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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채선 명창

목눌인 2015. 10. 29. 13:44

진채선 명창

 

19세기 중반, 남성들의 독무대였던 판소리계에 진채선이라는 여성 소리꾼이 나타나 큰 파장을 일으켰다. 고창현의 비천한 관기였던 그녀는 동리정사에서 신재효김세종의 가르침을 받고 나서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그녀의 등장으로 여성도 판소리 연행의 주체로 활약할 수 있음이 증명되면서 소리판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신재효는 열두 마당의 판소리 중에서 다섯 마당을 개작했고, 판소리 이론을 확립한 다음 명창 김세종을 영입하여 함께 제자들에게 전문적인 판소리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때맞춰 판소리 애호가였던 흥선대원군은 운현궁에 박유전, 박만순, 정춘풍 등 당대의 명창들을 불러들여 판소리를 감상함으로써 판소리 보급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 무렵 양반 사대부들은 각종 연회에 소리꾼들을 불러들여 소리판을 벌이게 했고, 종종 저택의 사랑방에 둘러앉아 소규모의 공연을 즐겼다. 그렇듯 판소리의 저변의 확대되자 양반이었던 정현석이 판소리 비평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판소리의 전성기였던 그 시절, 양반들이 판소리를 애호하면서 후원자로 나서자 몇몇 뛰어난 소리꾼들이 ‘명창’으로 대접받으며 사회적으로 공인된 전문 예술인으로 자리잡았다.

공연예술의 하나로 판소리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기생이나 세습무 출신의 여성들이 판소리에 뛰어들었다. 그 동안 금기시되었던 기생의 판소리 연창도 허용되었다. 이전에 기생들은 음률과 가무에는 능숙했지만 잡가나 판소리 같은 속악은 부르지 않았다. 한데 그 무렵에는 기생들이 잡가와 판소리를 자유자재로 불렀고, 개중에는 명창에 버금가는 기량을 갖춘 사람도 나타났다. 이에 발맞춰 기생들의 판소리 학습은 자연스러운 문화 현상이 되었고, 여성 명창이 출현할 수 있는 토양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급변하는 시대 조류 속에서 신재효는 문하에 80여 명의 기생을 받아들여 판소리를 가르쳤고, 마침내 진채선이라는 여류 명창을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에 데뷔시킴으로써 여성 판소리의 서막을 열었다.

무당의 딸, 소리에 눈 뜨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명창으로 알려진 진채선의 생애는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불확실한 구전이나 상상력의 산물이 대부분이다.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검증된 사항은 그녀가 1847년에 고창에서 태어난 기생으로 음률과 가무에 능하고 판소리를 잘했고, 경회루 낙성연에서 노래를 부른 뒤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운현궁에서 살았으며, 스승 신재효가 연정을 듬뿍 담은 〈도리화가〉를 지어 보냈다는 것이다.

최근 새롭게 밝혀진 사실로는 그녀의 성씨가 여양(驪洋) 진씨(陳氏)이며, 선대는 무장에서 건너왔는데, 고향은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 검당포라는 것이다. 그녀의 신분에 관해서는 기생과 세습 무당의 딸이라는 두 가지의 설이 전해지고 있다.

진채선의 이질녀 김막례에 따르면 무장에서 살던 진채선의 할아버지가 생활이 어려워지자 검당포로 건너가 과부였던 김단골과 함께 살면서 진씨 일가가 현지에 뿌리내렸다고 한다. 진채선의 어머니 역시 단골이었는데 굿보다 소리를 더 좋아하여 이곳저곳으로 배우러 다녔다고 한다. 진채선 역시 신재효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소리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단골이란 남쪽 지방의 세습무를 지칭하는 말이므로 어머니는 음률에 뛰어난 무당이었음에 분명하다. 남도의 세습무는 내림굿을 받고 직접 신을 모시는 한강 이북의 강신무와 달리 일정한 지역의 단골판을 운영하면서 뛰어난 가창력과 연희성을 바탕으로 제의를 주관하는 예능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강 이남, 특히 전라도 지역의 단골들이 부르는 서사무가는 씻김굿 공연에서 볼 수 있듯이 판소리와 유사한 성격을 지녔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판소리가 서사무가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주대사습사》에는 진채선이 관기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녀가 어머니의 무업을 계승하지 않고 일찍부터 고창현의 관기가 되어 동기 때부터 체계적으로 기생의 학습 과정을 밟았다면 50대 중반까지 고창현의 아전으로서 만년에 호장의 직임을 맡았던 신재효의 관리를 받는 과정에서 가창력을 인정받았음에 분명하다. 호장은 아전의 우두머리로서 관청에서 주관하는 각종 행사나 연회에 소리꾼들이나 기생을 동원하는 직분도 수행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조선 사회를 지탱하던 강력한 신분제도가 느슨해진 시대 분위기 속에서 소리꾼의 능력을 갖춘 여성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그런 변화의 시기에 기생이었던 진채선은 신재효가 세운 동리정사에 들어가 그의 판소리 이론을 습득하고, 동편제 명창 김세종의 소리를 전수받았다.

