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윤동주(尹東柱)

목눌인 2016. 3. 6. 21:16

윤동주(尹東柱)                     

1.시인을 꿈꾸던 시절                        

2.동주와 몽규, 같고도 다른 길                        

3.관념의 세계에서 순수의 세계로                        
4.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5.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리라                        
6.치안유지법의 제물이 되다                        
7.죽음의 길, 새로운 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 그의 생애는 짧았지만 음울하고 가혹한 시대 상황 속에서 반드시 여명은 오리라 믿고 써내려간 주옥같은 시어들은 오늘날까지 해맑은 영혼의 징표로 남아 있다.

최근 학계 일각에서는 윤동주를 ‘일제 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생전에 그는 유명 시인도 아니었고 독립투쟁의 목소리를 높이던 열혈청년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100여 편의 시는 진실한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순수하고 참다운 인간의 본성을 되새기게 함으로써 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윤동주 원출처

시인을 꿈꾸던 시절

윤동주와 친구들

뒷줄 왼쪽 장준하, 가운데 문익환, 오른쪽 윤동주, 앞줄 가운데 정일권

원출처

윤동주(尹東柱)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명동학교 교원이었던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 아명은 해환(海煥)이다. 그가 태어나기 석 달 전이었던 9월 28일, 친정에서 살던 고모 윤신영이 아들 송몽규를 낳았다. 고종사촌 관계인 윤동주와 송몽규는 그렇듯 한집에서 태어나 후일 죽음에 이르기까지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윤동주는 간도 이주민 3세였다. 19세기 말 청나라의 봉금정책이 풀리고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기아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너도 나도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터전을 옮겼다. 1886년 함경북도 종성에 살던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도 간도의 자동으로 이사했고, 1900년에는 기독교 장로였던 할아버지 윤하현에 의해 명동촌으로 재차 이사했다.

1906년 10월 애국지사 이상설과 이동녕이 용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웠다. 북간도 최초의 근대식 민족교육기관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4월 이상설이 용정을 떠나며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이 명동에 명동서숙을 세운 다음 수많은 애국지사를 길러냈다. 명동서숙은 1908년 4월 명동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윤동주는 1925년 4월 4일 송몽규와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친구 문익환 목사와 당숙 윤영선, 외사촌 김정우 등도 같은 학교를 다녔다. 비교적 가정이 유복했던 그는 소학교 4학년 때부터 경성에서 간행하던 《어린이》, 《아이생활》을 구독하면서 문학의 꿈을 키웠고, 5학년 때 급우들과 함께 《새명동》이란 등사잡지를 만드는 등 활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소년기의 윤동주는 내성적이면서도 의연했고 씩씩했다. 재봉틀로 해진 교복을 직접 고쳐 입었고 항상 책 속에 파묻혀 살면서 창작에 몰두했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인근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중국인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공부했다. 그의 시 〈별 헤는 밤〉에 나오는 패(佩), 옥(玉), 경(鏡)과 같은 이름을 가진 소녀들을 만났을 것으로 추측되는 시기다.

이듬해인 1932년에 그는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명동 북쪽의 소도시 용정(龍井)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그의 집도 용정으로 이사했다. 은진중학교 재학 시절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문예지를 만들고 축구선수로 활약했으며, 교내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라는 화제로 참가하여 1등을 하는 등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였다.

동주와 몽규, 같고도 다른 길

윤동주와 친구들

앞줄 중앙 송몽규, 뒷줄 오른쪽 윤동주

원출처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윤동주는 1934년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작품을 쓰면서 시인의 꿈을 꾸었다. 그런데 1935년 1월 1일 송몽규가 송한범이란 아명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꽁트 〈술가락〉이 당선되었다.

송몽규는 그렇듯 한발 앞서 문단에 데뷔했지만 문학에 연연하지 않았다. 은진중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애국지사 명희조 선생의 영향을 받아 식민지 조국의 현실에 비분강개하던 그는 3학년을 마치자마자 중국 남경으로 가서 백범 김구가 운영하던 낙양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했던 것이다.

윤동주는 그해 9월 1일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자마자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에 편입했다. 친구 문익환은 이미 한 학기 전에 숭실중학교 4학년으로 전학한 상태였다.

