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강감찬(姜邯贊)

목눌인 2016. 2. 1. 13:16

강감찬(姜邯贊)

귀주대첩으로 고려를 구하다                      

                        

고려를 지킨 명장, 강감찬

우리 역사에서 '3대 대첩(大捷)'을 꼽는다면, 두말 할 것도 없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이순신의 한산대첩(閑山大捷), 그리고 강감찬(姜邯贊)의 귀주대첩(龜州大捷)을 든다. 그중 고려 시대 거란의 수십만 대군을 맞아 귀주에서 섬멸한 귀주대첩을 이끈 장군이 바로 강감찬이다.

강감찬은 948년(정종 3)에 태어났다. 그의 탄생과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한 사신(使臣)이 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오는데 큰 별이 어떤 집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가 사람을 보내 찾아보니 마침 그집 부인이 사내를 낳았다. 그가 바로 강감찬이었다고 한다. 강감찬의 어릴 때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강감찬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할 때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된 강궁진(姜弓珍)이다. 《고려사》에는 강감찬이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신통한 지략이 많았다고 전한다.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사실 때문에 강감찬을 무인으로 알기 쉽지만, 사실 강감찬은 문관이었다. 983년(성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복시(覆試)에서 갑과에 장원한 뒤 관직에 오른 후 예부시랑·국자제주(國子祭酒)·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이부상서를 역임했다.

1010년(현종 1), 거란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두 번째로 고려를 침략했다. 우여곡절 끝에 등극한 현종은 전쟁에 미처 대비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고려군은 속수무책으로 패전을 거듭했다. 이때 강감찬은 장수로 나서지는 않았으나 왕에게 끝까지 항복하지 말 것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왕이 피신한 사이 다행히 양규(楊規)가 무공을 크게 세워 거란을 물리쳤다. 그러나 거란은 1018년(현종 9)에 또다시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강감찬이 나섰다. 강감찬은 흥화진(興化鎭)과 귀주(龜州)에서 뛰어난 전략과 기지로 거란군을 대파하고 승리했다. 고려는 안정을 되찾아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거란의 침략과 고려의 대응

거란은 4세기 이래 동몽골을 중심으로 활동한 유목민족이다. 중국 당나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916년(신덕왕 5)에 요(遼)나라를 세운 뒤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중국 대륙 전체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던 거란에게 고려의 북진 정책은 걸림돌이었다. 게다가 고려는 거란과의 외교를 단절한 채 송나라와 친교관계를 유지했다. 거란은 번번이 다른 이유를 내세웠지만,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한 배경은 결국 이것이었다.

거란의 1차 침입은 993년(성종 12)에 있었다. 고려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점령하고 있으며, 거란과 수교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거란 장수 소손녕이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서경을 위협했다. 이때 나선 이가 서희(徐熙)였다. 서희는 소손녕의 진영으로 찾아가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기 때문에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또한 거란과 국교를 맺지 못하는 것은 여진족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득했다. 소손녕은 서희의 말에 동조하고 물러갔다. 이후 고려는 거란과 화의를 맺었다. 또한 서희가 앞장서 압록강 동쪽에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강동 6주에 성을 구축하였다.

거란의 2차 침입은 1010년(현종 1) 11월에 있었다. 거란의 왕 성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내려왔다. 속내는 여전히 고려가 친송 정책을 펴면서 거란을 멀리 했기 때문이었지만, 거란이 내놓은 명목상 침략의 이유는 '목종 폐립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목종 폐립 사건이란 무엇인가? 고려 7대 왕 목종은 경종의 아들이자 성종의 조카였다. 경종이 사망할 당시 목종은 불과 2살이라는 어린 나이였다. 그래서 태조의 손자이면서 목종에게는 외삼촌이 되는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성종에게는 딸만 둘 있을 뿐 아들이 없어 경종의 아들 목종이 다시 왕위를 잇게 되었다. 12년간 재위한 목종은 병약하여 후사를 두지 못했다. 이때 왕위를 이을 왕족이라고는 태조의 아들인 왕욱(王郁)과 경종의 제4비이자 성종의 동생인 헌정왕후 사이에서 불륜으로 태어난 왕순(王詢)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종의 제3비이자 헌정왕후의 언니인 헌애왕후가 왕순을 몰아내고 정부 김치양(金致陽)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릴 음모를 꾸몄다. 그러자 서경 도순검사로 있던 강조(康兆)가 군사를 이끌고 개경에 입성해 목종을 끌어내리고 왕순을 왕으로 세웠다. 그가 바로 현종이다. 그런데 거란에서 이 사건을 문제 삼은 것이다.

