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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목눌인 2015. 10. 7. 10:54

정도전 

 

정도전(鄭道傳, 1342~98) 하면 흔히 반란을 일으키거나 역적 노릇을 한 사람쯤으로 알고 있다. 방원(芳遠, 뒤의 태종)이 아우로부터 왕의 자리를 빼앗는 과정에서 장애인물인 정도전을 제거하고 나서 그에게 온갖 혐의를 덮어씌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도전을 아주 막돼먹은 인물로 역사에 기록했던 것이다. 또 한편, 조선조 건국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정도전은 두 임금을 섬긴 변절자로 낙인 찍으면서 자기들 손으로 죽인 정몽주는 충신으로 내세웠다각주[1] . 이런 이율배반의 논리가 어떻게 성립될 수 있었을까?

선진유학(先秦儒學)에서 원래 ‘충’이란 정직 · 성실을 뜻한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충’이란 한 임금 또는 한 왕조만을 섬기는 것으로 그 가치기준이 달라졌다. 그리하여 국가의 개혁이나 민족적 과업을 수행하는 일보다 좁은 의미의 ‘충’을 기리고 강조하는 풍조로 흘러갔다. 앞으로 왕조나 한 임금만을 위해 절개를 지키고 목숨을 바치라는, 지극히 공리적인 통치철학의 한 방편으로 이용하려던 것이었다.

정도전
정도전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그는 둘도 없는 조선의 역신이 되었다. 반면에 앞서 고려를 위해 죽은 정몽주는 충신으로 숭상을 받았다.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는 참된 ‘충’이란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묻게 한다.

그의 고조할아버지 정공미(鄭公美)는 봉화 정씨의 시조로 봉화현의 호장(戶長, 고을 아전의 우두머리)이었다. 뒷날 이런 정도전을 두고 ‘한미한 출신’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정공미의 자손들은 이런저런 낮은 벼슬을 하며 대대로 내려오다가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교(鄭云敎)에 이르러서는 직제학 같은 중앙의 제법 높은 벼슬을 지냈다.

한편 그의 외가는 노비의 혈통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아버지는 어릴 적에 어머니를 여의고 대대로 살아온 봉화를 떠나 영주 등지에서 한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이런 탓으로 정도전도 영주를 고향으로 삼게 되었다.

정도전은 아버지가 개경에 와 벼슬한 탓으로 일찍이 개경에 와서 살았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친구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에게 글을 배웠고, 이색의 제자들인 정몽주 · 이숭인 같은 이들과 친구로 사귈 수 있었다. 그는 시골 출신으로 이들과 어울리며 재질을 더욱 갈고 다듬어 갔다.

그는 동료들과 어울려 벼슬길에 나갔다. 그러나 당시의 고려 조정은 말이 아니었다. 대외로는 종래의 친원정책에서 방향을 바꾸어 친명을 표방했지만 뚜렷한 명분이 없어 벼슬아치들은 두 파로 갈리었고, 대내로는 권문세가의 토지 독점, 승려들의 타락 등 정치 · 사회적인 모순들이 널려 있었다.

이성계를 찾아가 장량이 되다

1375년 원나라의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합동작전을 상의하러 오게 되었다. 이인임 등 친원파는 원의 사신을 맞아들이려 했지만 정도전 · 권근 · 이숭인 등 청년 그룹은 이를 한사코 반대하며 아예 관련된 직무조차 돌보지 않았다. 결국 조정에서는 정도전을 나주 회진으로 유배 보냈다. 궁벽진 유배지에서 그는 저술에 열중하기도 하고 백성들의 찌든 생활을 몸소 겪기도 했다. 그는 유배지에서 이런 시구절을 남겼다.

예부터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인데
목숨을 붙여 안락하게 살고 싶지 않네
- 《삼봉집》 〈감흥(感興)〉

