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세종(世宗)

목눌인 2016. 3. 31. 10:23

세종

어질고 재능이 많은 성군 世宗                     

  

왕위를 물려받은 셋째 아들  

우리나라 사람치고 세종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초상화를 보노라면 누구나 세종이 미남형의 얼굴에다 인자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50)은 33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바쁜 정무에 무척 시달렸다. 새벽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 일찍 일어나 정무를 보았고 밤에는 학문까지 익혔으니 심신이 무척 고달팠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30여 년을 하루같이 견뎌 냈다. 그래서인지 쉰 살이 넘고부터는 잔병이 잦았다.

세종대왕


태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제 4대 임금이 된 세종대왕은 33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문화, 교육, 학술, 의료, 과학, 예술 등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수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세종은 죽기 직전까지 정무를 보았는데, 죽기 이틀 전에는 일대 대사령을 내렸다. 1450년 2월 15일 이전의 모반대역죄와 악질적인 살인죄나 강도죄 이외에는 모두 사면한다는 유지를 내린 것이다. 세종이 죽음을 앞두고 대사면을 내린 사례는 대단히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는 마음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은 죽기 직전에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의 집에 있는 동별궁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죽었다.

세종이 거처를 영응대군 집의 동별궁으로 옮겨갈 때 선공감 벼슬아치들이 화재를 막기 위해 주변의 인가를 허물려고 했다. 하지만 세종은 인가를 허물지 말고 화재를 예방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분부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 이방원은 무력을 써서 왕위에 오른 태종이다. 태종에게는 맏아들 양녕대군과 둘째 아들 효령대군이 있어 셋째인 세종에게 왕의 자리가 돌아갈 리 없었다. 그런데 양녕대군은 아버지의 관심이 셋째에게 쏠리는 것을 보고 마음을 달리 먹었다. 또한 효령대군도 형의 마음을 읽고 왕위에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 불교에 심취하며 형의 뜻을 따랐다. 그리하여 세종은 자연스럽게 동궁으로 책봉될 수 있었다.

그러면 왜 태종은 셋째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했을까? 그는 말할 것도 없이 세종의 총명함과 근면함과 자애로움을 보았기에 조선 왕조의 수성(守成,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일을 이어서 지킴)을 맡기려 한 것이다. 원래 한 왕조가 창업을 하게 되면 뒤이어 기반을 다지는 군주가 있어야 탄탄해지는 법이다. 태종은 왕권의 확립 등으로 수성을 도모했지만 아직 미진한 데가 있었기에, 그 수성의 마무리를 셋째 아들에게 맡기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두 단계를 거쳐 세종은 동궁에 책봉되었다.

인자함과 위엄을 겸비한 성군

10대인 세종은 몇 달 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도 손에서 결코 책을 놓지 않았다. 건강을 염려한 부왕은 모든 책을 거두어 감추도록 명했다. 그런데 병풍 사이에 책 한 권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한 세종은 그 책을 숨겨놓고 몰래 수백 번이나 읽었다. 세종의 총명함은 그 자신도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았다”고 했고, “내가 궁중에 있을 적에 책을 손에 잡지 않고 한가로이 지낸 적이 없었다”고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총명만을 믿지 않고 경서와 같은 중요한 책은 100번씩 읽어 그 뜻을 완전히 터득했고 제자백가와 역사 책은 30번이나 읽어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정도로 정진을 거듭했다. 이런 세종이었으므로 호학(好學)의 군주로서 훈민정음을 창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은 즉위 뒤에도 호사스런 생활을 즐기지 않았다. 세종은 경회루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남은 재목으로 별실을 짓게 했다. 그런데 돌층계를 만들지 못하게 하고, 짚으로 만든 짚등을 올려 늘 이곳에 거처했다. 문 밖에 짚자리를 깔아 놓아도 이를 거두도록 했다.