거란은 목종 폐립에 앞장섰던 강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고려는 이를 거부하고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삼아 통주(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에 나가 싸우게 했다. 그러나 강조는 대패하고 거란의 포로로 잡혀 죽었다. 거란은 여세를 몰아 남진해 서경을 무너뜨리고 개경으로 진군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놀란 조정 대신들은 현종에게 항복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강감찬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오늘의 사변을 발생시킨 죄는 강조에게 있으니 걱정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힘에 겨운 전쟁이니 마땅히 적의 예봉을 피하였다가 천천히 회복할 방도를 강구합시다."

현종은 강감찬의 권고를 받아들여 신하들과 함께 나주로 피신했다. 그사이 거란군은 계속해서 밀고 내려왔다. 결국 현종은 경기도 광주에서 공주를 거쳐 나주에까지 이르렀다. 그때 고려군을 이끈 것은 양규(楊規)였다. 양규는 곽주(郭州) 등에서 거란을 크게 무찌르며 선전했다. 그러자 강행군으로 지친 거란군은 전투의지를 잃고 1011년(현종 2) 정월에 퇴각했다. 거란의 2차 침입은 이렇게 일단 끝을 맺었다.

물길을 막아 적을 섬멸한 흥화진 전투

거란이 2차 침입 당시 퇴각하면서 내건 화의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고려 왕이 거란으로 입조하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강동 6주를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종은 병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거란에 가지 않았고, 강동 6주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러자 거란은 강동 6주를 강제로 빼앗겠다며 국경에서 소규모 전투를 일삼았다. 그러다가 1018년(현종 9)에 소배압(簫排押)을 대장으로 하는 10만 대군을 동원해 다시 대대적으로 침략했다. 거란의 3차 침입이었다.

이때 고려의 상황은 거란의 2차 침입 때와는 달랐다. 고려 조정은 거란의 2차 침입 이후 전후 회복에 노력하는 한편, 국방의 수비를 한층 강화했다. 또 여러 차례 국지전을 치르면서 거란이 다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할 것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양성했다. 현종은 20만 대군을 이끌 상원수로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있던 강감찬을 임명했다.

강감찬은 거란군을 맞아 부원수 강민첨(姜民瞻)과 함께 곳곳에서 승전보를 울렸다. 특히 흥화진(興化鎭,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일대) 전투에서 돋보이는 전략과 전술로 큰 승리를 이루었다. 강감찬은 병력을 이끌고 흥화진에 도착한 뒤 그곳의 지형을 유심히 살폈다. 산은 험하고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강이 흘렀다. 강감찬은 강민첨에게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강을 막고, 기병 1만 2천 명을 선발해 산중에 매복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거란군이 강에 이르러 건너기 시작하자 소가죽을 묶었던 밧줄을 끊어내고 일시에 강물을 흘려보냈다.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런 공격으로 많은 거란군이 물에 휩쓸려 갔다. 또한 매복해 있던 고려군이 강물을 헤엄쳐 도망치는 거란군을 무찔렀다. 당시 70세였던 강감찬의 노련한 기지가 돋보이는 대승리였다.

귀주대첩으로 승리에 쐐기를 박다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은 흥화진에서 크게 패하고도 진군을 멈추지 않고 개경으로 향했다. 강감찬은 강민첨으로 하여금 군을 이끌고 거란군을 추격하게 했다. 강민첨은 자주(慈州, 지금의 자산군) 내구산(來口山)에서 적을 크게 격파했다. 또한 시랑 조원(趙元)은 마탄(馬灘, 예성강 상류 지역)에서 적을 습격해 1만여 명을 사살했다. 하지만 소배압은 굴하지 않고 군을 재정비해 1019년(현종 10) 정월에 다시 개경을 향해 진군했다. 강감찬은 미리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에게 군대 1만 명을 주어 개경을 방어하도록 했다. 그리고 거란군의 개경 입성에 대비해 개경 근처의 작물을 미리 거두게 하고 백성들을 성 안으로 피난시켰다.

