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동문학가 이오덕과 권정생

목눌인 2015. 12. 21. 15:45

청빈낙도 淸貧樂道를 실천한 이오덕 선생  

 

                                                                                                                             자료 정리 / 이재한  


우리가 문학을 한다지만 진정한 문학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소개하는 권정생 선생님이나 이오덕 선생님은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무엇이든 귀하게 여긴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청빈낙도를 실천하신 분이다.

인간은 속물적인 근성을 갖고 있어, 자신에게 주어진 부귀영화나 명예를 버리기엔 한계점이 있는지도 모른다. 내 시에 가끔 등장하는, 권정생 선생, 테레사 수녀, 성철 스님, 등 위대한 삶을 살다가 가신 분들이며, 진정 예술에 투혼을 바친 빈센트 반고흐, 박수근 화백, 이중섭 화백, 등은 모두 가난한 삶을 살다가 가신 분들이다. 그 외 많은 분들이 크고 작은 흔적을 남기고 이 땅을 떠났다. 우리는 가끔 언론이나, 텔레비전에서 위대한 분들의 삶을 스쳐 가듯 주워듣지만, 그 분들이 어떤 삶을 살다가 가셨는지 속속들이 알기란 어렵다. 우선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세상이고, 아이들 공부시키기도 버거운 세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짬을 내어 휴식 공간이란 것을 만들어, 내 시집이 지루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선생님들에 대한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지만, 내가 느낀 점은, 역시 인간은 속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분들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늘 작기만 한 내 모습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문득문득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계시는 분들이 이 순간에도 스쳐 지나가고 있다.

나는 이오덕 선생님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숙연해지는 마음 또한 어쩔 수 없는 감동이라 표현하고 싶다.


이오덕 선생님 1925년 경북 청송군 구석들 덕계리에서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선생은 8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누나의 보살핌으로 소학교를 거쳐 영덕공립농업실수학교를 졸업하고 군청 직원에 특채되어 근무를 했다. 최종 학력이 고졸인 선생은 독학으로 교원시험에 합격하여 교사의 길을 걷게 된다. 19세의 나이로 교사가 된 선생은 경상도 일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아이들이 좋아 늘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다던 김용택 시인 역시 이오덕 선생님처럼

교원 시험을 거쳐 교사가 된 경우다. 잠시 빗나간 듯한 이야기지만 나는 김용택 시인을 만나기 위해 전라도에 있는 덕치초등학교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때 김용택 시인은 아이들 이야기를 하면서 무척이나 신이 났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요즘 유명세를 타는 김용택 시인도 이제 정년퇴임을 했고,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는 글을 어느 신문에서 봤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대목이다.


“만약 이오덕이 없었다면 우리 시대의 국어는 어땠을까

이오덕의 국어사용 태도는 아주 분명하다.

그는 일체의 외래어 사용을 반대하며, 번역 문투의 문법과 특히 지식인 특유의 복잡한 문장을 거부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를 '국어 순결주의자'라고 부르며, 그의 원칙주의가 시대착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세기에 가까운 식민 시대와 비정상의 근대화 과정에서 형편없이 훼절 당한 우리의 국어에 그마저 없었다면, 우리의 국어는 또 얼마나 초라해졌을 것인가.

세계 유일의 '발명' 문자인 한글에 대한 자존심마저 흔적 없이 사라진 우리 시대에 그는 모국어의 순수함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인터넷 자료 일부 인용>


 

 

2003년 8월에 타계한 이오덕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유언장을 써 뒀다고 한다.

그 유언장 내용을 보면 피붙이처럼 가까운 지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자신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죽음을 세상 밖으로 알리지 말고, 조문이든 조화든 일절 받지 말며, 장례식도 간소하게 치르라고 당부하셨다 한다. 선생은 살아오면서도 그러했거니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청빈을 실천했으며’ 초지일관 허위 허식을 거부하고 참 선비 정신으로 세상을 살다가 가셨다.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44년 동안 교육자의 길을 걸어왔으며, 42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와, 교감, 교장을 지냈다. 선생은 교직을 떠날 때까지 아이들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것들을 동화나 동시로 표현한 아동문학가다.