어느 벼슬아치가 “공물로 금 · 은을 바치는 것을 감해 주었으니 보라매를 대신 바치게 하여 궁중에서 기르자”고 건의했다. 이에 세종은 태종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보라매를 잡기가 매우 어려우며, 날마다 꿩 한 마리를 먹여야 하고 길들이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또한 달아나면 길들이는 사람이 여염집에 들어가 수색하는 따위로 폐단이 커져 태종 임금도 놓아 준 적이 있었다며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세종은 소갈증(일종의 당뇨병)으로 늘 고생했는데, 어느 신하가 소갈증에는 흰 수탉, 누런 암탉, 양고기가 효험이 있으니 매일 임금에게 들이자고 건의했다. 이에 세종은 양고기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요, 또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동물의 생명을 해칠 수 없다며 끝내 이를 올리지 못하게 막았다.

세종은 남다른 우애를 지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형 양녕대군은 방탕한 생활을 한 탓으로 아버지 태종에게서 내쳐졌다. 이후 그는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태종이 죽자, 세종은 “형이 나이가 많아 예전 행동이 없어졌을 것이다”라며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서울로 오게 하여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자주 찾아가 깍듯이 대했고, 신하들이 너무 가까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만류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형과 아우들을 남달리 아끼며 자주 술자리를 베풀고 친분을 나누었다.

세종은 술을 마시면서도 거기에 빠져들지 않았고 잔치를 좋아하면서 탐닉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검소와 자애로 대했기에 궁궐의 창고에는 늘 물품이 남아돌았고, 세종이 재위하는 동안에는 큰 옥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세종은 18남 4녀를 두었다. 그는 왕비 심씨 이외에 많은 후궁을 거느리고 있었다. 자녀를 둔 세종의 여인들은 소헌왕후를 비롯해 6명이었다. 세종은 조선조 27대 왕 가운데 아버지 태종 29명, 증손자 성종 28명 다음으로 세 번째로 많은 자녀를 둔 임금으로 꼽힌다.

어느 궁녀가 임금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그 궁녀는 늘 세종을 가까이 모시고 지냈다. 그 궁녀가 어느 날 세종에게 작은 청을 드렸다. 아마 본가 오라비의 벼슬자리 하나를 부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계집아이가 감히 청탁을 하는 것을 보니 아마 내가 너무 사랑한 탓일 게다. 이 계집아이가 어린데도 이러하니 자라면 어떤 짓을 할지 짐작할 만하다.”

그러고는 그 뒤부터는 멀리했다고 한다.

또 세종은 아끼던 후궁의 오라비인 홍유근에게 늘 입던 옷을 내려 주었다. 홍유근은 겸사복(兼司僕, 임금 곁에서 심부름하는 직책)이 되어서 임금의 거둥마다 따라다녔다. 하루는 연(輦)을 끄는 말이 다리를 저는 것을 보고 그 내력을 알아보니, 온전한 말은 홍유근이 타고 다리를 저는 말은 연을 끌게 한 것이었다.

“만일 대간(臺諫, 언관들)이 이 일을 안다면 반드시 극형에 처할 것이니 소문을 내지 말라.”

임금은 홍유근에게 조용히 이르고 걸어서 돌아오라고 명했다. 뒤에 대간이 이 일을 알고 홍유근을 죽여야 한다고 청했으나, 그를 풀어 주어 멀리 달아나게 하고 끝내 찾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세종의 인품을 알 수 있다. 총애를 받는 후궁이 청탁을 하면 웬만한 임금이라면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행동으로 교훈을 주어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했다. 또 홍유근이 임금의 사랑을 받는다고 공사를 구분하지 않고 무례하게 행동하자, 그를 죽이지 않고 놓아 보내면서도 다시 찾지 않는 결단력과 목숨을 아끼면서도 공사는 철저히 구분하는 모습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종친의 단속도 소홀하지 않았다. 종친들은 나라에서 주는 녹을 먹으면서 벼슬아치들을 깔보며 거들먹거리기 일쑤였다. 세종은 종학(宗學)을 설치하고 종친들에게 학문을 익히게 했다. 기본 수양을 쌓음으로써 종친의 비리를 없애려는 의도였다. 양녕대군의 아들 이혜가 아버지가 자신의 첩을 빼앗았다고 불만에 차서 술을 먹고 돌아다니며 함부로 사람을 죽이자 이혜와 같이 어울려 술을 마시는 무리를 형벌로 다스리고 이혜에게도 엄한 처벌을 내렸다.

