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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효(申在孝)

목눌인 2015. 11. 30. 10:43

신재효(申在孝)  

조선 후기에 판소리는 광대들의 생동하는 목소리로 시장터에서 공연되었고, 양반가를 거쳐 구중궁중까지 침투했던 매우 특별한 예능이었다. 신재효는 그런 판소리의 후원자이며 지도자로서, 이론가이자 논평가로서, 또한 수많은 단가와 잡가의 창작자로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전라북도 고창의 아전 출신이었던 그는 사재를 털어 수많은 소리꾼들을 후원하고 가르치면서 구전되어 오던 판소리 열두 마당 중에 여섯 마당의 체계를 잡아 작품화했으며, 광대가 갖추어야 할 법례를 마련함으로써 판소리를 광대들의 기예가 아닌 예술의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그 결과 신재효는 ‘어전 광대가 되려면 신재효의 문하를 거쳐 와야 한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수많은 명창들의 스승이 되었고, 그가 살았던 고창은 우리나라 판소리의 성지가 되었다. 특히 그는 남성들의 독무대였던 소리판에 진채선이라는 여성 명창을 데뷔시키고, 그녀와의 사이에 〈도리화가〉라는 애틋한 연가까지 남김으로써 대가의 풍모에 로맨티스트의 이미지까지 갖추었다.

19세기 중후반의 조선 사회를 솔직담백하게 묘사하고 있는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은 섬세한 줄거리와 예리한 풍자를 통해 사회 비판의 한계를 넘어 문화적 카타르시스까지 이끌어낸다.

오랜 세도정권의 그늘 아래 학정과 수탈로 민생이 도탄에 빠졌던 그 시절, 아전들은 지방 수령과 함께 ‘탐관오리’라고 불릴 정도로 백성들에게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행패가 오죽했으면 유학자 조식은 “우리나라는 이서(吏胥) 때문에 망한다.”고 통탄하기까지 했다.

그런 시기에 신재효는 실천적인 지식인이자 교육자로써 괴리되었던 양반과 평민 사이의 간극을 좁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문화적 욕구는 물론 신분 상승이라는 가외의 목표까지 달성했다.

고창에서 태어나 아전이 되다

신재효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이다. 1812년(순조 12년) 11월 6일 전북 고창에서 신광흡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경주 김씨는 마흔 살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자 인근에 있는 정읍의 내장산 영은사에 가서 치성을 드린 끝에 신재효를 얻었다고 한다.

본래 그의 집안은 대대로 경기도 고양에서 살았는데, 아버지 신광흡이 서울에 올라가 종7품 직장(直長)을 지내다 같은 성씨로 연고가 있는 신광택, 신성, 신백록, 신약문 등이 고창 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고창현의 경주인(京主人) 노릇을 했다. 경주인이란 중앙과 지방의 연락사무를 맡기기 위해 수령이 서울에 올려 보낸 아전을 말한다. 그 후 신광흡은 아예 가솔을 이끌고 고창으로 이사하여 아전 노릇을 하다가 관약방(官藥房)을 운영하면서 많은 재산을 모았다.

신광흡은 느지막이 얻은 자식으로부터 효도를 받고 싶었는지 아들의 이름을 ‘재효(在孝)’라고 지었다. 과연 신재효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는데, 매우 총명하여 근동에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학문은 특별한 스승 없이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젊은 날 그는 고창현의 형방을 지냈던 아버지의 후광으로 1852년(철종 3년)에 고창 현감으로 부임한 이익상 밑에서 아전 노릇을 했고, 말년에는 관속이나 광대, 기생들을 관리 감독하는 호장(戶長)의 직임에 있었다. 그러므로 신재효는 평소 판소리나 춤 같은 기예에 매우 익숙했을 것이다.

신재효의 가정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26세 때 첫째 부인 진주 김씨가 자식도 없이 죽었고, 둘째 부인 밀양 박씨도 결혼 2년 만에 외딸만 남기고 죽었다. 셋째 부인 당악 김씨는 아들 신순경과 두 딸을 낳고 3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56세까지 세 명의 아내를 잃은 그는 이후 재혼하지 않았다.