판소리의 전수 방법은 전통적으로 도제식이었다. 사제가 숙식을 함께하며 철저한 주입식 교육을 통해 스승의 소리를 제자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그와 같은 교육 방식을 감안한다면 진채선의 소리는 김세종의 동편제 계보를 이어받았으리라 짐작된다.

기생에서 여류명창으로 거듭나다

1867년, 21세 한창 꽃피는 나이의 진채선은 김세종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비롯하여 경향의 고관대작들이 운집한 경회루 낙성연에서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하여 여류 명창의 출현을 알렸다. 경회루 낙성연이 공식적인 국가 행사였던 만큼 그녀의 명성은 전국에 널리 퍼졌다.

당시 진채선은 갓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는 남자 복장으로 무대에 서서 신재효가 개작한 〈춘향가〉에 이어 흥겨운 〈방아타령〉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성조가〉를 불렀다. 〈방아타령〉은 본래 하층민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민중가요로 자유롭고 발랄한 성 의식을 드러내지만 그녀가 부른 〈방아타령〉은 신재효가 개작한 것으로 왕실에 대한 찬양과 축원을 담고 있었다.

〈성조가〉는 역시 〈성주풀이〉 형식으로 집 안팎을 관장하는 여러 신들에게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는 노래인데, 신재효가 경복궁 중건을 기념하고 왕실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사설을 바꾸어 진채선이 부르게 했다. 《조선창극사》에서는 당시 진채선의 활약상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음의 웅장한 것과 기량의 다단한 것은 당시 명창 광대로 하여금 안색이 없게 되었다.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에 불려 올라와서 만록총중홍일점으로 명성이 일세를 경동케 하였더라.’

판소리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던 흥선대원군은 진채선의 공연을 보고 매우 흡족해 하면서 즉시 그녀를 대령기생으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진채선은 졸지에 운현궁의 여악을 담당하는 궁녀가 되었다. 그때부터 진채선은 고종 임금의 친정 선언으로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6년 여의 세월을 운현궁에서 보내야 했다.

진채선은 특히 〈춘향가〉와 〈심청가〉를 잘 불렀는데, 남성 명창들과 겨루어 손색이 없었으며, 독자적인 더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더늠이란 명창들이 직접 사설과 음악을 독특하게 새로 짜서 자신의 장기로 삼아 부르는 대목을 말한다. 진채선이 사설 창작 능력과 출중한 연창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다음과 같은 진채선의 더늠 ‘기생점고대목’은 박헌봉의 《창악대강》에 나오는데,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낙춘이의 용모와 행색이 앞서 우아하게 등장하던 여러 기생들과 대비되어 관객들의 폭소를 유발시킨다. 이것은 동리정사의 실기 선생이었던 김세종이 부르던 〈춘향가〉나 이론 선생이었던 신재효이 개작한 〈춘향가〉 사설과 매우 다르다. 즉흥적으로 소리판을 장악하는 그녀의 솜씨가 매우 뛰어났음을 말해준다.

“낙춘이가 들어오는데, 제가 잔득 맵시있게 들어오는 체하고 들어를 오는데, 시면한단 말을 듣고 이마박에서 시작하여 귀 뒤까지 파재치고, 분 성적한단 말을 들었던지 개분 한 냥 일곱 돈 엇치를 무지금하고 사다가 성 같에 회칠하듯 반죽하여 온 낯에다 맥질하고 들어오는데, 키는 사그내 장승만한 년이 초마자락을 훨신 추어다가 턱 밑에다 떡 붙이고, 무손의 곤이 걸음으로 껑충껑충 엉금엉금 들어오더니, 점고 맛고 ‘나오.’ 운운.”