그때부터 윤동주는 숭실중학교의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문학에 대한 꿈을 이어나갔다. 그해 10월에는 숭실중학교 YMCA 문예부에서 발간하던 《숭실활천》 제15호에 시 〈공상〉을 게재했다. 그의 시가 처음으로 활자화된 것이었다.

20세 때인 1936년 3월 숭실중학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면서 폐교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5년제인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다. 이때 문익환과 장준하가 같은 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훗날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도 이 학교에서 만났다.

한편 남경의 낙양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송몽규가 중국 정부의 지원이 끊어지면서 제남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가 4월경 일경에 체포되어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로 끌려왔다. 그때부터 2개월 동안 경찰에게 취조를 받은 송몽규는 8월 청진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가 거주제한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는 과감하게 용정으로 돌아와 외가인 윤동주의 집에 머물면서 대성중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관념의 세계에서 순수의 세계로

그 무렵 윤동주의 시 세계는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화려하고 조숙한 낱말을 이용하여 관념적으로 그려내던 그의 시가 누가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소박하고 순수한 표현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것은 용정의 외가에 온 동요시인 강소천을 만난 습작에 대한 조언과 함께 1935년 시문학사에서 발간된 《정지용 시집》을 탐독한 영향이 컸다.

1936년 11월부터 윤동주는 연길에서 발행되던 어린이 잡지 《카톨릭소년》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를 발표했고, 1937년에도 〈오줌싸개지도〉, 〈무얼 먹고 사나〉, 〈거짓부리〉 등을 실었다. 이때 그는 ‘동주(童柱)’와 ‘동주(童舟)’란 두 가지 필명을 사용했다. 9월에는 수학여행으로 금강산과 원산 송도원해수욕장을 다녀온 뒤 〈바다〉, 〈비로봉〉 두 편의 시를 썼다.

광명중학교 5학년 2학기가 되면서 온순하고 다정다감했던 윤동주가 대학 진학 문제로 아버지와 심한 불화를 겪었다. 그는 문과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의대를 강권하면서 벌어진 사달이었다. 몇 달 동안 두 사람은 단식투쟁에 밥상을 엎는 등 격렬한 상황을 빚어냈다. 다행히 할아버지 윤하현이 개입하면서 결과는 윤동주의 바람대로 되었다. 그 무렵 송몽규도 문과대학을 지망했는데, 그의 아버지 송창의는 아이들을 부모 욕심대로 키우면 안 된다면서 선선히 동의해 주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윤동주와 송몽규는 1938년 초봄에 나란히 서울에 가서 연희전문 문과 입학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북간도 전체에서 연전 문과 입학생은 그들 두 사람뿐이었다.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에 들어간 그는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한방을 썼다. 원산 출신의 수재였던 강처중은 영어에 능통해서 문과 동기생들 가운데 1,2등을 다투어 영어도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매사에 적극적이었던 강처중과 윤동주의 끈끈한 우정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일제 치하였지만 연전은 기독교계 학교였으므로 두 사람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연전 재학 시절 윤동주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도서관 촉탁으로 일하고 있던 외솔 최현배 선생으로부터 조선어를 배웠고, 영문과 이양하 교수에게 영시를 배웠다. 여름방학 때면 고향 용정의 북부감리교회 하계 아동성경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문학에 대한 열정도 한결같았다. 23세 때인 1939년 그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 시 〈유언〉, 〈아우의 인상화〉 등을 기고했고, 《소년》 지에 동시 〈산울림〉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소년》 편집인 윤석중을 만나 생전 처음 원고료도 받았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윤동주가 24세 때인 1940년 4월 광명학교 중학부 후배인 장덕순이 연전 문과에 입학했고, 경남 하동 출신의 정병욱까지 가세하여 교분을 맺었다. 윤동주는 정병욱의 2년 선배였고 나이도 다섯 살이나 많았지만 매우 친하게 지냈다. 정병욱은 훗날 윤동주의 필사본 《바람과 구름과 별과 시》를 보관했다가 유족들에게 전했고,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의 시가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도록 노력하는 등 윤동주를 알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다.