천석꾼 중인, 신분상승을 꿈꾸다

신재효는 40대 때부터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근검절약하면서 불린 끝에 천석지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재산을 움켜쥐고 거들먹거리는 샤일록이 아니라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면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던 장발장이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대가 없이 남의 신세를 지면 의타심이 생긴다면서 자잘한 물건이나 헌옷가지라도 가져오게 했다. 그런 다음 각각의 물건에 이름을 붙여 두었다가 훗날 당사자가 갚으러 오면 본전만 받고 되돌려주었다.

그는 지배층의 수탈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늘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간교하고 이기적인 일면도 직시했다. 때문에 그들의 생활과 표현 양식을 판소리 사설에 실감나게 그려 넣을 수 있었다.

그는 평생 집안의 노비들에게 ‘해라.’ 소리를 하지 않았다. 비록 신분은 다르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애정으로 대하면 배반하는 마음을 품지 않으리란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그런 따뜻한 심성은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그가 양반과 동행하던 길에 천민인 갖바치를 보자 몹시 반가워하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에 양반이 왜 상것과 말을 섞느냐고 하면서 짜증을 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양반들은 갓을 쓰고 뽐내면서도 정작 갓 만드는 사람은 얕잡아 본단 말이오. 그건 양반으로서 할 짓이 아니지요.”

그처럼 신재효는 평소 양반들의 허세에 비판적이었지만 그 자신 신분의 굴레 때문에 타고난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갖고 있었다. 그가 지은 〈자서가〉에는 ‘사나이로 조선에 생겨, 장상 댁에 못 생기고, 활 잘 쏘아 평통할까, 글 잘한다고 과거할까.’라는 대목이 있다. 중인으로서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몹시 비관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평소에 뛰어난 학문과 교양을 바탕으로 수많은 고창의 향반들과 사귀었고, 훗날 조정으로부터 빈민들을 구제한 공로를 인정받아 통정대부란 품계를 받아 명목상 양반이 되었다. 그렇지만 집안의 통혼권이 향리 가문에 국한되었고, 암행어사 어윤중으로부터 저택의 기둥이 신분을 벗어났다고 지적 받아 고쳐 짓는 등 현실적인 신분의 제약을 경험했다.

그 때문이었는지 신재효는 대문 앞에 들츩나무를 심어 덩굴이 사랑의 섬돌까지 이어지게 한 다음 자신을 찾아오는 양반들이 몸을 구부리고 집안에 들어오면 정자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동리정사를 세우다

중인이었던 신재효가 천민들의 기예였던 판소리에 천착하게 된 동기는 분명치 않다. 아전으로서 관아의 연회에 소리꾼이나 기생을 동원하며 판소리의 색다른 문화를 접했고, 그 과정에서 소리꾼들마다 중구난방이었던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고 표준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전 생활을 마친 50대 중반부터 신재효는 본격적으로 판소리 세계에 뛰어든다. 널따란 집을 자신의 호를 따서 ‘동리정사(桐里精舍)’라고 이름 짓고, 그 안에 소리청을 만든 다음 소리꾼들을 불러 모아 숙식을 제공하며 그들이 조리 없이 부르는 판소리 사설을 일일이 채록하고,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제자들에게 인물이나 목소리는 타고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사설의 우아한 표현, 음악적 기교, 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연기 등을 강조함으로써 판소리의 공연적인 측면을 일깨워주었다. 아울러 그때까지 어른들만 익힐 수 있었던 판소리 교육의 허점을 직시하고, 어린 광대도 판소리를 배울 수 있도록 〈춘향가〉를 남창과 동창으로 구분하여 대본을 만들기까지 했다.