〈도리화가〉의 연인이 되다

우리나라 판소리계의 신화적인 존재인 신재효는 일찍이 세 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차례로 사별하고 56세 때부터 홀아비가 되었다. 때문에 그가 길러낸 여류 명창 진채선과의 관계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59세 때 진채선에게 지어보낸 〈도리화가〉에는 사제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애틋한 정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진채선이 대원군의 명을 받아 운현궁의 대령기생이 된 후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다소나마 추측할 수 있다.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돌아오니
귀경 가세 귀경 가세 도리화 귀경 가세.
도화는 곱게 붉고 흼도흴사 오얏꽃이
꽃 가운데 꽃이 피니 그 꽃이 무슨 꽃고.
웃음 웃고 말을 하니 수렴궁의 해어환가.
해어화 거동 보소 아릿답고 고을시고.
현란하고 황홀하니 채색채자 분명하다.
도세장연 기이한 일 신선선자 그 아닌가.

신재효는 진채선과 이별한 지 3년 만에 그녀가 인근 고을의 관아에 내려와 소리판을 열자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간다. 그 시기는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봄날이었다. 그녀의 나이 24세, 연분홍으로 물든 복숭아꽃처럼 여성으로서 농익어가는 나이였지만 자신은 호호백발로 오얏꽃처럼 언제 질지 모르는 노인이었다.

더군다나 진채선은 운현궁의 대령기생으로서 아무리 스승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기에 상사병에 걸린 스승은 공연이 벌어지는 내내 먼 발치에서 구름같은 머리털, 나비눈썹, 앵도 같은 입, 흰 잇속, 백옥 같은 얼굴, 버들 같은 허리, 고운 살결, 연꽃 걸음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자태를 낱낱이 훑어보면서 그리움의 실체를 확인할 뿐이다.

아리따운 제자는 너른 마루 비단자리에 은초를 켜놓고 붉은 부채를 휘두르며 노래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장수, 범, 학, 기러기, 서리바람, 꾀꼬리, 빗소리 같았고, 그녀의 태도는 제비처럼 날렵하거나 미풍처럼 부드럽다. 제자의 그처럼 화려하면서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고운 몸짓은 이전의 어떤 명기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였다.

그런 와중에 신재효는 진채선 역시 자유로운 삶과 연인에 대한 자신에 대한 연정으로 번민하고 있음을 알아챈다. 하지만 그녀는 상전이 허락하기 전에는 새장에서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신세이다.

이윽고 그녀와 마주한 신재효는 고생 끝에 영화가 올 터이니 믿고 참아야 한다며 타이르다가 마침내 그녀와 헤어지고 난 뒤 외롭고 쓸쓸해진 자신의 신세 타령을 늘어놓는다. 요즘에는 점점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가며 이가 빠져 고기조차 제대로 씹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 제자의 판소리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는 스승의 입장으로 돌아온다.

진채선의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신재효는 그날부터 상사병이 더욱 깊어진다. 급기야 칠월 칠석 날이 되자 도저히 견딜수 없는 심정이 되어 〈도리화가〉를 지어 운현궁으로 보냈다. 노래의 말미에 그는 한글로 ‘증 선낭’이라 썼다. 곧 ‘채선 낭자에게 준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의 사제 관계는 선명한 남녀 관계로 바뀌었다.

〈도리화가〉의 내용으로만 보면 진채선은 내내 운현궁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때때로 지방 관장의 초청을 받아 판소리를 공연했고, 3년 만에 공연 차 남쪽 지방에 내려갔을 때 신재효가 찾아와 만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대원군이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가야 하는 대령기생으로서 일개 지방 수령의 부름에 응한다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다. 때문에 〈도리화가〉는 상사병에 걸린 신재효가 자신이 기대하고 원하는 만남의 장면을 상상하여 그려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어쨌든 신재효는 이 노래에서 “강호 위의 호걸들이 왕래하며 하는 말이 ‘선낭의 고운 얼굴 노래 또한 명창이라. 듣던 바에 으뜸이니 못 들으면 한이 되리. 그 중에 기묘한 이 쌓인 병이 절로 났네.’ 이 말 듣고 일어 앉아 어서 바삐 보고 지고. 주야로 응망하니 하룻날이 여삼추라.”라 표현함으로써 미인에다 명창인 제자 진채선에 대한 스승으로서의 자부심과 연인으로서의 그리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 후 진채선의 판소리 실력은 안타깝게도 운현궁의 대령기생이라는 한계 상황에 가로막혀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녀의 이름만은 최초의 여류 명창으로서 여성 판소리사의 첫 장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바람의 흔적을 남기다