이때 그는 혁명적인 꿈을 꾸고 있었다. 그는 2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기도 하고 개경 근방에서 노닐기도 하다가 삼각산 아래에 삼봉재(三峯齋)를 지어 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그의 호도 삼각산을 뜻하는 ‘삼봉’이 되었다. 후에 조선조의 도읍을 이 산 아래로 잡은 것은 무슨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산 아래에서 편안히 글을 가르치기에는 현실적 핍박이 너무 많았다. 어느 벼슬아치가 제사를 지내는 그의 재실(齋室)을 헐어 버리자 부평으로 가서 또 재실을 지었다. 하지만 또다시 헐려서 김포로 옮겨가 살았다. 살림이 보잘 것 없는 생활이었지만, 그는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이단을 배척하고 정학(正學, 유학을 뜻함)을 높이는 이론을 가르쳤고 친명정책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이렇게 6년을 보내는 동안에 나라는 더욱 어수선해졌다. 남쪽으로는 왜구가 끊임없이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았고, 북쪽으로는 홍건적이 떼로 몰려와 민가를 들쑤셨다. 그가 울분만 토하고 있기에는 현실이 너무 급박했다. 그렇다고 조정에서 그를 다시 등용할 낌새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1383년 가을에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홀연히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이성계는 당시 함흥에서 동북도도지휘사(東北道都指揮使)로 있으면서 침입해 온 야인을 물리쳐 큰 명성을 얻고 있었다. 정도전은 그런 이성계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가 이성계를 찾아 나섰던 이유는 다음의 시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북쪽을 향해 철원을 지나면서 이렇게 읊었다.

넓은 들 하늘 아래 초목이 자라는 때
긴 강은 띠처럼 성을 돌아 흐르네
장군이 이 땅에서 억센 오랑캐 꺾어
장수 소임 거듭 맡는데도 아직 검은 머리로세

당대의 명장 이성계에게 거는 기대가 어땠는지 알 만하다. 그가 이성계의 군막에 이르렀을 때 기강이 엄숙하고 대오가 잘 정돈되어 그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었다. 이것이 그들의 처음 대면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무튼 용과 봉의 만남이었다. 정도전이 은밀히 말했다.

“훌륭하도다. 군사여! 무슨 일인들 못 하리요.”

“무슨 말이오?”

“동남쪽에 침구하는 왜를 친다는 말이외다.”

정도전은 짐짓 둘러댔다.

그는 군영 앞에 있는 노송에다 백묵으로 이렇게 또 시 한 수를 썼다.

오랜 풍상 겪는 한 그루 소나무
푸른 산 몇 만 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다가 다른 날엔 만나 볼지
세상 살펴보니 모두 티끌 자취로세
- 《태조실록》 권14, 7년 8월조

그는 이때부터 한나라를 세운 한 고조의 군사 전략을 일러 준 장량(張良)을 자처했다. 이때부터 조선왕조라는 새 나라를 열기까지 9년 동안 그의 주선과 그의 꾀가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다음 해 여름, 그는 또다시 함흥을 방문했다. 이때 둘 사이에 무슨 말들이 오갔는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무슨 줄을 댔는지, 아니면 이성계의 주선이었는지, 정도전은 이해 7월 조정으로부터 전교부령(典校副令)이라는 보잘것없는 벼슬을 받았다. 그리고 성절사 정몽주 밑에 들어가 명나라에 가서 공민왕의 뒤를 우왕이 이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때 그는 남쪽 금릉(金陵)에 도읍을 정하고 무서운 기세로 뻗는 명나라의 국력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돌아와 친명정책에 대한 소신을 더욱 다졌다. 그는 더 높은 벼슬을 받았고, 1387년에는 남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는 칭송을 받았다.

스승과 동료들의 반대편에 서다

다음 해, 이성계 일파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뒤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새 왕으로 세웠다. 이성계는 쿠데타에 성공하여 정권을 마음대로 요리했다. 이성계는 맨 먼저 정도전을 중앙으로 불러올려 대사성으로 삼았다. 창왕을 내세운 것도 정도전의 꾀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이때부터 그는 이색 · 정몽주와 길을 달리하게 되었다. 정몽주는 고려왕조를 지켜야 한다는 파였고, 정도전은 새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파였다.

정도전은 하나씩 치밀하게 일을 추진해 나갔다. 그중의 하나가 사전(私田)의 혁파였다. 당시 대대로 이어 온 귀족들은 토지를 독점하여 국가 소유의 토지보다 훨씬 더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지주들은 토지를 겸병하고서 평민들에게 소작을 주었다. 평민들은 일정한 도조를 바치고도 지주가 요구하는 물건을 사 바치거나, 일꾼의 품삯을 부담하거나, 지주가 행차할 때 여비를 내거나, 도조를 실어 나르는 값을 부담하는 따위로 생산량의 7~8할을 물어야 하는 처지였다. 정도전은 귀양살이할 때나 지방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백성의 고통과 폐단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호족들의 사전을 일정량만 제외하고는 모두 관가에 돌리게 한 것이다.