이와 같이 세종은 관용과 제재와 배려를 통해 한편으로는 위엄을 잃지 않고 한편으로는 목숨도 아꼈던 것이다.

한글을 직접 만든 언어민권주의자

세종은 정치와 학문에도 위민(爲民)과 창의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백성이 자신의 뜻을 문자로 표현할 줄 모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나라의 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 서로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해도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자가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어 사람마다 쉽게 익혀 일상생활에 편리하게 쓰도록 하노라.
- 《훈민정음》 서문

이 말은 곧 정음 창제는 백성을 위한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어려운 한문은 평생 배우고도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선비들은 어렵게 한문을 배우고 관습으로 쓰는 축문이나 편지, 혼서 따위를 한문으로 써서 대행해 주며 백성들에게 거들먹거렸다. 이렇듯 한자 생활권에서는 문맹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각주[1] .

세종은 이런 문자 환경을 바꾸려고 한 것이다. 세종은 신숙주, 성삼문 등의 도움을 받으며 노력 끝에 정음을 창제했다. 학자들보다는 오히려 둘째딸 정화공주와 아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도움을 더 받았다. 한문을 선호한 이들을 배제한 것이다. 세종은 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최만리 등 7명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놓아 주기도 하고, 처음에는 찬성해 놓고 뒤에 반대한 김문은 장형 100대에 처했으며 정창손은 벼슬을 떼 버렸다. 또 대간들의 죄를 언문으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내려보냈으며 언문으로 시험을 보게도 하고 서리 10여 명을 뽑아 언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 결과 많은 한문 책들을 한글로 풀이했다.

세종의 열정적 노력으로 궁중에서는 언문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차츰 역대의 임금도 관례대로 한문 전교를 내리면서 언문으로 옮겨 공포하기도 하고 효유문 등 조정의 정책을 알리는 글도 언문과 한문 두 가지로 공포했다. 세종은 백성의 의사 표현과 이해를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고 보급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문화 · 서민문화를 화려하게 만들었고 문자 우민정책을 없애 버렸다. 다시 말하면 그는 언어귀족주의자가 아니라 언어민권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훈민정음》 용자례 부분

세종은 백성의 의사 표현과 이해를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우리 민족문화와 서민문화의 꽃을 피게 했고,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어 문자 우민정책을 없애 버렸다.

몸은 하나인데 할 일은 백 가지

세종은 또한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농사법을 고쳐 《농사직설》을 짓게 하고 우리의 향약을 모아 후세에 전하게 했다. 또한 여러 천문기기와 과학기술을 개발하게도 했다. 한편 음악을 정리해 의례에 사용하도록 하고 백성들의 윤리의식을 넓히기 위해 《삼강행실도》를 간행해 보급했다.


삼강행실도

설순 등이 세종의 명에 의해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 · 부자 · 부부의 삼강에 모범이 될 만한 충신 · 효자 · 열녀의 행실을 모아 만든 책이다.

세종은 수령이 현지에 내려갈 때에는 어김없이 불러서 수령이 해야 할 일을 낱낱이 일러 주고 백성을 사랑하는 방법과 형벌을 조심스럽게 베풀라고 당부했다. 또 죄인들에게 한 대의 매를 때리더라도 법조문에 따라 시행하라고 일렀고 그 조문을 관아의 벽에 걸어 놓게 했다. 감옥을 만드는 도면을 그려서 춥거나 더운 철에 따라 그 위치를 달리해 죄수가 병들지 않게 배려했다.

집현전을 설치해 고금의 서적을 수장하고 학사들을 모았으며, 녹봉을 넉넉하게 주면서 독서와 연구에 진력하게 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직접 나가 학사들과 곧잘 토론을 벌였다. 때때로 내시를 집현전에 보내 학사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알아보게 했다. 하루는 새벽에 신숙주가 글을 읽고 있다고 하자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전해 주게 했다.