선생은 어려운 한자와 외국말로 범벅이 된 우리말을 바로잡으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일을 필사의 사명으로 살다가 가셨다.

선생이 쓴 53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는 우리말에 대한 사랑, 민중의 삶에 대한 관심,

겨레의 장래에 대한 염려로 애 뜻하다.

이오덕 선생님을 이해하려면 선생이 쓴 몇 편의 글을 읽어 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느 신문지상에 소개된 글과 선생님의 수필 한 편을 올려 본다.


▼사람의 앞날이 무섭기만 하다▼


                                     이오덕



닭은 제 새끼 아닌 것도 품건만…

며칠 전 일이다. 벼를 벤다고 해서 한낮이 다 되어 나가 보았다.

10여 전만 해도 온 식구가 나가서 일꾼들과 함께 낫으로 벼를 베고, 묶고, 나르고 하면서 점심은 논바닥에 둘러앉아 따스한 햇볕 아래 메뚜기가 톡톡 튀는 소리를 들으면서 먹었는데, 요즘은 기계가 다 하니 벼를 거두는 논에는 기계를 부릴 사람 하나밖에 없다.

나는 큰아들 정우가 마치 이발사가 머리털을 깎는 것처럼 기계로 논바닥의 벼를 깎아 나가는 것을 높은 언덕에 앉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올해는 여름 중간부터 잇따라 비가 오고 구름이 하늘을 덮어, 가을에 단풍이 들 때까지 해가 난 날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추워져 얼음이 두껍게 얼었다. 그래서 채 여물지도 못한 벼가 그대로 말라서 빛깔도 푸르죽죽하게 되었다.


<개 준다고 병아리 삶는 사람들>

날씨가 해마다 괴상하게 되어 가는데 이대로 가면 몇 해 뒤에는 어찌될까? 그런데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내가 하늘 걱정을 하면 사람들은 '걱정도 팔자’라고 비웃는다.

사람의 목숨 줄이 하늘에 달려 있는데, 그 목숨 줄을 스스로 끊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예언자도 과학자도 아니지만 하늘이 달라졌고 달라져 가는 것을 알고 있다.

벼 베는 기계가 논바닥을 돌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마른 바랭이풀을 깔고 앉아 날씨 걱정을 하고 있는데, 어디서 자꾸 ‘삐악삐악’ 하는 병아리 소리가 들려왔다. 논 위쪽 오리장에 함께 있는 닭이 알을 품는다더니 이제 깨어났구나 싶었다. 이 추위에 어떻게 키우려고 깠나? 그런데 점심때가 되어 기계에서 내려온 정우한테 병아리 걱정을 했더니 뜻밖에도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오늘 아침 논에 왔더니 어디서 병아리 소리가 자꾸 나요. 소리 따라 갔더니 도랑 바닥 풀 속에 병아리가 여러 마리 있는데, 우리 병아리가 아니라요. 그런데 저쪽 언덕 위에서도 병아리 소리가 나서 올라가 봤더니 바로 개 기르는 집에서 병아리를 상자로 사 놨어요.

물어보니 삶아서 개 먹잇감으로 주려고 사 왔다고 해요. 500마리씩 들어 있는 상자를 24상자 샀다니까 모두 1만2000마리지요. 그 병아리 상자를 차에서 내리고 옮기고 할 때 병아리들이 더러 튀어나오고 떨어지고 했겠지요. 그 중에서 벼랑으로 굴러 떨어진 것도 있어서 밤새도록 마른 풀 속에 들어가 죽지 않고 견딘 겁니다.


