 한다.(《용천담적기》)

그는 열흘 남짓 내불당에 있다가 다시 금오산으로 돌아왔다. 왜 그는 일단 내불당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을까? 당시에는 영의정 정창손 등 이른바 공신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또 많은 권신들은 서울 주변에 많은 농장과 노비를 거느리고 대지주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가 결코 조정 일에 무관심한 게 아니었다. 어떤 벼슬아치가 다시 자리를 받으면 늘 한탄했다고 한다.

“이 따위 인물이 이런 자리를 차지하다니, 백성이 무슨 죄인가?”

당시 그의 동료들도 높은 관직을 차지하며 출세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깨끗한 선비들이 숨어 살고 있는 판에 자신이 초라한 모습으로 조정을 기웃거릴 수는 없었을 것 아닌가?

농민의 참상 앞에 시로 통곡하다

그는 경주를 돌아보고 복거지(卜居地, 살 만한 곳을 가려 찾는 일)를 했다. 경주의 남산 곧 금오산에 폐허가 된 빈 절 하나가 있었는데 이것이 용장사(茸長寺)였다. 용장사는 금오산의 남쪽 동구에 터를 잡고 있었다. 절이 폐허가 된 데다 골짜기도 깊어서 사람의 발자취가 거의 닿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 토굴을 짓고 매화를 심었다. 이 토굴은 ‘금오산실’ 또는 ‘매월당’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그의 호가 매월당이 된 것이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이 되었을 때다. 남향의 금오산실에는 봄볕이 따스하게 들고 매화도 꽃망울을 잘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3월 그믐날, 서울에서 종자가 말 한 필을 끌고 내려와 말했다.

“효령대군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성상께서 옛 흥복사를 새로이 세우고 이름을 원각사(圓覺寺)라고 지었습니다. 스님들을 모시고 낙성회를 갖는데 여기에 참석하시게 하라는 분부를 받고 왔습니다.”(《매월당속집》)

이 낙성회에 효령대군이 그를 설법사로 천거했던 것이고, 세조가 이를 승낙해 그를 불러 올리라 한 것이다. 이에 효령대군은 “어기지 말고 올라오라”는 당부를 단단히 했던 것이다. 그는 대답했다.

“이런 좋은 모임이 늘 있지 않을 것이요, 훌륭한 세상을 만나기 어렵다.”

그는 그날로 말을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 그는 “남은 나이를 마치겠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가 이때 무슨 기대를 걸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보신을 위해 얕은 꾀를 쓴 것인지, 세조에게 빌붙는 몸짓을 보인 점이 오늘날 사람들로서는 헤아리기 어렵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서 세조의 성덕을 칭송하는 시를 지었고, 또 낙성회 첫날 임금이 대사령(大赦令)을 내리자 또 이를 찬탄하는 시를 지었다. 이어 효령대군이 그에게 〈원각사 찬시〉를 지어 세조에게 올리라고 부탁했다. 이에 찬시를 지어 올리자, 세조는 이를 보고 효령대군에게 분부했다.

“이 찬시는 매우 아름답소. 내가 궁으로 돌아가 인견(引見)할 터이니 이 절에 거처하도록 하시오.”

그러나 그는 뒷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그때 무심히 성명(聖明, 임금을 가리킨다)을 우연한 기회에 만나기는 했으나 오직 천석(泉石)에 노닐기로 뜻을 삼았기에 서울에 있은 지 며칠이 못 되어 끝내 길을 떠났다.
- 《매월당속집(梅月堂續集)》

하지만 이 찬시는 지금 전하지 않는다.

그는 경주로 내려가는 길에 임금이 보낸 사자를 중간에서 만나 다시 올라오라는 분부를 받았지만 병을 핑계대고 끝내 다시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때 그는 또 “법사(法事)가 이미 끝났으므로 홀연히 돌아왔다”라고 쓰기도 했다. 이런 행적이 정신적 방황 때문일까, 아니면 10년의 세월로 인해 감정이 무뎌진 탓일까? 아니면 높은 벼슬을 얻지 못한 처지에서 다시 방외인으로 돌아온 것일까?

김시습은 방랑생활을 하면서 절간에서 기식하기도 하고, 관가에 밥을 청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을의 여염에서 잠자리와 밥을 얻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추위와 굶주림에 떨었다. 이 때문인지 금오산실에 있을 때 실제로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서도 그는 술에 취해 차가운 달빛 아래에서 매화를 바라보기도 하고, 대나무에 부는 바람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시를 토해냈다.

그가 시 짓는 버릇은 괴상했다. 서 있는 나무에 시를 새겨놓고는 한동안 읊고 난 뒤 한바탕 통곡을 하며 깎아버렸다. 그런가 하면 종이에 시를 써서 한참 바라보다가 물에 던져버렸다. 금오산실에서부터 이런 버릇이 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틈틈이 바닷가를 거닐기도 하고 또 교외나 시전에 나가 구경하기도 했다. 그는 체질적으로 방 안에나 산속에만 처박혀 시나 짓고 책이나 읽는 꽁생원은 아니었다.

그러면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그는 일하지 않고 먹는 사람을 싫어했다. 지주를 싫어하듯, 유식배를 미워했다. 때문에 그는 약한 몸으로 손수 밭을 일구고 씨를 뿌렸다(그 후에도 여러 번 농사를 지었다). 그는 누구보다 애민의식이 강렬한 사람이었다. 이 애민의식을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의 노동이었다. 자신이 노동을 하여 먹고 살려는 의지가 평생을 통해 나타난 것을 보면 그는 결코 유식배나 기생(寄生)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산가(山家)의 고통을 이렇게 읊고 있다.

물 건너 등성이 너머 10리쯤에
비탈진 쪽 눈에 띄는 작은 띠집
소 부리는 소리 공중에 울리니
화전민이 늦갈이하는 줄을 알겠도다
해 지면 호랑이 무서워 사립문 닫아 걸고
동이 트면 움직여 고사리나물 삶는도다
깊숙한 산골에 더 깊은 곳일지라도
부역이나 조세를 안 내고야 못 배기지

화전민의 사정을 읊은 것이다. 밭에 싹이 나면 산짐승이 먹어대고, 남은 곡식 거두어들이면 새나 쥐가 훔쳐 먹는다. 그러고 나서 관가에 세금 바치면 남는 것이 없고 사채 때문에 소와 말을 빼앗긴다고 한탄했다. 이어 이렇게 읊었다.

원님이 어질고 자애로워도 허덕이는 살림일 텐데
이리 같은 벼슬아치 만났으니 백성은 정말 가엾구나
며느리 짐 이고 시아비 손자 끌어 길에 가득하니
어찌 주리고 얼어 죽는 것이 풍년 아니기 때문이랴

수탈에 못 이겨 유랑하는 농민의 참상을 그린 이 시에서 김시습은 농민의 고통을 여러 모로 따져 고발하고 있다.(《매월당집》 〈고산가고〉) 부정한 관리만 고발한 것이 아니라, 토지를 겸병하고 사채로 땅을 빼앗는 대지주 그리고 사치와 음탕으로 지새우는 위정자를 질타한 것이다. 또 그가 겪었음직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읊기도 했다.

자갈밭에 바윗돌이 울퉁불퉁
온통 가시덤불 등넝쿨 얽혀 있네
땅은 토박한데 잡목만 자라고
밭둔덕 경사져 곡식 자라지 못하는구나
굶주린 까마귀 나무 끝에서 울어대고
여윈
송아지 둔덕에 누워 있네
이같이 깊은 산골인데도
해마다 세금이야 면할 수 있으랴

이것은 금오산 일대 화전민의 참상뿐만 아니라 오대산과 지리산에서 그가 본 화전민의 실상이었고, 그 자신도 겪은 고통이었다. 이런 농민 수탈에 대한 시들을 그 시대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남겼다.