1941년 4학년 때 윤동주는 장덕순과 함께 신촌에서 하숙하다가 기숙사에 복귀한 뒤 다시 정병욱과 함께 누상동 마루터기 하숙집,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의 집, 북아현동의 전문 하숙집 등지를 전전했다. 그 무렵 친구 라사행과 함께 인근에 살고 있던 시인 정지용을 찾아가 시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 그 때문에 전시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그 동안 쓴 19편의 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표제로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다. 한데 이양하 교수가 〈슬픈 족속〉, 〈십자가〉 등의 작품이 시국이 하수상한 이때에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힘들 테니 출간을 보류하라고 충고했다. 그러자 윤동주는 아쉽지만 출간을 포기하고 3권을 필사하여 이양하 교수와 정병욱에게 각각 1부씩 증정했다.

이윽고 전쟁물자 동원령이 내려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연이 자욱한 전장으로 끌려갔다. 그 때문에 윤동주는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고뇌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집안 어른들은 그의 일본유학을 결정하고 성씨를 히라누마(平沼)로 바꾸었다. 송몽규의 집안 역시 소오우라(宋村)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 송몽규는 소오무라 무게이(宋村夢奎)가 되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리라

도쿄 릿쿄대에 전시된 윤동주 '서시'

1942년 4월 2일 윤동주는 도쿄에 있는 릿교(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했다. 함께 현해탄을 건너온 송몽규는 4월 1일 교토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했다. 애초에 윤동주도 교토대학을 지망했지만 송몽규만 합격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잠시 도쿄의 한인YMCA 숙소에 머물다 헤어졌다.

1942년 1월 19일, 윤동주는 유학 수속을 위해 연희전문학교에 창씨계(創氏屆)를 제출했다. 그 때의 굴욕감은 나흘 뒤인 1월 24일에 쓴 〈참회록〉으로 씌어진다. 그가 이 땅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었다. 윤동주의 창씨개명 사실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밝혀졌다.

그때부터 윤동주는 다카다노바바역 근처에서 동문인 백인준과 함께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서울에 있던 친구 강처중에게 보낸 편지 속에 〈쉽게 씌어진 시〉 등 5편의 작품이 담겨있다.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면서도 그는 시인으로서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결코 절망하지 않고 펜을 들었던 것이다.

비 내리는 도쿄의 밤에 다다미가 깔린 하숙방에서 홀로 고향을 그리워하며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자괴하던 그의 소망은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해 7월 방학을 맞아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일제의 발악을 예상했던 듯 동생들에게 우리 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테니 무엇이라도 사모으라고 당부했다. 불과 보름 남짓 고향에서 시간을 보내고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10월 1일 사립 기독교계 학교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로 전학했다. 교토제국대학에 다니던 송몽규와 재회할 수 있었다.

당시 두 사람은 도보로 5분 거리의 하숙집에 살았다. 그것은 일면 윤동주가 낙양군관학교 입학 이래 요시찰인물이었던 송몽규의 우산 속으로 걸어 들어간 셈이었다. 그때부터 윤동주 역시 일경의 감시망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치안유지법의 제물이 되다

도시샤대학은 그가 가장 좋아하던 시인 정지용이 저명한 민예운동가이자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구자였던 야나기 무네요시로부터 영문학을 배운 학교다. 야나기 교수는 조선의 전통공예를 일본에 소개하는 한편 조선 지배를 강화하는 일본을 통렬히 비판하고, 조선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했던 인물이다. 정지용은 이 학교 재학 중 〈압천〉, 〈향수〉, 〈카페 프란스〉 등 빼어난 시 20여 편을 썼다. 이런 연관 관계가 천상 시인일 수밖에 없었던 윤동주의 대학 선택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1943년 3월 1일, 일제가 징병제를 공포하고 학병제를 실시하면서 윤동주와 송몽규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혔었다. 전황은 악화일로인 가운데 치안유지법에 의거한 일제의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다. 1941년 5월 15일 실시된 개정 치안유지법은 한층 엄격해지면서 ‘준비행위’를 했다고 판단되면 검거가 가능했다. 사실상 누구라도 범죄자로 만들 수 있는 악법이었다.