글쎄 아무리 돈벌이가 좋다지만 어디 이럴 수가 있나 싶어 막 바로 그 개집 주인 젊은이한테 내 생각을 말했더니 대답이 이래요. ‘약한 짐승이 강한 짐승에 잡아먹히는 것은 당연하다고요’. 기가 막혀 더 말을 안 하고 왔어요.”

다음 날 벼를 거두는데 또 나가서 보다가 쉴 참에 기계에서 내려온 정우한테서 어제 그 병아리 뒷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아침 닭장에 갔더니 병아리 두 마리가 죽어 있고, 어미닭은 보이지 않았어요. 너구리가 물고 갔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논으로 가는데 도랑 바닥에 어미닭이 있었어요. 거기서 병아리를 여러 마리 품고 있잖아요. 하, 그놈이 참! 밤중에 닭장에서 제 새낄 품고 있는데, 어디서 자꾸 병아리 우는 소리가 나니까 그만 그 소리나는 데로 가서 도랑 바닥에 울고 있는 양계장 병아리들을 모두 품어 안고 밤을 새운 거지요. 그래서 정작 제 새끼는 영하로 내려간 추위에 얼어 죽었어요. 할 수 없이 어미닭과 그 병아리들을 안고 와서 닭장에 넣어 뒀어요.”


<생명 귀한 줄 모르니 어찌할까>

나는 이 말을 듣고 사람보다 닭이나 개와 같은 짐승들이 얼마나 더 높고 아름다운 자리에 있는가를 새삼 생각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닭둥우리에서 어미닭이 품고 있는 갓 깨어난 병아리를 꺼내어 두 손으로 안아 보고 그 보드랍고 귀여운 모습에 얼마나 놀라고 마음이 사로잡혔는지 모른다. 이 세상에서 생명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만난 것이 그 병아리를 본 순간이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생명이 존엄하다는 것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말만으로는 결코 안 된다. 다만 그것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야 한다.

그런데 병아리를 수백 수천 마리씩 한꺼번에 가마솥에 넣어 끓이는 짓을 예사로 하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물려주겠는가? 사람의 앞날이 무섭기만 하다.


▼이오덕 선생님이 쓰신 수필 한 토막▼


모래를 파러 가는데 옆 도랑 바닥에 뭔가 시커먼 덩어리 같은 것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그 덩어리가 꾸물거린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곧 그것이 올챙이 떼란 것을 알았다. 새까만 두꺼비 올챙이들이 갑자기 물길이 끊겨 버려서 말라가는 도랑 바닥 조금 오목하게 패인 자리마다 모여들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몇 백 마리씩이나 될까? 도랑 바닥은 달아 내리는 햇볕에 금방금방 말라가서 올챙이 떼들은 솥 안에 든 고기처럼  조려들고, 머리도 꼬리도 옴찔하지 못하도록 한 덩어리가 되었다. 아직은 분명 살아 있어 입들을 오물 딱 거리며 기적의 손길을 기다리는 목숨들. 이제 반시간이 더 안가서 이것들은 다시 어떤 모습으로 바뀔 것인가?


못 볼 것을 보았구나 싶어 눈길을 돌리니 둑 너머 저편은 물이 처렁처렁 넘치는 논이다. 그렇다. 나는 곧 가졌던 삽으로 가장 큰 검은 덩어리의 것을 조심조심 떠서 저편 논 가운데로 던져 넣었다. 철벙! 소리와 함께 물속을 꼬리치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들. 아. 우리에게도 이런 구원이 있어지라!

그러나 신(神)을 대행한 내 기적의 삽질은 세 번까지 못가서 지나가는 인족(人族)의 제지를 당했다

"선생님. 거 왜 그럽니껴?"


 마을의 일을 지도하는 임무를 띤 사람이다. 그는 무척 못마땅하다는 표정이다. 나는 올챙이가 죽어가는 것이 가엾어서 살려주고 싶다고 천진스레 말했다.