그는 어떤 때는 나무로 농부의 모양을 새겨서 책상 위에 두고 하루종일 바라보다가 통곡하고 불태우기도 했고, 어떤 때는 자기가 심은 벼가 자라 이삭이 탐스러운데도 술에 취해 낫을 휘둘러 한 이랑을 다 베어놓고 목놓아 울기도 했다 한다.(《장릉지》) 이런 행동이 광인의 짓일까? 그는 자신의 애민의식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해, 실제로 그가 형상화한 농민시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금오산실에서 많은 시를 남겼고 또 다른 저작에도 몰두했다.

사랑을 이야기한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

금오산실의 김시습은 몸은 병들었지만 동가식 서가숙(東家食西家宿)할 때보다 고달프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저술에 몰두할 수가 있었다. 이즈음 그는 소설을 썼다.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다.

첫째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이다. 남원 땅 늙은 총각 양생(梁生)은 부처님과 처녀를 얻는 내기놀이를 해서 이겼다. 한편 한 처녀가 부처님께 배필을 점지해달라고 기도했고, 이때 양생이 구애해 허락을 받았다. 두 남녀는 며칠 함께 지내며 사랑을 나누었지만 그 여자는 원통하게 죽은 영혼이었다. 얼마 후 그녀는 인연이 다하였다며 다시 사라졌다. 그러자 양생은 여자의 부모를 만나 재물을 얻고 또 죽은 혼을 위로해주었다.

둘째는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이다. 개성 땅에 사는 이생은 글도 잘하고 외모도 잘생긴 총각이었고, 또 선죽교 옆에 사는 양반 최씨 집 딸은 아름다움과 손맵시로 소문이 났다. 어느 날 이생이 연모의 시를 써서 던지자, 최씨 처녀는 황혼녘에 만나자고 언약을 했고 그리하여 그날 밤 그들은 가연을 맺었다. 이 일이 발각되어 이생은 울주 땅으로 쫓겨가고 최씨 딸은 병이 들었다. 이렇게 되자 그들은 결국 혼인을 하게 되었고 행복하게 살았다. 난리 때 이생의 아내가 죽자 이생이 홀로 고향에 돌아왔는데, 아내의 혼이 그에게 찾아와 그들은 다시 몇 년 살다가 이별했다. 그후 얼마 안 있어 이생도 죽었다.

셋째는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이다. 개성 부호인 아들 홍생이 부벽루에 올라 시를 읊조리자, 난데없이 시녀를 거느린 여자가 나타났다. 그 여자는 예전 기자(箕子)의 딸로 천계에 있다가 부왕의 묘를 돌아보고 가는 길에 홍생이 읊는 시를 듣고 반하여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사랑의 시를 주고받다가 헤어졌다. 홍생이 그 뒤 병이 들어 누웠는데, 꿈에 한 미인이 나타나서 “우리 아가씨께서 당신을 견우성 아랫자리에 벼슬을 주었으니 속히 가자”고 했다. 이에 이생이 목욕을 하고 자리에 눕자 곧 숨을 거두었다.

끝으로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와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이다. 이 소설은 경주 선비 박생이 꿈에 염라대왕과 세상일이나 치도(治道) · 이단 등을 문답한 내용이요, 〈용궁부연록〉은 개성의 한생이 꿈에 용왕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은 뒤 꿈에서 깨어났는데 용왕이 준 선물이 실제로 있어 이것을 가지고 명산에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는 내용이다.

김시습은 이것들을 묶어 《금오신화》라고 이름 지은 뒤 석실(石室)에 간직하고 뒷날 이 소설을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앞의 세 작품은 자유연애를 구가한 것이요, 뒤의 두 작품은 자신의 정치관을 보여주고 자신을 이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또 사랑하는 아내마저 본의 아니게 버렸다. 세상을 떠돌면서 이름은 떨쳤지만 남녀의 오붓한 사랑을 나누지 못했던 것이다.

《금오신화》

이 목판본 《금오신화》는 1653년(효종 4) 일본에서 초간되었던 것을 1884년(고종 21) 일본 도쿄에서 재간한 것이며, 상 · 하 2책으로 되어 있다.

《금오신화》는 남녀의 사랑에 대한 유교의 철저한 속박을 빗대어 소설에서 자유연애를 구가한 것으로, 사랑을 주제로 한 최초의 소설이기도 하다. 이들 작품이 중국의 《전등신화》를 모방했다고 하나, 소설 속에 그의 자유분방한 인생관과 불교 · 도교 등 폭넓은 사상이 짙게 깔려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가 6~7년을 금오산실에서 보낼 때 세조도 죽고 그 뒤를 이은 예종도 죽었고, 이제 새 임금 성종이 문치를 표방하며 널리 인재를 구하고 있었다. 김시습이 다시 서울로 올라올 무렵 정창손, 한명회, 노사신 등 이른바 공신들은 막강한 권세를 누리고 있었고, 선배인 신숙주, 김수온, 서거정 등은 고관의 대열에 있었다.

반면 그와 가까이 지내던 남효온, 홍유손, 이정은, 이우, 박제 등은 영락하여 서울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의 지기들은 그에게 서울로 올라오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새로운 기운을 맞고 있으니 벼슬살이를 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의 주선 때문인지, 그는 서울 변두리 성동에 폭천정사를 지어 거처할 곳을 마련했고 궁방전(宮房田, 왕자나 공주에게 딸린 토지) 몇 뙈기도 소작하게 되었다. 그는 일단 폭천정사에 거처하면서 서울생활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동쪽으로 흐르는 시냇가를 거닐기도 하고 가까운 남산에 올라가 약초도 캐었다.(《매월당집》 〈화정절귀원전시〉) 도연명의 생활을 완연히 본받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서울과 너무 가깝지 않은가? 도연명이 고향으로 돌아가 버드나무를 심으며 산 뜻과는 사정이 사뭇 다르다.

그가 정든 금오산을 버리고 행장을 말끔히 챙겨 폭천정사로 옮긴 때는 서른아홉 살 되던 봄이었다. 성종이 한창 문치를 펴고 있을 적이었으니 태평성대라 말하는 시대였다. 그를 늘 아끼던 김수온, 서거정이 그에게 벼슬을 권고했다. 당시 김수온은 판서의 자리에, 서거정은 대제학으로 있었다.(〈상유양양진정서〉)

그가 서울에 올 때 거처로 삼은 곳은 남소문동의 수천부정(秀川副正, 왕손들을 관리하는 종친부에 딸린 벼슬) 이정은의 집이었다. 이곳은 폭천정사와 가까운 곳이니 늘 들렀음직하다. 이 집의 주인이 선비를 좋아하고 또 시 읊기를 즐겼기에 많은 방외인들로 사랑방을 가득 채웠다. 먹고 살 만도 했으니 술이나 음식 대접도 소홀하지 않았다.

어느 날, 김시습이 이 집에 들러보니 사랑방은 손님들로 만원이었다. 그는 방 안에 들어서면서 조우(祖雨)라는 승려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김시습은 큰 소리로 떠들었다.

“조우는 노사신에게 글을 배운 중놈이오. 이 자리에 낄 수가 없소. 만일 여기에 오기만 하면 내가 죽여버리겠소.”

이 소리를 들은 조우는 분을 이기지 못하여 김시습 앞에 불쑥 튀어나와 외쳤다.

“생원이 감히 드러내놓고 큰 재상 욕을 퍼부어도 되는가? 만약 나를 죽이고 싶으면 마음대로 죽여보시오.”