그의 소리꾼에 대한 남다른 지원과 전문적인 판소리 교육이 세간에 알려지자 이날치, 김수영, 정창업, 박만순, 전해종, 김창록 등 서편제와 동편제의 유명짜한 명창들까지 앞 다투어 동리정사에 들어왔다. 그들 외에도 신재효는 80여 명의 기생을 제자로 받아들여 장차 여류 명창의 출현을 예고했다.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하다

1910년대 송만재가 지은 《관우희(觀優戱)》에 따르면 판소리는 본래 〈춘향가〉·〈심청가〉·〈홍보가〉·〈수궁가〉·〈적벽가〉·〈변강쇠타령〉·〈배비장타령〉·〈장끼타령〉·〈옹고집타령〉·〈왈자타령〉·〈강릉매화타령〉·〈가짜신선타령〉 등 열두 마당이 있었다. 신재효는 그 가운데 〈춘향가〉·〈심청가〉·〈수궁가〉·〈흥보가〉·〈적벽가〉·〈변강쇠타령〉 여섯 마당의 사설을 고쳐 쓰고 그 내용을 제자들이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개작 과정에서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발견하면 과감히 뜯어고쳤다. 일례로 〈춘향가〉에서 이도령이 춘향의 집에 찾아갔을 때 풍성한 음식상이 나오는 대목이 현실적으로 가당찮다고 여기고 향단이의 대사를 통해 집안에서 손쉽게 차려낼 수 있는 소박한 술상으로 바꾸었다.

그는 또 판소리 사설에서 비속적이거나 노골적인 성애 장면을 일정 부분 걸러내 품격을 갖추면서도 극의 진행상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더욱 생생한 육담으로 그려냈다. 〈심청가〉에 나오는 심봉사와 뺑덕어미가 나누는 아슬아슬한 음담패설이나, 〈춘향가〉에서 이도령과 춘향의 뜨거운 첫날밤, 〈변강쇠가〉에서 옹녀와 변강쇠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성애를 통해 관객들은 더할 수 없는 재미를 만끽하게 된다.

사설의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교훈적인 의미를 일관성 있게 끌어나갔다. 선행으로 복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악인처럼 보이거나, 선행의 과정에서 흠결이 생기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춘향은 이별하는 임 앞에서도 의젓했고, 심청은 죽음에 임하면서도 효녀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렇듯 신재효에 의해 합리적이며 윤리적이고 흥행성까지 갖춘 판소리는 백성들은 물론이고 양반 계층의 열띤 호응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국민예술로 승화될 수 있었다.

그는 단가와 잡가 창작에도 열중하여 〈도리화가〉·〈치산가〉·〈호남가〉·〈성조가〉·〈광대가〉·〈오섬가〉·〈어부사〉·〈방아타령〉·〈괘씸한 양국놈가〉 등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 중에 제목이 특이한 〈괘씸한 양국놈가〉는 1866년에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벌어진 병인양요에서 조선군이 승리한 기념으로 지어졌다. ‘괘씸하다. 서양되놈, 무군무부 천주학을 네 나라나 할 것이지’라고 천주교를 포교하려는 서양인들을 비난하며, ‘남은 목숨 도생하려고 바삐 도망친다.’라 하여 허둥지둥 철수하는 프랑스 군대를 조롱하고 있다.

이처럼 그가 남긴 단가에는 자신의 기질과 사업, 지향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 본인의 정체성이나, 그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 후기의 문화 실상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판소리의 이론을 정립하다

신재효는 평소 제자들에게 판소리는 우아한 표현의 사설이 기본이 되어야 하고, 음악적 기교 역시 뛰어나야 하며,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연기력도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는 이런 몇 가지 요건만 제대로 갖추면 판소리가 한시문학과 어깨를 겨눌 수 있으리라 단언했다.

판소리 이론가로서 신재효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이 〈광대가〉이다. 여기에서 그는 사상 최초로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제시하고, 이를 반드시 준수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노래에서 이른 바 판소리의 4대 법례를 제시하고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광대 행세 어렵고 또 어렵다.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 치레, 둘째는 사설 치레, 그 직차 득음이요, 그 직차 너름새라. 너름새라 하는 것이 귀성기고 맵시 있고 경각의 천태만상 위선위귀 천변만화 좌상의 풍유호걸 구경하는 노소남녀 울게 하고 웃게 하는 이 귀성 이 맵시가 어찌 아니 어려우며, 득음이라 하는 것은 오음을 분별하고 육률을 변화하여 오장에서 나는 소리 농락하여 자아낼 제 그도 또한 어렵구나.
사설이라 하는 것은 정금미옥 좋은 말로 분명하고 완연하게 색색이 금상첨화 칠보단장 미부인이 병풍 뒤에 나서는 듯 삼오야 발근달이 구름 밖에 나오난 듯 새눈 뜨고 웃게 하기 대단이 어렵구나. 인물은 천생이라 변통할 수 없거니와 원원한 이속판이 소리하는 법례로다.