먼 길을 진군한 거란군이 개경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게다가 마을이 비어 군량미를 구할 수가 없자 소배압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강감찬이 노린 것은 바로 회군하는 거란군이었다. 강감찬은 거란군의 퇴로 곳곳에 군을 매복시켜 두었다가 급습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귀주에서 거란군과 고려군이 전면적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귀주는 압록강 이남 청천강 이북에 있는 강동 6주의 하나였다. 뒤쫓는 고려군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지만, 거란군 역시 물러날 길 없는 막판 전투였다. 그렇기 때문에 양 군의 대치는 쉽사리 승부를 보지 못한 채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김종현의 부대가 도착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또 때마침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어 닥쳤다. 남쪽에 진을 친 고려군이 기세를 올려 맹렬히 공격하니 거란군은 정신없이 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강감찬은 추격을 명했다. 그리하여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는 중간에 적들의 시체가 들에 널렸다. 생포한 인원과 노획한 말, 낙타, 갑옷과 투구 같은 병기들이 수없이 많았다. 살아 돌아간 적병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거란군은 지금까지 그토록 비참한 패배를 당해 본 예가 없었다.

거란 왕 성종은 간신히 살아 돌아간 소배압을 관직에서 쫓아냈다.

"네가 적을 얕잡아 보고 경솔하게 깊이 들어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낯으로 나를 대하려는가? 내가 너의 얼굴 가죽을 벗긴 후에 죽이겠노라."

귀주대첩의 역사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고려 부흥의 밑거름이 되다

강감찬이 거란군을 거의 섬멸했다는 보고를 받은 현종은 몹시 기뻐했다. 왕위에 오르고 두 번이나 거란으로부터 대규모 침략을 받은 터에 얻는 귀한 승전보였기 때문이었다. 강감찬이 개선했을 때의 모습을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강감찬이 3군을 거느리고 개선해 포로와 노획 물자를 바치니 왕이 친히 영파역(迎波驛)까지 나가서 맞이하는데 채붕(綵棚)을 맺고 풍악을 치며 장병들을 위해 연회를 배설했다. 왕이 금으로 만든 여덟 가지의 꽃을 손수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 준 후 왼손으로는 강감찬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축배를 들어 그를 위로하고 찬양해 마지않으니 강감찬은 분에 넘치는 우대에 감당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사의를 표시했다. - 《고려사》 권 94, 〈열전〉 제7, 강감찬

이뿐만이 아니었다. 현종은 개선을 기념하여 역(驛)의 이름을 흥의(興義)로 고치고, 역리들에게 특별히 주(州)와 현(縣)의 아전들이 쓰는 것과 같은 갓과 띠를 주었다.

강감찬이 표문을 올려 고희의 나이를 이유로 은퇴를 청했지만, 현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궤장(几杖)을 내리며 사흘에 한 번씩만 출근하도록 했다. 또한 서경유수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西京留守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로 임명하고 그 임명장에 현종이 친필로 다음과 같이 그의 공적을 특기했다.

경술년 중에 오랑캐의 무리가 우리나라 한강(漢江) 연안까지 깊이 침입한 전란이 있었다. 그때 만약 강공의 전략을 채용하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모두 호북(左袵)을 입을 뻔했다. - 《고려사》 권 94, 〈열전〉 제7, 강감찬

하지만 강감찬은 왕의 이런 예우와 찬양에도 흔들리지 않고 전쟁을 마친 장군으로서의 의무를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북방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개성 외곽에 성곽을 쌓을 것을 주장하고 이를 관철시켰다. 1030년(현종 21)에는 고려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에 임명되기도 했던 강감찬은 1032년(덕종 1) 84세로 생을 마감했다.

고려는 10만의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의 귀주대첩 이후 대외적으로 위상을 인정받아 거란과 화친을 맺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진이나 말갈 등의 변방 세력과도 균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또한 국방의 안녕을 바탕으로 내적으로도 안정적인 발전을 꾀할 수 있었다. 이것이 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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