이에 김시습은 조우의 목을 틀어쥐고 때리려는 시늉을 했다. 옆 사람들이 모두 떼어말려 조우는 겨우 몸을 빼서 도망쳤다.(《월정만필》)

노사신은 권신으로 당시 재상의 자리에 있었다. 이런 노사신에게 조우가 《장자》를 배우러 간 사실을 알고 김시습은 이런 행패를 부린 것이다. 글을 배우기보다 필시 아첨하려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조우는 조계산 송광사의 주지였는데 김시습과는 오랜 인연이 있었고 김시습은 그에게 신세도 지고 있었다. 김시습은 비록 폭천정사에 은거한다고 말했지만 남산에서 약이나 캘 위인이 아니었다. 서울 주변에 살면서 세상일에 초연할 기질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권신들을 거침없이 조롱하다

정승 정창손이 벽제소리를 울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술이 거나하게 취한 김시습이 이를 보고 그 앞에 나서며 소리쳤다.

“너 이놈, 그만 해먹어라.”

정창손은 그 위인이 김시습인 줄 알고 못 들은 체하며 지나갔다. 이 이야기를 들은 김시습의 벗들은 그와 사귀면 위태롭다고 여겨 하나 둘 발길을 끊었다.(《사우언행록》)

권신 한명회는 한강가에 화려한 압구정을 짓고, 서강가에 별장을 두고 이를 감탄하는 현판들을 걸어놓았다. 보통 사람들은 감히 함부로 여기에 오르지 못했다. 어느 날 김시습이 서강에 갔다가 한명회 별장의 현판을 보았다. 현판에는 이런 시가 씌어 있었다.

청춘에는 사직을 붙들고
靑春扶社稷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
白首臥江湖

김시습은 재빨리 이렇게 고쳐놓았다.

청춘에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靑春危社稷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네
白首汚江湖

곧 부(扶)자를 위(危)자로, 와(臥)자를 오(汚)자로 고쳐놓으니 영락없이 맞아떨어졌다. 사람들이 이를 보고 그럴듯하다고 수군거리자, 한명회는 현판을 아예 없애버렸다.(《매월당집》 부록)

신숙주는 김시습이 서울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숙소 주인과 짜고 술을 실컷 먹이게 했다. 김시습이 술에 곯아떨어지자 신숙주는 그를 가마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김시습은 얼마 뒤 술에서 깨어나 자신이 신숙주 집에 누워 있는 것을 알았다. 그가 일어나 가려 하자 신숙주는 손을 잡고 “어째서 말 한마디도 없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옷자락을 뿌리치고 가버렸다.(《연려실기술》. 이들 일화는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다) 이런 김시습이었으니 벼슬을 주자고 한들 제대로 받을 수 있겠는가? 한명회나 정창손이 방해했을 법하지 않은가?

그러나 서거정은 그를 유달리 아꼈다. 서거정은 그가 서울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주 찾아가서 선비로 예우했다. 그런데 김시습은 서거정과 이야기를 나눌 적에는 벌떡 드러누워서 두 발을 벽에다 대고 흔들어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짓거리가 종일 가기도 했다. 그러자 이를 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김시습이 예의도 차릴 줄 모르는데, 서 상공께서 지나치게 허물없이 대해준 탓에 버릇없이 굴어대니 후회하여 다음번에는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서거정은 며칠 뒤에 또다시 찾아와 담소를 나누었다.

서거정은 나이로도 김시습보다 15년 이상이었고, 또 젊을 때부터 대제학을 지낸 이름난 문사였다. 서거정은 권신은 아니었지만 대농장을 가지고 관계에도 탄탄하게 진출하고 있었다. 서거정은 오랫동안 대제학을 지낸 뒤 만기가 되어 후임자를 추천하게 되었다. 임금은 사림 출신 김종직을 늘 마음속에 두고 있었는데, 서거정은 후임자로 홍귀달을 추천했다. 다음 대제학으로 모두 김종직을 꼽고 있었는데 서거정은 자기보다 나은 김종직을 시기하여 평범한 문사 출신인 홍귀달을 대제학에 앉게 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김시습은 이렇게 풍자했다.

“천하에 가소로운 일은 홍귀달이 문장에 능통하다는 것이네.”

이 말은 널리 퍼졌다.

김수온은 또 남달리 그를 돌봐준 벼슬아치였다. 김수온이 ‘맹자가 양 혜왕을 만나본 일’에 대해 생원들에게 시험을 보게 했다. 한 생원이 이 글제를 삼각산에 있던 김시습에게 보여주니, 김시습이 답을 휘갈겨 써서 주면서 말했다.

“이 글은 자네가 썼다고 하게.”

이를 받아본 김수온은 채 읽기도 전에 물었다.

“열경(悅卿, 김시습의 자)이 지금 어느 산 어느 절에 있는가?”

그러자 그 생원이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바로 “양 혜왕은 거짓 왕이기 때문에 맹자가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맹자의 이 구절을 놓고 맹자의 인의(仁義)를 천명한 것이라고들 배우고 있는 현실이었다. 김시습의 이 견해는 근본적으로 맹자의 잘못된, 다시 말해서 명정(名正)하지 못함을 나무란 것으로 탁견이었던 셈이다.

뒷날 김수온이 죽으며 좌화(坐化, 선승들은 곧잘 죽을 적에 앉아 죽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김시습은 뇌까렸다.

“괴애(乖崖, 김수온의 호)가 욕심이 많은데 어찌 좌화할 수 있느냐? 좌화는 어림없는 소리네.”

김수온은 높은 벼슬을 했고 또 그의 형인 신미는 고승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렇기에 김시습은 노사신이 신미에게 《장자》를 가르친 것이나 김수온이 좌화했다는 것이나 모두 욕심꾸러기요 권세에 찌든 인물들에게는 걸맞지 않은 모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이이 《본전》)

이렇게 고관일지라도 거침없이 비판하는 그를 신숙주나 서거정, 김수온은 국사(國士)로 대우해 돌봐주었다. 이는 김시습의 재주와 본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기인에서 평범한 지아비가 되었으나

그에게는 이름 없는 제자들도 따랐으나 친구 또는 후배들 중에서 그를 남달리 따르는 부류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이정은을 비롯 남효온, 홍유손, 김일손 등이었다. 적어도 김시습은 금오산에서 서울로 온 뒤 이들과 늘 어울려 다녔다. 수천부정 이정은은 태종의 손자이니, 세조와는 6촌간이 되며 뒷날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의 할아버지이다. 이정은은 종친부의 직책인 수천부정을 지내면서 청렴결백하게 살았고 김시습을 늘 도와주었으며 조정의 일에는 초연하게 지내면서 일사(逸士)들과 어울렸다. 그래서 그의 사랑채에는 많은 선비와 식객이 들끓었다.

남효온은 김종직의 제자로 젊을 때 소릉(昭陵)의 복위를 상소했다. 곧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능을 세조가 물가로 옮겨놓았는데 이를 바로잡으라고 한 것이다. 이 상소가 올려진 뒤, 정창손, 임사홍 등 권신들이 가로막아버리자 벼슬을 단념하고 방랑을 일삼으며 살았다. 남효온이 김시습과 언제 만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김시습이 서울로 왔을 적부터 교우가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남효온은 김시습을 스승처럼 섬겼는데 어느 날 김시습에게 물었다.

남효온 : 제 소견이 어떻습니까?
김시습 : 구멍난 창으로 하늘을 보지.
남효온 : 선생님 소견은 어떻습니까?
김시습 : 넓은 뜰에서 하늘을 보지.