여기에서 신재효는 판소리를 소리꾼 중심으로 이해하면서 그들이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요건, 즉 ‘인물 치레·사설 치레·득음·너름새’를 제시하고 있다. 판소리 공연이 소리꾼 한 사람에 의해 주도되고, 관객들이 느끼는 희로애락이 그들의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는 점을 중시한 것이다.

그가 제시한 광대의 요건 중에 첫 번째는 인물 치레이다. 그것은 판소리 하는 소리꾼이 잘 생겨야 한다는 뜻이지만, 세부적으로는 소리꾼으로서의 자질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광대로서 사람들 앞에 나설 때 인물이 중요하지만 그것을 만들어주는 것은 좌중을 이끌어가는 자신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시절 소리꾼들은 용모가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남다른 품격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사설 치레이다. 소리꾼은 판소리의 사설을 분명하게 표현함으로써 관객들이 판소리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판소리의 사설은 엄청나게 길고 난해하다. 때문에 이전에 소리꾼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은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신재효는 바로 그런 점을 지적하면서 소리꾼이 정확하고 멋들어지며 그럴 듯한 사설을 구사해야만 서민에서 양반가지 전 계층을 망라하게 된 판소리 관객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 번째는 득음이다. 판소리에서 득음이란 타고난 목청을 가지고 오랜 훈련을 거쳐 마침내 사물이나 사건을 자유자재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경지를 뜻한다.

신재효는 소리꾼이라면 마땅히 오음(五音. 궁·상·각·치·우)을 분별하고 육률(六律. 12율 가운데 양성에 해당하는 태주·고선·황종·이칙·무역·유빈)을 변화시켜 오장육부에서 쏟아져 나오는 소리로 관객들을 농락할 수 있어야 하며, 깨끗하게 정련된 금과 아름다운 옥과 같이 곱디고운 말로서 칠보단을 두른 선녀가 병풍 속에서 나오듯 하거나, 삼오야 밝은 달이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듯 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오늘날에도 소리꾼들은 이런 경지에 이르기 위해 폭포수 아래서 피를 토하면서 목청을 가다듬고 있다. 신재효는 〈광대가〉에서는 이런 득음의 경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진양조는 달아두고 놓아두고 걸리다가 둘치다가, 청청하게 도는 목이 단산의 봉의 울음, 청원하게 뜨는 목이 청천의 학의 울음, 애원성 흐르는 목 황영의 비파 소리, 무수히 농락변화 불시에 튀는 목이 벽력이 부딪는 듯, 음아질타 호령 소리 타산이 흔드는 듯, 어느덧 변화하여 낙목한천 찬바람이 소슬케 부는 소리······.’

광대가 구비해야 할 마지막 요건은 너름새다. 중요도로는 맨 뒤에 있지만 어려움에서는 맨 앞이다. 너름새란 관객들을 웃기고 울리는 가장 중요한 극적 장치이므로 그 ‘맵시’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광대가〉에서는 이 외에도 ‘가객’이란 명칭과 함께 ‘시김새’, ‘조’, ‘장단론’ 등에 대하여 비교적 초기의 이론을 피력함으로써 판소리 역사에 중요한 자료를 제시해준다. 아울러 역대 판소리 명창들의 특징을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의 유명 문인들의 작품 세계와 대비하여 설명한다. 이전의 명창들이 도달했던 판소리의 독자적인 예술성을 한문학의 대가들이 이룩한 문학적 성과에 견주어 품평한 것이다. 이는 그가 판소리의 예술성에 큰 자부심을 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신재효는 그렇듯 난마와 같은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고 법칙을 세웠지만 자신은 소리꾼이 아니었으므로 제자들에게 실기를 보여줄 수 없었다. 그래서 동편제의 명창 김세종을 동시정사의 소리 선생으로 영입하여 함께 이론과 실전이 결합된 판소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동편제 소리는 장단에 충실하고 박자의 변화가 단조로운데 비해 서편제 소리는 잔가락이 많고 박자가 변화무쌍했다. 두 사람은 그렇듯 상이한 동편제와 서편제 소리를 조화롭게 어울린 것이다. 일종의 표준화였다. 이론가 신재효와 실력자 김세종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은 진정한 명창으로 거듭났고, 반가의 연회는 물론 궁중에까지 들어가 실력을 뽐냈다.