사전의 혁파는 이성계의 적극적인 뒷받침으로 단행되었다. 그러나 이색 등 예전 신하들은 옛 법을 함부로 고칠 수 없다며 반대했다. 여기에서 또다시 수구파와 개혁파가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1389년 그는 조준(趙浚)과 함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새 왕으로 받드는 일을 추진하여 공신이 되었다. 이것이 2차 쿠데타였다. 그는 공양왕에게 형벌과 상을 바르게 시행하라고 건의했다가 1391년 수구파에 의해 유배되었다. 그는 공을 세운 기록인 공신록권(功臣錄券)마저도 빼앗겼다. 두 번째 맞는 시련이었다.

이때 이성계는 그 없이는 아무 일도 해낼 수 없었기에 그를 또 불러올렸다. 그러나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치자, 김진양 등의 구신들은 이 틈을 타서 조준 · 남은과 함께 정도전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공양왕은 그를 예천의 감옥에 잡아 가두었는데 이성계의 주선으로 위기를 벗어나 광주로 유배되는 정도에 그쳤다. 참으로 지금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뻔했다.

그는 이성계의 주선으로 다시 조정에 나왔다. 이때는 정몽주가 이방원의 손에 죽은 뒤였다. 정도전 등 개혁파는 서둘러 이성계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 마침내 그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잘못된 묵은 제도를 개혁하는 일이 오로지 그의 손에 맡겨졌다. 이런 과정에서 그가 무리수를 저지르지 않은 것이 사리에 맞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앞에서 말한 대로 자신이 벼슬살이하던 고려왕조를 배반했고, 새 왕조를 세우는 과정에서 스승과 동료들의 반대편에 서게 되었다. 그가 죽고 난 뒤 사관은 그를 이렇게 평했다.

개국할 즈음에 가끔 취중에 중얼거리기를 “한 고조가 장량을 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썼도다”라고 했다. 무릇 나라를 세울 적에 그의 꾀를 쓰지 않은 것이 없었다. 끝내 큰 업적을 이루어 진실로 으뜸의 공을 세웠다. 그러나 국량이 좁고 시기심이 많았으며, 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해치고자 했고 묵은 감정을 꼭 갚으려 했다.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라고 권했지만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
- 《태조실록》 권14, 7년 8월조

앞부분은 그의 행적을 나타낸 것이지만, 뒤의 인물평은 다른 역사기록에 비추어 볼 때 과장되거나 왜곡된 것이다. 적어도 태종이 임금 노릇하는 조정에서 벼슬살이하는 사관이 태종의 비위를 맞추어 썼다고 보인다.

서울을 한양으로 옮기고 경복궁을 창건하다

새 왕조가 들어선 뒤 7년 동안 그는 눈부신 활동을 해냈다. 그는 맨 먼저 국가이념을 정립하고 통치체제를 정비했다. 또한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고 성리학을 정통의 교학(敎學)으로 내세웠고, 도교와 불교를 현실성이 적고 공허한 이론이라고 비판했다. 먼저 《심기리편(心氣理篇)》(心:불교, 氣:도교, 理:유교)을 지어 불교 · 도교를 비판하고 유교가 실천 덕목을 중심으로 인간문제를 가장 중시한다는 점을 체계화했다. 또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의 여러 이론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을 가한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지어 돌리기도 했다.

이 모든 작업은 전환기에 나타나는 혼돈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체계의 정립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이러한 이념적 바탕은 결국 중화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고, 국제질서로는 ‘사대’를 표방하게 되었다. 이 유교적 성리학과 정치적 사대가 그 당시에 있어서는 개혁의 일단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과 《경제문감(經濟文鑑)》 등을 내놓았다. 이것은 일종의 나라의 근본과 통치체제를 정비한 것이었다. 통치체제로는 중앙집권제를, 통치철학으로는 왕도정치와 민본주의를 그 기초를 삼았다.

무엇보다 그가 실천개혁의 하나로 중농주의에 바탕을 두어 토지개혁을 단행한 것이 가장 주목된다. 그는 사전의 혁파를 더욱 확대하여 국가의 공전(公田) · 균전(均田)을 늘렸다. 이것은 경제적 기득권을 박탈하여 토지를 국가나 직접 생산자인 농민이 소유할 수 있도록 전환을 꾀한 것이었다. 그래서 가장 반발이 심했고 또 그만큼 용단이 필요한 정책이었다.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단행한 것은 천도였다. 고려의 옛 신하와 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은 언제나 저항의 기세가 깔려 있었다. 그는 새 왕조의 참신한 분위기를 천도로 표현하고자 의지를 담아 결행했다.