남효온은 이런 대답에 심복했다.

홍유손은 김종직의 제자였으나 나이는 김시습보다 네 살 위였다. 그는 아전 출신이었으나 뛰어난 문사로 인정받아 아전 신분을 면제받았다. 수양대군이 왕이 된 뒤, 그는 죽림칠현을 자처해 호를 광진자(狂眞子)라 하고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냈다. 홍유손도 자연스레 이정은, 김시습과 어울리게 되었다.(《성호사설》 인사문)

또 한 사람은 김일손이다. 김일손은 다 알다시피 사초에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어 세조의 찬탈을 풍자했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사림파의 벼슬아치였다.

그런데 김시습이 성동 폭천정사에서 나와 다시 삼각산 중흥사에 머무를 때 김일손이 남효온의 손에 이끌려 술병을 차고 찾아왔다. 이들은 주위 사람들을 물리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모두 함께 백운대에서 시작하여 도봉산에 이르기까지 닷새 동안 산놀이를 벌이고 헤어졌다.(《매월당집》 부록)

이들은 시세를 논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김시습이 사관인 김일손에게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리라고 권고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의의 왕인 세조에 대한 비판이 역사에 올려져야 하므로 이를 수록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로 따지면 김일손 등 사림파가 떼죽음을 당한 무오사화의 꼬투리는 김시습이 만든 셈이다.

이후 그들과 절친하게 사귄 남효온은 생육신으로 있다가 갑자사화 때 언행과 상소 등이 빌미가 되어 비참하게 죽었고, 홍유손은 무오사화 때 종이 되었다가 풀려났다. 만일 김시습이 연산군 때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이들처럼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그는 은사, 지사, 현관 등 세 부류의 사람들과 때로는 어울리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에게 경원을 당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정창손, 한명회가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들이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은 온 나라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방외인을 함부로 죽였다가는 쏟아지는 비난을 감당하지 못할 것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도 이제 40대 후반이 되었다. 온갖 것을 다 겪고 보았으니 불혹의 나이에 걸맞게 인생관이 결실을 맺었을 법도 하지 않은가? 그의 친구들과 후배들은 그에게 아내도 얻고 자식도 낳고 조상들에게 제사도 지내고, 그렇게 평범한 가정과 사회로 돌아오라고 권고했다. 또 일부에서는 낮은 벼슬이라도 얻어 생계를 꾸리고 행동거지도 선비의 기품을 지니라고 권고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지쳤는지, 아니면 어떤 커다란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그도 아니면 친지들의 권유를 뿌리칠 수가 없었는지 아무튼 안씨 성을 가진 아내를 맞이했다. 그는 지난날 스물한 살 나이에 꾸린 가정을 불과 1년도 채 못 채우고 매정하게 버렸다. 그의 첫 아내인 남씨에 대한 소식은 그 뒤 전혀 알 길이 없다. 죽었는지 아니면 재가를 했는지 기록에 일절 나타나지 않는다. 어쨌든 적어도 그녀 입장에서 보면 김시습에게 배신당한 꼴이었다.

이제 새 아내를 맞이했으니 부모의 제사를 받들고 아들을 두어 대를 이을 결심이 섰을 것이다. 그는 머리를 길러 승려의 행색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부모와 조상에게 이런 제문을 지어 올렸다.

제왕이 다섯 가지 가르침을 베풀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조목을 제일 첫머리에 두었고 또 3천 가지 죄를 늘어놓으면서 불효를 가장 큰 죄라고 했습니다. 무릇 천지 사이에 살면서 누군들 길러주신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소자는 자손의 도리를 이을 듯도 했으나 이단에 빠졌다가 말로에 바야흐로 회개하옵니다. 이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인의 가르침을 찾아보아 조상을 추모하는 큰 의식을 강정(講定)하고 청빈으로 살아가는 계책을 참작해서 간소하게 정성 어린 제사를 올리나이다. ······만일에 속죄를 하려면 몸을 하늘가에 던져야 되겠습니다.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조상을 뵈오리까?
- 《사우언행록》

그는 이제 머리를 기르고 아내도 얻었으며, 제사도 지내고 고기도 먹으며 사는 일상 선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의관을 정제하고 나들이를 나가면 제법 위엄 있는 행동도 했다. 그리고 제문의 내용대로, 지난날 부모와 조상의 제사를 저버린 행동을 깊이 뉘우치고 유가의 예법대로 제사를 받들기로 결심했다.

멈추지 않는 기행,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느냐?

그런데도 그의 기행은 멈추지 않았다. 1년도 채 안 되어 그의 아내가 죽은 탓이었다. 아내로서는 나이든 남편을 받들기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원래의 성격이 제멋대로인 데다 30여 년의 방랑생활에 젖어 절제와 절도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지난날을 회개하고 새로 꾸민 가정에 마음을 붙이려는 몸부림이 있었다.

그는 방랑 속에서도 손수 농사를 짓고 제자들에게도 이를 가르친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때에도 분명히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록 그가 농사를 지었다 해도 제대로 재산관리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무렵 그는 종들과 가옥, 전답을 모두 음흉한 사람에게 빼앗겼다. 성동의 폭천정사에 있을 때 궁방전을 갈아붙여 밥을 먹었는데 이때에는 궁방전을 비롯, 집안에서 물려받은 토지와 또 누군가 마련해준 종도 있었다. 이것을 어떤 구실로 빼앗긴 것이다. 그는 재산을 빼앗긴 줄 알고도 아무렇지 않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을 찾아가서 재산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 사람이 거절하자 김시습은 한성부에 고소했고, 두 사람은 대질을 하게 되었다. 보통 양반들은 이런 송사가 있으면 종을 대신 보내고 자신은 뒷전에서 하회를 기다리고 있어야 양반의 품위를 지킨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들을 대질하는 과정은 두 사람이 서로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는 것이 마치 시장판 같았다. 김시습은 그야말로 입에 거품을 물고 자기 재산을 입증하며 장사꾼처럼 굴었던 것이다. 본래 그의 재산을 빼앗긴 것이니 승소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는 송사에 이기고 문서들을 도로 받아 관아 문 밖에 나와서는 하늘을 보고 크게 웃었다.

“아하하,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나?”

그러더니 문서들을 갈갈이 찢어 개천물에 내던져버렸다. 그러고는 옷깃을 펄럭이며 돌아왔다.(《해동명신록》) 그는 왜 애써 찾은 재산문서를 찢어 내버렸을까? 그는 이 무렵 이런 시를 남겼다.

