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하륜(河崙)

목눌인 2015. 12. 16. 11:10

하륜(河崙)

하륜은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의 문신으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했고, 즉위 후에는 태종을 보좌하여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공헌했다.
1388년 최영의 요동정벌계획을 극력 반대하다가 양주에 유배당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관직을 회복했다. 그는 이색, 정몽주 등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으나 곧 정치적 변신을 했다. 조선개국 초기에는 정도전과의 불화로 그다지 비중 있는 직책을 맡지 못했다. 정도전 등에 의해 세자책봉에서 밀려나고 병력마저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이방원과 급속히 가까워져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적극 지지했다. 태종의 즉위 직전에 정승 반열에 올라 정국을 주도해가기 시작했고, 태종 즉위 후에는 공신으로 책록되고 신왕조 초기의 문물제도 정비와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 능했다.

본관은 진주.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아버지는 순흥부사 윤린(允潾)이다.

1360년(공민왕 9)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365년 문과에 급제했다. 1367년 춘추관검열 등을 거쳐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 있을 때 신돈(辛旽)의 비행을 공박하다가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좌천되었다. 1371년 안렴사 김주(金湊)가 그의 치적을 제일로 보고하여 고공좌랑(考功佐郞)에 승진되었으며, 그뒤 지평·보문각직제학·대사성 등을 지냈다. 모친상을 치른 후 1382년(우왕 8)부터 우부대언·우대언·밀직제학 등 밀직사 소속의 관직을 역임했다.

1388년 최영(崔瑩)의 요동정벌계획을 극력 반대하다가 양주(楊州)에 유배당했으나, 그해 여름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관직을 회복했다. 1389년(공양왕 1) 봄에는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의 진위(眞僞)사건으로 광주(光州) 등지로 추방되었으나 1390년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자 풀려났다.

1391년에는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었다.

그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권근(權近) 등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다. 그러나 곧 권근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변신을 하여 1393년(태조 2) 경기좌도도관찰출척사가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정도전(鄭道傳)과의 불화로 그다지 비중 있는 직책을 맡지 못했다.

1394년 첨서중추원사가 되었으나 부친상으로 사직했다. 1396년 예문춘추관학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명나라와의 표전시비(表箋是非)로 정도전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조선에서 명에 보낸 외교문서에 명나라를 모욕하는 언사가 있다고 하여 문서 작성자인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명나라측의 강경한 요구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때 그는 정도전을 보낼 것을 주장했으며 1396년에는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다.

이에 정도전의 미움을 사게 되어 1397년 계림부윤으로 좌천되었다. 계림부윤 재직시에도 박자안(朴子安) 사건에 연루됨으로써 수원에 안치(安置)되는 등 정치적 수난을 겪었다. 이에 당시 정도전 등에 의해 세자책봉에서 밀려나고 자신의 병력마저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이방원(李芳遠)과 급속히 가까워져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적극 지지했다.

그 공으로 정종이 즉위한 후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그해 대대적인 관직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정당문학이 되었으며, 이방원의 세자책봉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하여 태종의 즉위 직전에는 정승 반열에 올라 서서히 정국을 주도해가기 시작했다. 1400년(정종 2)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서 관제개편을 주도하고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우정승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해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관제를 개혁했으며,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領司評府事兼判戶曹事)로서 저화(楮貨)를 유통시키게 했다. 1402년(태종 2) 좌정승이 되었으며,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등극을 축하하는 등극사(登極使)로서 명나라에 가 조선 왕조를 승인하는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왔다.

이후 1405년 좌정승 세자사(世子師)가 되고, 다음해에는 중시독권관(重試讀券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명을 뽑았다. 그뒤 영의정부사·좌정승·좌의정을 등을 역임하고 1416년 70세로 치사(致仕)하여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치사 후 왕명으로 함길도 선왕의 능침(陵寢)을 순심(巡審)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문에 능하고 음양·의술·성경(星經)·지리 등에 조예가 깊었으며, 문한(文翰)을 주관하여 〈동국사략〉·〈태조실록〉의 편수에도 참여했다.

신왕조 초기의 한양천도, 문물제도의 정비에 크게 기여했으며 외교정책에 능해 조선 초기 명나라와의 여러 문제를 해결했다. 특히 태종을 보좌하여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문집으로 〈호정집〉이 있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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