 "안됩니다. 안 돼요. 개구리 때문에 벼농사 망치는 걸 모릅니까? 안돼요"


 '안됩니다'를 명령하듯이 연달아 내뱉고는 멸시의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 나는 곤충과 식물들이 서로 그 삶을 의지하고 있다는 생태학의 원리를, 가장 진화 발달한 동물에게 설득시킬 자신이 없어 그냥 돌아서야 했다.

두어 시간 뒤에 그 길을 다시 지나오니 도랑  바닥의 올챙이 떼는 간데온데없고  올챙이들이 모여 있던 자리에는 조그만 부스럼닥지 같은 것이 여기저기 보였다.  아주 떡으로 달라붙어 어처구니없는 모양이 된 것이다.

분명히 살아 움직이던 그 무수한 생명들은 어디로 가 버렸는가? 그 아무의 기억 속에도 슬픔 속에도 흔적조차 남김없이. 하늘 향해 구원을 청하는 소리 한 번 내어보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린 목숨들. 생명이란 이토록 허무한 것인가?

 

 

 

충북 충주시 신리면 광월리 산골에 가면 ‘이오덕 학교’ (043-844-6622)가 있다. 이 학교는 아동문학가요, 교육개혁운동가이며 우리말과 얼을 지키고 살리는 일을 하다가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의 정신과 삶을 실천하는 대안학교다.

 


 

 


 

▼이오덕 선생과 권정생 선생의 만남▼


2003년 8월에 이오덕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조문객도 곡도 없는 빈소에서, 그는 혼자 웃고 있었다.

조문객을 받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긴 이오덕 선생은 이미 죽기 전, 자신의 장례를 홀로 치렀다. 장례가 다 끝나고 난 후에 띄우라던 부고장, 무덤에 세울 비석까지 그는 스스로 모든 것을 준비하고 떠났다. 그런 그가 자신의 무덤 곁에 권정생의 시비 하나를 세워주길 원했다. 그는 죽어서까지 권정생 선생을 곁에 두고 싶어 한 것이다.

시비 하나에는 권정생 선생의〈밭 한 뙈기>를 넣고, 또 다른 하나에 자신의 시〈새와 산을 넣도록 했다. 충주에 있는 이 씨의 무덤가에는 지금 고인의 바람대로 두 시비가 마주 보고 서 있다.


1972년 가을, 당시 중견 아동문학가로 주목받기 시작하던 이오덕 선생은 무명작가 한 사람을 찾아간다. 조그만 기독교 잡지에 실린 <강아지 똥>이라는 짧은 동화를 읽고 난 직후였다. 글을 쓴 권정생은 조그만 산골 교회의 종지기였다.

권정생은 한 해 총수입이 5천 원에 불과할 정도의 가난과 전신 결핵의 고통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12살. 그러나 이오덕 선생은  권정생에게서 한국 아동문학 희망을 봤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편지가 시작됐다. 그 속에서 이오덕 선생은 가난한 무명작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권정생은 글이 써지는 대로 이오덕 선생에게 보냈다. 권정생이라는 작가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오덕 선생과 권정생 선생 두 사람은 30년간 편지를 주고받았다

무명의 동화작가와, 중견 동화작가가 만나 주고받은 30년간의 편지.

그것은 이오덕 선생이 세상에 남겨놓은 가장 아름다운 유산이었다.




권정생 선생이 이오덕 선생께 보낸 편지


이오덕 선생님

여름이 이렇게 쉽사리 다가와 버렸습니다.

지루하다 생각했던 요양원 생활이 너무 빠르게 지나갑니다. 정비오 씨가 보내 준 원고료

십만 원 잘 받았습니다. 윤일숙 씨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아 제가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곳 요양원에서 제가 가장 깊이 느낀 것은 인간은 누구나 다 한 형제라는 것을 재확인했습니다. 한 솥 밥을 먹으며 함께 자고 일어나는 환자들의 생활이야 말로 그대로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보호하는 길, 그리고 인간이 고루고루 잘 살려면 많이 벌어 남을 돕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이 적게 가지는 길이 가장 현명한 짓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앉아서 함께 먹는 식탁은 네 사람입니다. 한가운데 놓인 반찬을 서로 아기면서 먹다 보면 언제나 남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남는 반찬은 '똘래'라는 개가 먹습니다. 필요 이외의 것은 절대 가지지 않을 때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이 없어질 것입니다.