과연 여름방학 중이었던 그해 7월 10일 송몽규가 함께 하숙하던 제3고등학교 3학년생 고희욱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어 시모가모(下鴨)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어서 7월 14일 귀향을 준비하던 윤동주 역시 같은 혐의로 하숙집에서 체포되어 시모가모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이듬해인 1944년 1월 19일 고희욱은 기소유예의 처분을 받고 풀려났지만 2월 22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정식으로 기소되었다.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은 판결문에서 개정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독립운동)의 혐의로 윤동주에게 징역 2년을 언도하면서 이렇게 썼다.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의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

송몽규 역시 같은 혐의로 4월 13일 2년형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나란히 규슈 동쪽에 있던 후쿠오카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죽음의 길, 새로운 길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5년 2월, 그의 고향집에 갑자기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란 전보가 배달되어 가족들을 경악하게 했다. 아버지와 당숙 윤영춘이 일본으로 건너가고 있는 사이에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 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이라는 요지의 우편통지서가 고향에 배달되었다. 그처럼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위독 소식이 날아왔다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상황이었다.

그 사실도 모른 채 후쿠오카형무소에 다다른 아버지와 당숙은 우선 살아있는 송몽규를 면회했다. 그런데 초췌한 몰골의 송몽규는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이 증언 때문에 두 사람이 일제로부터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추측을 낳았다.

후쿠오카형무소 측은 가족들에게 윤동주의 운명시각이 오전 3시 36분임을 통보했다. 그때 일본인 간수가 “동주 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 소리를 외치고 운명했습니다.”라고 전해주었다. 윤동주의 시신은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에서 방부제 처리를 해두었으므로 생시와 똑같았다.

윤동주의 장례식은 3월 6일 용정중앙감리교회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치러졌고, 《문우》에 발표했던 그의 시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송되었다. 그로부터 하루 뒤인 3월 7일 형무소에 남아있던 송몽규가 옥중에서 사망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승과 저승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해 단오 무렵 가족들은 묘소에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고 새긴 비석을 세워 그를 기렸고, 반 년 뒤 일제는 패망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
윤동주의 육필원고

윤동주 사후 2년이 지난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정지용의 소개문과 함께 〈쉽게 씌어진 시〉가 발표되었다. 경향신문 기자로 재직하고 있던 친구 강처중의 노력 덕택이었다. 그는 이듬해인 1948년 1월 30일,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자선시집 19편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윤동주의 유품 속에 있던 12편을 합친 31편을 모아 초간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출간했다. 이 뜻 깊은 시집의 서문에서 정지용은 이렇게 썼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적이 없이!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알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강처중은 발문에서 또 이렇게 썼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굳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 하는 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 온순하였건만,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를 않았다.”

그해 12월 용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누이 윤혜원이 윤동주의 중학 시절의 육필원고와 스크랩, 사진 등을 들고 남편 오형범과 함께 서울로 이주했다. 그 결과 1955년 2월, 윤동주 사망 10주기 기념으로 유고를 보완,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음사에서 다시 간행되었고, 이후에도 수차례 개정증보를 거듭했다.

1977년 10월, 일제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에서 발행한 극비문서 〈특고월보(特高月報)〉 1943년 12월분에 실린 윤동주, 송몽규의 심문 기록 〈재경 조선인 학생민족주의 그룹사건 책동 개요〉가 입수되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두 사람의 투옥 혐의가 밝혀졌다. 또 2년 뒤인 1979년 1월에는 일제 사법성 형사국 발행의 극비문서인 〈사상월보(思想月報)〉 제109호 1944년 4~6월분에 실린 송몽규에 대한 판결문과 관련자 처분결과 일람표를 통해 윤동주와 송몽규의 형량이 알려졌고, 두 사람의 혐의가 ‘독립운동’이었음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1982년 8월에는 교토지방재판소의 판결문 사본이 입수되면서 두 사람의 옥사에 관련된 전모가 완전히 밝혀졌다. 그에 따라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윤동주에게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004년 송몽규의 조카인 작가 송우혜가 시인의 생애와 작품을 온전하게 복원하고 의미를 새긴 《윤동주 평전》(푸른역사)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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