지난해 일찍 가뭄이 들고 늦장마도 휩쓸어
물가에 수렁이 한 자 깊이나 패고
모래가 메워져 채전을 졸지에 흙탕물로 뒤엎고
쑥쑥 자라는 것은 잡초뿐이로다
아녀자는 배가 고파 길가에 울부짖으며 나앉고
길가에서 이를 보니 탄식뿐이노라
사채와 조세를 밤낮으로 독촉하는데
나도 백정(일반 평민)의 노역을 하기 어려워라
내 한 몸에 부과된 정역(丁役, 장정의 부역)이 삼처럼 얽혀
이리저리 빼앗는 부세 너무나 가혹하구나
올해 거둔 토란과 밤으로도 지탱하기 모자라
봄밭에 씀바귀 캐는 손길 밭둑에 꽉 찼도다
올해 갈고 심은 모가 이삭 팰 무렵
으스스 흙비 내리고 흐린 날 한 달 내내 이어져
보리이삭 싹이 터 누룩이 되고 벼뿌리 누렇게 썩고
철 어려우니 백성의 살 길 막막하도다
8월도 늦게 벼꽃이 한창 필 무렵에
동북풍이 불어닥쳐 쭉정이 여물지 않도다
도토리에 좀벌레, 채전에 황충, 오이덩굴 말라죽어
기근이 해마다 드니 살아갈 길 없네
내 기름진 땅 수십 이랑까지
지난해에 세도가에게 강탈당해버렸고
또 건장한 일손 있어 밭갈이 부리려 해도
지난해 지은 보(保, 군에 가는 대신 경비를 무는 장정)되어
군액(軍額)을 채워야 하네
어린아이 옆에서 시끄럽게 울어대고
서로 나에게 매달리는데도 못 들은 체
구중궁궐 깊고도 깊은 곳에
날개 달고 날아가 대궐문 두드리고 고소하고 싶네
- 《매월당집》 〈기농부어〉

이런 현실은 그 자신을 빗댄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천재와 인재가 겹쳐 농민이나 백성은 살 길이 막막했다. 그러니 자신의 빼앗긴 재산을 찾은들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으랴. 이런 현실을 고발하는 그의 시는 애절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자신이 뼈빠지게 일해보아야 아내 입에 풀칠도 못해주게 되는 것이다(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이때 아이가 태어났는데 아내와 함께 곧 죽었다고도 한다).

그는 이 무렵, 또 서울 거리를 종횡으로 휩쓸고 다녔다. 더욱 술에 취하고 몸가짐을 흐트러트렸으며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그는 거리를 지나다가 무슨 색다른 것을 보면 한없이 응시하곤 했다. 이렇게 바보처럼 거리구경을 하다가도 소변이 마려우면 사람이 있든 큰 거리이든 가리지 않고 냅다 골마리를 열고 오줌을 갈겨댔다. 옷은 너덜거리고 패랭이는 찌그러진 채 새끼띠를 두르고 거리를 종횡하고 있으니 아이들 눈에 영락없는 거지였다. 그런 그의 뒤를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녔다. 그리고 “늙은 거지야”라고 놀려대며 깨진 기와 조각이나 돌멩이, 막대기를 던졌다. 그는 이런 아이들을 꽁무니에 달고 다니며 때로는 호령도 하고 때로는 웃기도 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아무 곳에서나 잠을 잤다. 거리의 무뢰배들과 어울려 떠들썩하게 담소하기도 하고 함께 술을 마시며 농지거리를 했다.

남효온은 이렇게 적었다.

그가 마흔여덟 살 이후 세상이 더욱 쇠해가는 것을 보고 인간의 일을 하지 않아 점점 더 여염에서 버림받게 되었다.
- 《사우언행록》

‘큰 쥐’ ‘작은 쥐’를 피해 수락정사로 들어갔으나

‘세상이 더욱 쇠해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겠는가? 가정의 안락도 찾을 수 없음은 물론이고, 권신들이 점점 더 많은 요직을 차지하고 앉아 대토지를 넓혀가고 있는데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참상을 빚고 있는 현실을 두고 말함이 아니겠는가? 이럴 때 그는 정창손이나 한명회를 조롱했고, 때로는 예전에 거처했던 삼각산 중흥사에 들어가 미친 듯 시를 지어 내버리기도 했다. 남효온이나 홍유손 등 그의 지우들이나 제자들은 그를 서울 거리에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약 10년 동안의 서울 생활은 오히려 새로운 가정의 좌절을 맛보게 했고, 더욱 현실에 안존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꼴이 되었다. 이들은 수락산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수락산은 도봉산 동쪽의 양주 땅에 자리잡고 있다. 서쪽으로 긴 골짜기가 이어지고 그 골짜기를 따라 시냇물이 흐른다. 경치로 따지면 산세야 도봉산보다 처진다지만 포근함은 한수 위로 치기도 한다. 서쪽 골짜기 위에 바위와 나무가 어우러진 만장봉이 있다.

김시습은 만장봉 아래에 수락정사를 짓고 새 터전을 마련했다. 갈아먹을 땅 몇 뙈기도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일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가 이곳에서 다시 도를 닦았다고 하니, 새 터전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보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 같다.

이때는 유생들이 찾아오면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 대해서만 말했지 결코 불법(佛法)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유생들이 도가의 수련법에 대해 물으면 그다지 답하기를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그의 나이 마흔여덟. 그가 공자 · 맹자를 말하고 불법을 말하지 않은 것이 사람들의 입방아 때문인지, 아니면 불법을 말해보아야 그 깊은 뜻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때는 그러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예의 바른 유생 흉내를 낸 것은 아니다.

이곳으로 그를 찾아오는 인사들도 더러 있었다. 앞에서 조우라는 승려가 정승 노사신에게 《장자》를 배웠다고 하여 김시습에게 혼쭐난 적이 있었다. 예전의 잘못을 뉘우쳐서 사과하러 왔는지, 아니면 한번 대판 따져보러 왔는지 조우가 수락정사로 그를 찾아왔다. 김시습은 그를 흔연스레 맞이하며 말했다.

“자네가 고맙게 나를 찾아보러 왔는가? 자네가 글을 배우겠다면 내 마땅히 가르쳐주어야지.”

이어 일꾼(종이라고도 함)에게 밥을 지어 먹이도록 했다. 밥상이 들어오자 김시습은 조우의 옆에 높직이 걸터앉았다. 조우가 시장하던 차에 밥을 먹으려고 입가로 숟가락이 갈 때마다 김시습은 발로 바닥을 꽝꽝 차 먼지를 일으켰다. 숟가락에 먼지가 하얗게 앉았다. 조우는 참고 계속 숟가락질을 했지만 김시습은 계속 먼지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조우는 끝내 한 숟가락의 밥도 먹지 못했다. 이에 조우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조우 : 생원은 밥을 지어 나를 주고서 한 숟가락도 먹지 못하게 하니 이 무슨 심사요?
김시습 : 자네가 노가에게 글을 배웠으니 어찌 사람 노릇을 하겠는가?

조우는 어쩔 수 없이 김시습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돌아갔다.(《월정만필》) 그러나 조우는 뒷날 이 이야기를 박지화라는 선비에게 들려주며, 김시습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더러 그에게 글을 배우러 사람들이 오면 그는 나무나 돌로 두들겨 패기도 하고 활을 쏘아보라고도 했다. 이런 모욕을 지레 짐작하고 견뎌내고 글을 배우면 이번에는 화전을 일구게 하거나 밭일을 시켰다. 글을 배워 선비가 되려는 청년들이 화전을 일구거나 밭일을 즐거이 하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 노동을 시켰다. 비록 더러는 화전이나 밭일을 견뎌내면서 글을 배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얼마의 기간을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기 일쑤였다.
- 《연려실기술》

이런 그의 깊은 뜻은 어디 있었을까? 물론 이런 사람들만 수락정사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남효온은 그가 거처하는 곳을 찾아다녔는데 수락정사를 찾아올 때 길을 헤맨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와 만나면 다시 시를 화답하며 시세를 한탄하고 흉금을 털어놓았다. 이렇게 노동을 하고 도를 닦으며 살아가는 그에게 끊임없이 시련이 따라붙었다. 그도 농민이요 화전민이었다. 화전 몇 뙈기 갈아먹고 더러 일꾼이나 제자들을 시켜 수확을 해도 남는 것은 거의 빈손이었다.

아무리 농사를 지어본들, 그는 나이도 들고 몸도 약한 일개 선비였다. 그리고 처자도 없는 몸이었다. 한 몸의 호구를 위해서는 어디 마음 맞는 대가의 사랑채에서 훈장 노릇이나 하며 밥을 얻어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굳이 일을 했고 또 농부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몸소 겪고 보았다. 그 때문에 깡그리 조세니 도조니 하며 명목을 붙여 수탈을 일삼는 벼슬아치나 지주들을 미워했다. 그리하여 또 이런 시를 남겼다.