처음에는 도읍지를 남쪽지방에서 물색했다. 북쪽에서 늘 북방민족에게 시달린 경험, 특히 고려가 원나라에 굴복한 사실을 감안해서 계룡산 근방에 도읍터를 잡으려고 했으나 너무 후미진 곳이어서 양주 일대를 도읍지로 물색한 것이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적극적인 찬동과 무학(無學)의 동의로 양주 땅 삼각산 아래에 도읍터를 잡았다.

1394년(태조 3) 말 한양 땅에 궁궐과 성곽의 축조가 시작되어 10개월 만에 왕도의 면모를 완성했다. 이즈음 중심 궁궐인 경복궁의 방향을 놓고 정도전과 무학의 의견이 엇갈렸다.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남쪽을 향해 남산을 진산(鎭山)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무학은 인왕산을 진산으로 삼고 궁궐이 서북방을 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전래대로 임금은 북쪽을 의지해 남쪽을 향해 앉아야 하고, 신하는 남쪽에 앉아 북쪽을 향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워 경복궁의 위치를 잡았다.

정도전은 경복궁의 이름은 물론, 정전인 근정전, 경복궁의 남문인 광화문과 숭례문 · 흥인문 등 서울의 모든 궁궐과 문의 이름을 짓고 수도의 행정 분할도 손수 결정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모두 이씨왕조를 반석 위에 놓고 왕실을 오래 유지하고자 하려는 의지에서 나왔다.

이런 일을 하면서 그는 때로 명나라에 가서 이씨조선 건국의 당위성과 새 왕조의 왕통 등을 알리는 외교를 직접 담당하기도 했고, 전국을 돌며 지방의 구획과 성보(城堡)의 수축 등을 지정하거나 독려하기도 했다.

경복궁 전경
경복궁 전경

정도전은 한양 천도와 함께 조선의 본궁인 경복궁 건설에 참여해 그 이름을 짓고 새 나라의 틀을 만드는 등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디자인한 전략가였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자 서둘러 세자를 결정했다. 이성계가 세자 결정을 서두른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이성계는 첫 번째 왕비 한씨에게서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왕자들은 모두 새 왕조 건설에 공헌했으나 수성의 책임을 맡기기에는 학문이 너무 얕거나 무장이어서 우락부락했다. 그런 그들이 호시탐탐 왕위를 넘보고 있었다.

이성계는 두 번째 왕비인 강씨에게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막내인 방석(芳碩)을 애지중지했다. 그는 남달리 영리한 이 막내둥이를 잘 다듬어 왕위에 앉히려고 세자로 삼았다. 이때도 정도전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는데, 정도전은 방석의 교육을 맡기도 했다. 자연히 앞 왕비의 소생들은 정도전 등 권신들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다. 특히 용맹과 슬기를 자랑하는 넷째 방간(芳幹)과 다섯째 방원의 감정은 더욱 들끓었다.

왕자들은 각기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은 각기 휘하의 사병을 동원하여 아버지의 쿠데타에 참여했었는데, 이씨왕조가 건국된 뒤에도 사병을 해산하지 않고 왕자 저택의 시위라는 명목으로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대단히 불안한 요소였다. 특히 세자가 어린 판국이라 불안은 더했다. 정도전은 사병조직을 해산시켰다. 그래도 왕자들 사이에 계속 세자의 자리를 노리는 분위기가 있자, 왕자들을 행정감독 따위의 명목으로 각 도에 분산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명나라는 새 왕조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사건건 따지고 들었다. 그래서 제기된 것이 요동 정벌이다. 요동은 우리 옛 땅이니 다시 찾자는 계획이었다. 이것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자는 뜻도 있었다. 정도전은 손수 진도(陣圖)를 만들어 중앙의 관리는 물론 각 지방의 군사들에게 군사연습을 시켰다. 그러면서 왕자들을 각 도의 절제사로 삼아 군대를 관리하게 할 계획을 세워서 방원은 전라도로, 방번(芳蕃, 후비 강씨에게서 난 아들)은 동북방면으로 보내려고 했다. 또한 어떻게든 왕자들의 병권을 완전히 빼앗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방원의 칼날에 스러지다

이렇게 되면 힘으로만 살아온 왕자들은 한낱 힘없는 바지저고리가 되는 꼴이었다. 이런 계획들이 방원이 풀어놓은 첩자들에게 걸려 모두 방원의 귀에 들어갔다. 이성계는 궁중에서 심한 해소병을 앓고 있었다. 방원은 더 이상 때를 기다릴 수 없었다. 방원은 모든 동정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더욱이 정도전 · 조준 · 남은 등 조정 중심세력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자세히 알고 있었다.