진채선의 행적은 스승 신재효가 남긴 〈도리화가〉의 여운을 끝으로 미궁 속에 빠져든다. 속설에 따르면 그녀는 1873년, 고종의 친정 선언과 함께 실각한 대원군이 양주 땅으로 내려가 칩거하자 운현궁을 떠나 김제에서 살았고, 1898년 대원군이 사망하자 삼년상을 치른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진채선은 27세 때 궁을 나와 50세가 넘도록 살면서 필생의 업이었던 판소리를 외면하고 제자를 기른 흔적조차 없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다른 속설로는 신재효로부터 〈도리화가〉를 전해받은 진채선이 흥선대원군 앞에서 〈추풍감별곡〉을 불러 연인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드러내자 그 뜻을 헤아린 대원군이 귀향을 허락했고, 마침내 고창으로 돌아온 그녀가 신재효와 함께 살았다는 해피엔딩이다.

〈추풍감별곡〉은 평양의 김진사 댁 무남독녀 채봉이와 선천군수의 아들 강필성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다. 노래 속에서 채봉은 연인 필성과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지만 아버지의 실수로 집안이 망하자 평양의 기생이 된다. 그녀는 수시로 관장에게 수청을 들어야 하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필성에 대한 애절한 연모의 정을 버리지 않고 추풍감별곡이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러자 평안감사가 그녀의 사연을 알고 감동하여 마침내 강필성과 짝을 맺어주었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도리화가〉와 〈추풍감별곡〉이라는 두 개의 애틋한 가사 내용이 교묘하게 어울리며 그럴 듯하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너무나 잘 짜여진 각본이라서 그런지 신빙성이 들지 않는다.

그밖에도 진채선의 행적에 대한 여러 속설이 나돌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나라의 최고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을 모셨던 궁녀 출신으로서 운현궁을 나온 뒤에는 더 이상 세상을 울고 웃기는 소리꾼 노릇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더군다나 일본의 침탈로 인한 망국의 시대 상황 속에서 그녀가 늙은 스승의 바람대로 마음 편하게 애틋한 러브스토리를 완성했을지도 의문이다.

그렇듯 진채선의 후반기 생애는 그녀가 소리판에서 신명나는 대로 마음껏 휘둘렀던 부채 바람처럼 허공에 스러졌고, 후세인들의 허튼 상상 속에서 한 편의 판소리 사설처럼 천변만화의 낯으로 그려지고 있다.

판소리의 미래를 열다

판소리는 매우 긴 줄거리와 독특한 기교 때문에 단기간에 익히기가 불가능한 기예이다. 판소리 한 마당을 완창하려면 길게는 여덟 시간이 걸린다. 그 동안 소리꾼은 고수의 북소리에 맞춰 부채 하나만을 휘두르며 오로지 자신의 소리와 몸짓으로만 무대를 채워 나간다. 더군다나 기나긴 사설을 일정한 계보에 맞춰 정확하게 새겨내야 하므로 보통 남성의 체력으로도 견디기 어렵다.

그처럼 극한적인 난이도를 갖고 있는 판소리의 주역인 소리꾼은 단순한 암기와 표현의 차원을 넘어 소리와 물아일체의 경지에 다다라야 한다. 그러기에 소리꾼이 처음 판소리를 배울 때는 의식주를 스승과 함께 하며 그가 품고 있는 소리의 영혼까지 쓸어담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제간에 관계는 부모자식 사이보다 더 가까워진다. 그런 과정에서 보면 신재효가 여제자 진채선에게 그토록 집착했던 까닭이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는다.

당대에 많은 여성 소리꾼들이 등장했지만 남성들처럼 전문 명창으로서의 대우는 받지 못했다. 하지만 신재효는 진채선을 조련하면서 여성 소리꾼도 남성 소리꾼 못지 않게 뛰어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울러 그녀를 통해 판소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다는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 결과 진채선은 경회루 낙성연이라는 특급 무대에서 자신의 실력을 한껏 뽐냈고, 경향 각지에 공식적으로 여류 명창의 출현을 알렸다. 이런 그녀의 성공 신화를 바탕으로 여류 명창들이 속속 배출되었고, 이들의 공연이 관객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냄으로써 장차 재기발랄한 여성 예인들이 판소리에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리판에 여성적인 판소리가 성행하면서 남성 중심의 판소리에 담겨있던 음란하고 비속한 사설이 사라졌고, 여성 소리꾼들의 세련되고 우아한 발림을 통하여 판소리는 수준 높은 예술성을 갖추게 되었다. 그 덕분에 정체되었던 판소리는 창극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진행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구한말 혜성처럼 등장한 진채선이라는 여류 명창이 열어놓은 판소리의 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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