큰 쥐야 큰 쥐야
내가 거둔 곡식 먹지 말거라
삼 년씩이나 너에게 바쳐왔는데
나에게 적은 곡식도 남겨주지 않는구나
가리라, 너의 땅을 떠나가리라
저 즐거운 낙토로 가 노닐리라
큰 쥐야 큰 쥐야
네 어금니가 칼날같이 날카로워
내가 잘 갈아놓은 곡식을 해치고
내 수레바퀴마저 물어뜯어
나에게 길을 갈 수 없게 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게 하네
큰 쥐야 큰 쥐야
소리내 늘 찍찍 울어대며
교활한 말로 사람 해치고
사람 마음을 두려움으로 떨게 한다
어떻게 하여 모진 고양이 얻어다가
한번 너를 잡아 남은 종자 없게 할까
큰 쥐가 한번 새끼를 낳으면
내 집안에 젖먹이 쥐 가득 차니
내가 너를 기르는 게 아니어서
쥐를 잡아 처형하던 옛 옥사에 붙여
너의 깊숙한 소굴 구멍을 메워
종적을 멸하게 하겠노라
- 〈석서(碩鼠)〉

이 ‘큰 쥐’는 누구를 뜻하는가? 《시경》의 〈석서〉편에 나오는 이 시가는 조세를 마구 매기던 통치자들을 풍자하는 내용으로, 민간에 떠돌던 것이었다. 그러니 여기에서 말하는 ‘큰 쥐’는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만하다. 이 ‘큰 쥐’는 여느 농부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까지도 방해하고 오도가도 못하게 하는 재앙 덩어리였던 것이다.

그가 당초 수락산에 들어갈 적엔 몇몇 친구와 독서도 하고 농사도 지으며 자급자족할 작정이었다. 해마다 골짜기에 씨를 뿌리면 보리에서 조까지 많은 곡식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벼와 밤 따위도 땅이 걸어 가을이 되면 수십 가마니를 수확하리라 생각했다.

이렇게 먹을거리를 만들어놓고 다음해에는 좀더 차분한 마음으로 독서와 학문에 힘쓰기로 마음먹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뒤에 그는 서울 나들이를 나왔다. 그리고 흡족한 마음으로 서울 거리를 돌아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수락정사로 들어가 보니 곡식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산쥐들이 깡그리 먹어치워 버렸던 것이다. 그는 망연자실해서 눈물을 삼키며 곡식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궁핍하다고 사람들에게 빌붙어 먹고, 입에 풀칠하기 위해 관에 몸을 조아리고 아양을 떨며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선비의 지조가 땅에 떨어진 것이다. 아아, 어찌할까?”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궁해지면 처먹으라고 내주는 음식도 받아야지요.”

“옛 사람이 말하지 않았소. 늙을수록 더욱 장건해지고, 궁할수록 더욱 견고해져야 한다고······.”(〈상유양양진정서〉)

그의 자존심은 또다시 서울의 대갓집에 빌붙어 얻어먹게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그의 심사는 또 뒤틀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그의 시나 글을 보면 쥐를 미워하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이 쥐가 앞에서 말한 ‘석서’인지, 아니면 산쥐, 들쥐인지는 모를 일이다. 도둑질하고 빼앗는, 사람 탈을 쓴 큰 쥐와 작은 쥐, 그리고 사람의 먹을 것을 요리조리 훔쳐 먹는 산쥐와 들쥐로 구분해서 나타낸 것이리라. 이 두 종류의 쥐를 그는 미워했을 법하다. 분명히 ‘쥐’는 그의 천적이었다. 그런 쥐를 다스릴 능력이 그에게는 없었다. 다만 그 쥐를 피해 다니면서 저주와 원망만을 퍼부어댈 뿐이었다.

이제 그는 10여 년이 넘는 서울 생활이나 서울 언저리 생활에 넌덜머리가 났다. 1년쯤의 수락정사 생활에서 그는 ‘동봉(東峰)’이라는 호 하나를 얻고는 또다시 떠날 차비를 했다.

그는 용산의 수정(水亭)에 잠시 머물렀다. 아마도 친구와 후배들을 만나보고 길을 떠날 작정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수정에는 남효온을 비롯한 많은 명사들이 몰려들었다.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김시습이 갑자기 정자 밖 두어 길 밑으로 떨어졌다. 어찌나 심하게 다쳤는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었다.

여러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져 달려가 몸을 끌어올리고 주무르고 물을 먹이고 법석을 떨었다. 이윽고 김시습이 깨어나자 사람들이 물었다.

“이렇게 많이 다쳤으니 내일 어떻게 길을 떠나겠소?”

“자네들은 내일 다락원으로 나와서 나와 송별할 것을 기다리고 있게. 곧 조섭을 잘해서 조금이라도 나으면 웬만한 아픔은 참고 길을 나서겠네.”

다음날 아침 여러 사람이 다락원에 가니 그는 벌써 와 있었다. 다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고 있었다. 남효온이 말했다.

“선생은 어찌 환술을 써서 우리들을 속이시오?”(《월정만필》)

마지막 방랑의 길

마흔아홉 살 되던 해 늦은 봄날인 3월 19일, 그는 강원도로 길을 떠났다. 많은 책을 싸 짊어지고 가면서, 그는 관동의 산수를 돌아보고 수수라도 심어 먹고 살 땅뙈기를 구해 살리라며 다시는 서울로 올 뜻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남효온은 이렇게 썼다.

내가 술을 가지고 가서 손을 잡으며 슬픈 마음으로 이별했는데 다시 만나볼 기약이 없었다.
- 《추강집(秋江集)》

그는 예전에 잠깐 머물던 설악산 · 강릉 · 양양 등지로 발길을 돌렸고, 다시는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소양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춘천의 청평산 청평사에서 한동안 지냈다. 그리고 오대산 한계령을 돌아보다가 동지 때에는 강릉에 이르렀다. 이때 그는 두 사람을 데리고 간 것으로 보인다. 종자인 어성갑(於成甲)과 친족인 김효남(金孝男)이었다. 두 사람은 그의 손발이 되어주었다.

이 방랑길에서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또 백발이 된 자신을 돌보며 격렬한 감정의 표백보다는 과거를 돌이켜보는 감상에 젖은 심정을 드러냈다. 당시 그의 시는 자기 일생을 돌아보는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쉰한 살이 되던 해 정월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에서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읊조리고 있다.

어머니를 열세 살에 잃고
외할머니에게 이끌려 길러졌네
얼마 뒤에 또 유명을 달리하시자
생업이 뒤틀어졌네
벼슬살이할 심정이 적고
숲속에 노닐 뜻 많아
오직 생각은 세상을 잊는 것이어서
멋대로 산언덕에 누워 지냈구려

이 무렵 또 이런 시를 남기기도 했다.

늙음 병이 찾아든 속에
삼 년 동안 강릉을 떠돌았네
옛 친구는 만날 길 없고
꽃떨기만 마주하는구려
공중에 매달린 달을 금(禁)할 수 없겠으나
나무에 부는 바람도 미워지는구나
금년에는 어느 곳에 잘꼬
천지 사이에 하나의 떠돌이

이렇게 그는 늙음과 질병과 그리고 흰 머리털을 보며 옛 친구들을 그리워하다가 설악산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의 양양부사는 유자한이었다. 유자한은 1486년(성종 17) 이곳 부사로 왔다. 그는 비록 벼슬자리에 있었지만 사림파들과 어울렸으며, 뒷날 갑자사화로 유배지에서 죽은 절의의 벼슬아치였다. 이런 유자한이 설악산에 있는 김시습의 이야기를 못 들었을 리 없었다. 유자한은 김시습을 지극히 후대하며, 조정에 벼슬을 천거할 것이니 늙은 몸을 돌보아 다시 머리를 기르고 서울로 가기를 권했다. 그리고 가업을 잇고 범상한 생활을 도모해보라고 일렀다. 이때 김시습은 이런 편지로 회답했다.