여제자에 대한 애틋한 연서 〈도리화가〉

신재효는 음악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지닌 기생이나 무당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소리꾼으로 육성했다. 그들을 위하여 특별히 여창 사설을 쓰기도 했다. 그때까지 남성 예인의 그늘에서 소극적으로 활동하던 여성 예인들을 무대의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관객들에게 색다르고 수준 높은 공연을 선사하는 동시에 고답적이었던 판소리 문화를 남녀가 대등한 차원으로 조화롭게 발전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신재효는 일찍부터 여성의 고운 목소리가 판소리로 실현될 때 또 다른 미적 정서가 발현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선견지명과 창의적인 실험은 진채선이라는 뛰어난 여성 명창을 배출하기에 이른다. 한데 그로 인해 신재효는 권력과 애증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탄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1867년 11월, 신재효는 흥선대원군의 명을 받고 경복궁의 경회루 낙성연에 명창 김세종과 여제자 진채선을 올려 보냈다. 그때 도포 차림에 갓을 쓴 진채선은 흥겨운 몸짓으로 〈방아타령〉과 〈춘향가〉 등을 불러 좌중의 감탄을 자아냈다. 미모에 득음의 경지에 오른 진채선을 보고 한눈에 반한 흥선대원군은 즉시 그녀를 대령기생으로 임명하여 운현궁에 잡아 두었다.

신재효는 그 동안 아끼고 사랑했던 제자 진채선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자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3년 뒤인 1870년(고종 7년)에 이르러 〈도리화가〉라는 사모곡을 지어 진채선에게 보냈다.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돌아오니
귀경 가세. 귀경 가세. 도리화 귀경 가세.
도화는 곱게 붉고 흼도 흴사 오얏꽃이
꽃 가운데 꽃이 피니 그 꽃이 무슨 꽃고.

당시 신재효의 나이 59세, 진채선의 나이 24세였다. ‘도리화’란 ‘붉은 복숭아꽃과 흰 오얏꽃’이니 붉은 복숭아꽃은 젊고 활기찬 진채선을, 흰 오얏꽃은 늙어버린 신재효 자신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었으므로 언뜻 보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같지만 예인들의 분방한 세계에서는 가능했을는지도 모르겠다.

진채선의 입장에서 보면 천민으로서 지방의 가기였던 그녀가 당대의 최고 권력자인 흥선대원군의 대령기생이 되었으니 대단한 영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리화가〉를 통해 스승의 마음을 알게 된 진채선은 대원군 앞에서 〈추풍감별곡〉이란 노래를 불렀고, 그녀의 뜻을 헤아린 대원군이 하향을 허락하자 고창으로 돌아와 신재효를 모셨다고 한다. 일설에는 1873년 고종의 친정 선언으로 실각한 대원군이 양주 땅에 은거하자 그녀 역시 서울을 떠나 김제 땅에 살면서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1876년 나라에 큰 흉년이 들자 신재효는 가산을 풀어 빈민들을 보살폈다. 그러자 2년 뒤인 1878년(고종 15년) 조정에서는 신재효에게 오위장(五衛將)이라는 무관직을 하사했다. 오위장은 중앙군인 오위의 최고 책임자인 종2품 무관직이었지만 조선 후기에 오위를 혁파하면서 정3품으로 격하시켜 이름만 남겨둔 명예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상관으로서 종종 궁궐에 입직하는 벼슬이었으니 일개 호장 출신의 판소리 선생에게는 실로 파격적인 영예였다.

그렇듯 졸지에 중인에서 양반으로 신분이 바뀐 신재효는 1884년(고종 21년) 11월 6일, 73세의 나이로 태어난 집에서 태어난 날짜와 똑같은 날에 세상을 떠났다. 늘그막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고, 평생 품고 있던 신분의 굴레마저 벗어 던졌으니 여한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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