각 곳에서 모여든 환자들의 형편은 전에 뵙고 말씀드렸지만, 거의가 빼앗기면서 생활한 밑바닥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생활을 유지해 가려면 많이 갖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각 사람의 마음 깊이 새겨져야 할 것입니다.


과잉 생산이란 과잉 소유욕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 절대 고루고루 잘 살기 위한 방법은 아닙니다. 인간이 도대체 '생산'을 한다는 것이 잘못된 말일 것입니다. 생산은 언제까지나 자연이 만들어낸 소산이며 인간이 다만 수확을 하는 것뿐입니다. 이 수확의 공정성에서 벗어나 많이 갖게 되면 그것은 도둑이며 강도가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많이 가져도 된다는 권리는 누가 베풀어 준 것입니까? 하느님이 이 지구를 한 자리에 고정시키지 않고 움직여 돌게 한 것은 고루고루 가지게 하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자연을 파괴하는 요인이 바로 많이 갖는 과잉 소유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한 그릇 이상의 밥을 먹으면 다른 한 사람의 몫은 그만큼 줄어드는 것입니다. 내가 넓은 토지를 소유할 때, 내가 큰 집을 가지게 될 때, 내 이웃은 그만큼 좁은 곳으로 쫓겨나야 하는 것입니다. 생산이라는 것, 소유라는 것, 그리고 내 것을 나눠준다는 자선이란 말들이 쓸데없는 빈말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면서 살아온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가진 것을 '준다'하지 말고 '되돌려 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생산한다는 말은 아예 버리고 '받는다.'는 말이 옳겠지요. 우리 자신이 햇빛을, 공기를, 물을 생산한다는 사람은 미친 사람일 것입니다.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하늘과 바람과 세계입니다. 절대 천 원짜리 지폐나 하나의 손가방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인간 스스로가 만든 것이지 하느님의 잘못은 절대 아닙니다.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니 제대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대구 오시거든 꼭 들러 주십시오.

그럼 안녕히!


                                                  1979년 6월 5일

                                                    권정생 올림      

 

 

 

이오덕(1925〜2003)

1925년 경북 청송군 현서면 덕계동(구석들)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서 화목소학교와 화목교회에도 다녔다. 영덕공립농업실수학교를 나와 열아홉 살에 경북 부동공립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해 1986년까지 마흔두 해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다. 

스물아홉 살이던 1954년에 이원수를 만났고, 다음 해에 <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를 발표하며 아동문학가로 첫발을 내딛었다.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읽히기 위해 아동문학 평론을 하기 시작했고, 1976년 ‘부정의 동시’ 평론으로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

이오덕은 1973년 1월 18일에 아동문학가 권정생을 찾아갔다. 어른, 아이 모두 권정생의 작품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 권정생을 세상에 알렸고 평생을 권정생과 마음을 나누는 동무로 지냈다.


권정생(1937〜2007)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1946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외가인 화목국민학교에 잠시다녔다.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안동 일직에 터를 잡고 평생을 조탑 마을에서 지냈다. 전쟁과 가난으로 스무 살에 결핵에 걸려 홀로 아프게 살았다. 

1969년 ‘강아지 똥’으로 등단했고,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무명 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었다. 이 작품이 신문에 실리고 며칠 뒤 이오덕이 찾아왔다. 권정생은 이오덕을 만난 뒤 “선생님을 뵙고부터 2, 3개월마다 한 번씩 찾아 주시는 것으로 사람 사이의 고독만은 해소될 수 있었습니다”고 했다. 이오덕의 정성으로 권정생의 동화가 출판되기 시작했고 권정생은 죽을힘을 다해 동화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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