앞으로 긴 괭이를 만들어서 복령(약이름)과 창출(약이름)을 캐리로다만 나무에 서리가 내리면 중유(공자의 제자)의 더러운 옷을 수선하여 입고 천산에 눈이 쌓이면 장공(진나라 때 사람. 학창의를 입고 눈 위를 걸어다녀 신선이라 일컬었다 함)의 학창의를 고쳐서 입으리로다. 비굴하게 사는 것이 마음 펴고 사는 것만 하겠소. 천년 뒤에나 나의 뜻을 알아주기 바라오.
-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상유자한진정서〉

그는 유자한의 뜻을 한사코 거절하며 산속에서 자족하며 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속인의 경지를 벗어나다

유자한은 김시습의 마음을 달래고 그의 생활을 도우려 애썼으나 잘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번은 계집종을 보내 그를 돌보게 했다. 그는 계집종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계집종은 김시습이 영 마땅치 않았다. 꾀죄죄한 모습에 쉰이 넘은 늙은이인 데다, 돈도 땅도 없는 방랑객이니 시종을 들거나 첩살이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당시 계집종은 상전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했을 뿐만 아니라, 상전이 시키면 첩이 되어 수발을 들어야 했다. 만일 이를 거역하면 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김시습도 그 계집종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마침 달빛이 환히 비추자, 김시습은 짐짓 계집종에게는 관심이 없는 척 달구경을 하며 그녀의 행동을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계집종은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을 보고 눈치를 살피다가 가버렸다. 계집종은 돌아가 부사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고, 부사는 그녀를 크게 나무랐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왜 계집종을 곁에 두고 일도 시키지 않고 노리개로 삼지도 않고 돌려보냈을까?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가 자신의 이기심에 충실했더라면 그 계집종은 어떤 처지에 놓였을 것인가?

그가 설악산의 암자에 있을 때 강릉의 선비들이 그에게 글을 배우러 올라왔다. 최연 등 대여섯 명의 청년들이 글을 가르쳐달라고 하자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나 최연만은 끝까지 버티고 앉아 글을 배웠다. 최연은 김시습이 시키는 대로 일도 하고 글도 배우며 아침저녁으로 극진히 모시면서 제자의 도리를 다했다.

그런데 달이 밝고 밤이 깊을 적에 최연이 자다가 눈을 떠보면 김시습은 잠자리에 없었다. 이러한 일이 여러 번 있었지만 최연은 물어보지도 못하고 혼자 궁금증을 삭이고 있었다. 어느 달 밝은 밤, 그는 김시습이 또다시 망건을 쓰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 몰래 뒤따라 나섰다. 김시습은 깊은 골짜기에 있는 넓은 반석 위로 올라가 앉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두 사람이 더 나타났고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웃었다.

최연은 멀리 떨어져 숨어서 살피느라고 대화 내용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들이 대화를 마칠 때쯤 최연은 재빨리 돌아와 잠든 척하고 예전처럼 누워 있었다. 다음날 아침 김시습이 최연을 불러 앉혔다.

“너를 가르칠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조급한 것을 보니 가르칠 수가 없구나. 가거라. 가서 네 일이나 하여라.”

최연은 말할 나위도 없이 돌아왔다. 김시습과 대화를 나눈 게 사람인지 신선인지 모를 일이라고 한다.(《어우야담》)

그가 거처하던 설악산의 암자를 세상 사람들은 ‘오세암’이라고 했다. 곧 그의 어릴 적 별명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오세암의 유래는 사실 이와 다르다). 설악산 오세암에서 그는 신선의 행적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지만 그가 도가에 깊은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물론 《노자》와 《장자》를 읽었고, 또 수련과 같은 양생의 법을 몸소 익혀보기도 했지만 신선술에는 깊이 빠지지 않았다. 그는 삼각산에서 책을 내던지고 설잠이라는 중이 되었을 때 ‘이교(異敎)’가 크게 일어나는 세태를 한탄해서 방랑생활을 하게 되었다고도 토로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중년에 심적 갈등을 겪으며 토로한 말일 뿐이다.

그가 삼각산에서 지었다는, “삼각의 높은 봉우리 태청(太淸, 도가의 세계)을 꿰었고 올라보니 두우성(斗牛星)을 딸 만하네”라는 시는 도가 분위기를 풍기는 내용인데, 자신은 이것을 지은 적이 결코 없으며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퍼뜨렸다고 했다. 그가 방외인이 되었다고 해서 도가류라고 말할 수는 없으며 시속을 멀리했다고 도인은 아니다.

불교에 대한 그의 깊이가 단순히 절간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귀동냥으로 들은 지식이 아니었음은 여러 군데에서 증명된다. 그는 30대에 불경 번역, 곧 《묘법연화경》의 번역에 참여할 만큼 불교 지식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이어 이와 관련된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의상(義湘)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 대한 주석을 저술했다. 이는 보통 ‘법계도’ 또는 ‘법성게(法性偈)’라고 부르며 우리나라 불교의식에서 빼놓지 않고 염송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화엄사상을 요약하여 담았는데, 이 화엄사상을 간단히 말하면 법계평등(法界平等)과 무차별상(無差別相)을 그 기저로 하고 있다.

그가 초기와 중년에 방외인의 모습을 보이며, 불경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이단의 부흥을 나무라고 또다시 머리를 기르고 공맹의 도를 말하자, 많은 유자(儒者)들은 그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유교라고 변호했다. 이이도 그를 두고 “심유적불(心儒蹟佛)”이라고 했다. 곧 ‘마음은 유학에 두고 행동은 불교였다’는 뜻이다. 이런 말이 어느 시기에는 맞았다.

그러나 그가 50대의 나이로 다시 방랑을 시작했을 적에는 사뭇 달랐다. 앞에서 본 대로 그가 송광사의 주지 조우를 비웃으며 욕한 것도 권문에 아부하는 조우의 행동 때문이었지, 불교와 관련된 그 무엇 때문은 아니었다.

또 세조의 명으로 불경언해에 참여했을 때 알게 된 ‘학조’라는 스님이 있었다. 학조는 유자 집안 출신이었다. 그리고 앞에 나온 김수온의 형인 ‘신미’라는 중이 있었다. 이들은 속리산 복천사에서 세조를 모시고 대법회를 열기도 하고 왕명으로 금강산 유점사 중창의 주역으로 일을 벌였다. 김시습은 이들과 어울렸는데 학조와는 이런 일화가 있다.

학조는 김시습에게 굴복하지 않고 매양 맞섰다. 어느 날 산속을 함께 가게 되었는데 마침 비가 개고 길 옆에 산돼지가 칡뿌리를 캐 먹느라 파놓은 웅덩이가 있었다. 그 웅덩이에는 흙탕물이 가득 차 있었다. 김시습이 말했다.

“내가 이 흙탕물에 들어갈 터이니 자네도 함께 따라 들어오겠는가?”

학조는 그러자고 했다. 두 사람은 흙탕물을 휘젓다가 나왔는데 학조는 얼굴과 옷이 흙탕물에 범벅이 되었지만 김시습은 아주 깨끗했다. 이에 김시습이 말했다.