궁중은 왕의 병으로 근심에 싸여 있었고, 정도전 등은 여염집에 모여 있었다. 방원은 형 방의(芳毅)와 방간을 불러들이고 처남 민무구(閔無咎) · 민무질(閔無疾)과 하수인 이지번(李之蕃)을 동원했다. 왕자들은 사병혁파 때 무기를 모두 버렸는데 방원의 아내가 감추어 둔 철창 따위를 들고 밤에 정도전 일파가 모여 있는 송현(경복궁 동쪽 고개로 오늘날 중학동) 남은의 첩집으로 쳐들어갔다.

그곳을 지키는 종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고, 정도전 등은 정자에 불을 밝혀 놓고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방원 패거리들이 이웃집에 불을 지르자 담소를 나누던 이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 방원의 종 소근이 정도전을 끌고 와 방원의 발 앞에 무릎을 꿇렸다.

정도전이 말했다.

“공이 예전에 나를 살려 주었으니 지금 또 한 번 살려 주시오.”

그러나 방원은 정도전을 칼로 치라고 명했다. 이방원은 정승 조준을 불러오게 하여 가회방 다리 앞에 무릎을 꿇리고 말했다.

“정도전과 남은 등이 어린 얼자(孼子)각주[2] 를 세우고 우리 형제를 없애려 하므로 우리 약한 자가 먼저 손을 쓴 것이오.”

조준은 떨면서 말했다.

“저들이 한 일을 우리는 모르오이다.”

방원은 조준 등을 앞세우고 궁궐로 들어갔다. 왕은 궁궐 안 정자에 나가 병을 돌보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들었다. 이제(李濟)가 위사들을 동원해 이들을 치자고 건의했지만 형세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중(自中)의 일이니 서로 싸우게 할 수 없다”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방원은 적통의 장자로 세자를 세워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성계는 마지못해 둘째 방과(芳果)각주[3] 를 세자로 삼았다.

왕은 세자였던 방석에게 “이제 네가 편하게 되었구나”라고 했지만, 방석은 쫓겨 궁궐 밖으로 나가다가 길가에서 맞아 죽었다. 또한 방번은 통진에 유배령이 내려 양화진 나루에서 자다가 맞아 죽었다. 방원은 두 아우의 죽음을 비밀에 부쳤다.

이렇게 하여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소동은 끝을 맺었다. 그런데 과연 정도전은 왕자들을 없애려 했을까? 그가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왕자 제거의 시도는 같은 공신이요, 정승으로 있던 조준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더욱이 왕자 제거를 모의하면서 군사도 풀어놓지 않고 편안히 담소를 즐겼을 리가 없다. 방원이 왕위를 뺏기 위한 구실을 만들어 낸 것이다. 병으로 시달리던 왕은 이때부터 심한 갈등을 느끼고 방원을 미워했다.

이성계는 왕위를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함경도 덕원 · 함흥으로 들어가 세상 인연을 끓고 불교에 귀의해 참회의 나날을 보냈다. 이성계는 방원이 왕이 되자 상왕에서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다섯 아들은 죽고 한 아들은 귀양 가고 한 아들은 왕이 되고, 살아남은 셋째 아들은 동생 방원의 눈치만 보고 몸조심하고 있는 처지에서 태상왕 이성계는 왕통을 이은 방원을 몹시도 미워했다.

정도전은 개혁파였다. 그가 비록 고려 왕조를 저버렸지만 조선조로서는 정도전이 없는 새 나라의 건설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장량’으로 비유했는데, 장량은 나라를 세운 뒤에 “사냥개는 써먹힌 뒤 늙으면 주인에게 잡아먹힌다”며 조정에서 물러나 야인생활을 한 탓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정도전은 끝까지 일을 벌이다가 비명에 갔다. 뿐만 아니라 방원은 사후의 그를 여지없이 깎아내려 ‘악명’을 남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사 교과서에서조차 그를 경망한 인물, 분란을 일으키는 인물로 써 놓아 세상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그가 정립한 유학의 숭상과 사대의 표방 같은 것이 후대에 와서 폐단을 일으켰지만, 이 모든 것을 전부 그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고려의 불교도 말기에는 타락했다. 조선의 유교가 후대에 와서 헛된 이야기로 흘러간 것을 그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적어도 고려말, 정치적 · 경제적 모순을 바로잡고 사회적 혼돈을 수습하려고 나선 혁명가요, 또 실질적인 통치이념을 정립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죽으면서 이런 시조를 남겼다.

 

30년 세월 온갖 고난 겪으면서
쉬지 않고 이룩한 공업
송현방 정자에서 한잔 술 나누는 새
다 허사가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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