“자네가 어찌 나를 본받을 수 있겠는가?”(《월정만필》)

이런 야담에는 김시습을 의인으로 만들려는 뜻이 숨어 있겠지만 그가 불승을 얕잡아보았다는 이야기는 전혀 전하지 않는다. 그가 두 번째로 서울을 떠나 방랑의 길에 나섰을 때 다시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깎은 것은 절에서 밥이나 얻어먹으려는 얕은 생각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그가 여느 승려처럼 조용히 불교를 익히거나 참선에 빠져든 것은 아니나 결국 불교로 종장을 삼았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성리학에서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철저히 주창했다. 만물은 ‘기’로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이는 성리학에서 이원론을 펴서 이는 선, 기는 선악의 혼잡으로 보는 일반적인 학설에 큰 반기를 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물질이나 현상이 정신을 좌우한다는 논리에 접근했다고 볼 수 있고, 또 이것은 인간은 기에서 태어난 평등한 존재라는 논리로도 발전하는 것이다.(〈태극설〉)

그가 줄기차게 농민의 생활을 동정하고 그 자신이 노동을 신성시한 것 들은 애민사상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는 인간의 생활이나 차별의 궁극적 책임을 통치자인 왕이나 지배계층인 벼슬아치에게 두고 있다.(〈고금제왕국가흥망론〉) 밑으로부터의 개혁, 곧 민중적 역량이나 동력을 중요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애민사상은 매우 철저했다.

그리하여 그의 기철학은 뒷날 화담 서경덕에게 전수되었고 애민사상은 율곡 이이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평등관과 무차별관의 불교사상은 현실과 밀접한 행동불교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투철한 사상을 지니고 말년의 허무와 감상에 빠진 그는 결국 홍산(지금의 부여군 내)의 무량사로 발길을 돌려 삶의 마지막 안식처로 삼았다.

처절한 자기성찰의 진보적 지식인

강원도에서 충청도로 발길을 돌렸지만 그가 병든 몸을 의탁할 곳은 역시 절간이었다. 절간에 머문다고 하여 법회를 열고 설법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루는 무량사의 여러 스님들이 설법을 청했다.

“빈승들이 대사를 받든 지 오래되었으나 설법을 한 번도 들려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사의 청정하신 법안(法眼)을 끝내 누구에게 전하시렵니까? 빈승들이 향할 곳을 알지 못하니 눈에 가린 것을 금집게로 긁어주소서.”

“너희들은 크게 설법의 자리를 열라.”

김시습은 가사를 걸치고 법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중들이 법당을 가득 메우고 꿇어앉아 있었다. 김시습이 소리쳤다.

“소 한 마리를 몰고 오라.”

중들이 소를 끌어다가 뜰 아래에 매어놓았다. 그는 또 소리쳤다.

“소 먹일 꼴을 가져오너라, 그리고 소 꽁무니에 놓아두거라.”

소와 꼴이 놓이자 그는 다시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불법을 듣고자 함이 이와 같다.”

설법은 이것으로 끝이었고 중들은 얼굴을 붉히고 수군거리며 물러났다. 무식한 사람을 ‘소 꽁무니에 있는 꼴뚜기’라고 일컫는 속담에 빗대어 불법에 어두운 승려들을 질타한 것이다.(《용천담적기》. 이 글에서는 승려들을 비웃는 뜻으로 씌어졌다) 가위 선승의 설법 흉내를 낸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무량사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지냈다. 병이 깊은 가운데 그는 이런 시를 남겼다.

봄비가 주룩주룩 이삼 월에
모진 병 붙들고 선방에서 일어나
중생에게 서쪽에서 온 뜻을 묻고자 했으나
다른 중들이 기리고 높일까 두렵구나
- 〈무량사 와병〉

이처럼 그는 지식을 떠벌려 설법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는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겼으며 도통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재기가 넘치고 독선적이었고 불의나 남의 허물을 보면 참지 못했다고 한다. 또 자기의 일로 남에게 부탁한 적이 없으니 벼슬살이를 구하는 것은 물론, 양식이 떨어져도 빌려올 줄 몰랐다. 이런 성격을 두고 그 자신도 원래부터 성품이 그래서 고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니 그가 명망을 구했을 리도 없다.

그가 많은 시를 지어 내버렸던 것도 그런 ‘되지 못한 싯줄이 무슨 소용이랴’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선방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였다. 다만 인연 따라 담담히 생을 마감하려 했다. 무량사에서 어느 날 그는 무슨 마음이 동했던지 붓을 잡고 자화상을 그렸다. 그리고 자화상 위에 이런 글귀를 써넣었다.

“너의 모양은 조그마하고 너의 말은 크게 분별이 없구나. 너는 구덩이 속에 처박아두어야 마땅하다.”

인생을 마감하면서 남긴 말이었다. 처절한 자기성찰의 글귀였다. 이 글귀 밑에는 ‘청한(淸寒)’이라는, 또 하나의 자기 호를 새긴 도장을 찍어두었다. 그의 나이 쉰아홉 되던 해, 봄날씨도 따뜻한 3월, 조용히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화장을 하지 말고 임시로 관을 절 옆에 두어라.”

그의 제자들은 유언대로 그의 관을 절 옆에 그대로 조용히 모셔두었다. 3년 뒤에 장사 지내려고 관을 열어보니 안색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여러 스님들이 놀라 모두 성불했다고 말했다. 불교의식대로 다비를 했더니 사리가 나와서 그 사리를 담아 무량사에 부도를 만들어 안치했다.(이이 《김시습전》)

그는 분명히 불행한 삶을 살았다. 살아서는 그의 절의와 문명 탓인지, 여러 사람의 동정을 받기도 하고 시샘을 당하기도 했다. 또 죽어서는 수많은 일화로 민중의 가슴속에 자애로운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선조는 그의 충절을 기려 생육신으로 떠받들게 하고 이이로 하여금 《김시습전》, 윤춘년으로 하여금 《매월당전》을 짓게 하여 기렸다. 그가 죽은 지 89년 뒤의 일이었다. 또 정조는 그가 죽은 지 289년 뒤에 이조판서를 증직했고 이어 곳곳에 생육신과 김시습을 기리는 서원과 사당이 세워졌다.

이는 모두 그의 충절을 기린 것이다. 곧 그가 세종에 대한 은의, 단종에 대한 충성을 다하기 위해 몸을 방랑과 물외(物外)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 때문에 그가 세상을 깔보고 산 것은 아니었다. 그는 냉철하게 현실을 보고 비뚤어진 세상을 등졌다. 또 그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몸소 노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지사였다. 그러므로 그는 진보적 지식인이요 사상가였지, 음풍농월이나 일삼는 시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와 가장 가까운 지기 중의 한 사람인 홍유손은 김시습의 제문에 그의 충절을 말하는 대신 “그는 색은행괴(索隱行怪, 궁벽한 것을 캐고 괴상한 행동을 하다)를 하지 않았다”고 썼다.

또한 그는 “저자에서 함께 술 마시던 무리들도 모두 통곡해 마지않았다”고 했으며, “공을 우리들이 가장 잘 안다”고도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왕조의 지배층이 그의 충절을 지나치게 과장한 것은 충효를 통치철학으로 이용한 조선시대의 이미지 조작에서 나온 것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는 분명 조선 전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현실 모순에 철저히 저항한 시인이었고 사상가였음을 앞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다만 그는 현실 속에 뛰어들어 개혁사상을 실현하려 하지 않고, 방외에 멀찍이 서서 수선해야 할 망태기쯤으로 현실의 모순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이것이 그에 대한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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