세종은 장영실같이 낮은 신분의 인물이라도 재주가 뛰어나면 높은 벼슬을 주어 등용했다. 그리고 낮은 벼슬아치 출신의 천문학자들에게 서울 주변의 수령자리를 주어 연구와 관찰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정사를 부지런히 보았으나 혼자 모든 일을 결정하려 하지 않았다. 적절한 벼슬아치를 골라 정승과 판서를 맡기고 그들의 손을 빌려 정치를 폈다. 합리적이고 근실한 성품을 지닌 황희를 영의정 자리에 앉히고 맹사성에게 높은 벼슬을 주어 여러 정사를 맡겼다.

유교를 익힌 벼슬아치들이 불교를 억제하려고 나섰지만 그 자신은 부처의 공덕을 기린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직접 지어 백성들이 노래하게 했다. 또 만년에, 철폐했던 내불당(內佛堂)을 복원해 비빈과 궁녀들은 물론 궁중에서도 불교를 받들게 조치했다. 하지만 불경을 읽어도 결코 부처에게 절을 하거나 빌지는 않는 절도도 보여 주었다. 여느 유학자들과는 달리 불교를 과도하게 이단으로 몰아가지 않은 것이다.

성현의 학문을 열심히 읽었으나 성리학 같은 관념적인 이론에도 빠져들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실용적인 학문 또는 백성에게 유용한 이론과 실제에 몰두했다. 당연히 풍수설이나 비기(秘記) 따위 신비의 학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외교에도 탁월한 솜씨를 보여 엄청난 국익을 챙겼다.

명나라에서 조선에 말 2만 마리를 보내라고 강요했으나 세종은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 엄청난 말의 수를 채우기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말이 육지로 요하를 건너거나 배로 산동반도로 보내 남경까지 가는 경비는 말을 기르는 비용보다 훨씬 더 들었다. 이것은 얼토당토 않은 요구였다. 무력으로 임금이 된 태종은 책봉을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말 500필을 요동에 보냈고, 그 뒤에 책봉을 받고 나서는 연달아 6000필의 말을 바쳤다.

세종도 즉위한 뒤 명나라의 요구로 말 300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또 많은 금 · 은을 조공품으로 바쳐야 했다. 그런데 명나라 성조는 북방을 정벌하면서 말 1만 필을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말을 보내야 할 처지였다.

이때 세종은 ‘인삼 로비’를 벌였다. 곧 명나라에서 오는 칙사나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은밀히 로비를 해 인삼의 효용성을 선전하고 금 · 은과 말을 인삼으로 바꾸게 했다. 명나라 사람들은 “고려의 인삼은 진시황이 구하려던 불사약이다”는 선전에 넘어가 인삼을 무척 좋아했다. 세종은 국가이익을 영구히 가져오게 한 뛰어난 외교수완을 보인 것이다.

세종은 국경지대의 안정을 도모해 국경을 개척해 오늘날의 두만강과 압록강의 국경을 긋게 한 단서를 만들었고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쓰시마를 정벌했다. 그는 이처럼 외교정치에도 큰 업적을 쌓았던 것이다.

격무로 소갈병과 신경쇠약을 앓다

그의 아버지 태종이 맏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은 데에는 특별한 뜻이 있었다. 하지만 세종은 심약하고 병약한 맏아들 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뒷날 큰 살육을 불러왔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은 야심에 찬 인물이었다. 그는 형이 죽고 어린 조카인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사병(私兵)을 동원하여 왕위를 찬탈하고 이어 태종이 했던 것처럼 형제와 조카를 죽이고 중신들을 살육했다.

태종은 사병으로 왕권을 잡았지만 나중에는 사병을 뿌리 뽑기 위해 애를 썼다. 태종은 살아 있을 때에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도 군사권만은 쥐고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군사권의 중요성을 세종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세종은 이 점을 소홀히 한 탓에 결국 수양대군이 사병을 기르고 이를 발판으로 왕위를 빼앗는 결과를 초래하게 한 것이다.

세종은 아들과 조카가 골육상잔을 벌일 줄은 예견하지 못했다. 결국 그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은 아들대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세종은 적어도 수양대군의 야심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아예 왕위를 물려주든지 아니면 전혀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는데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또 세종은 재주 있는 인사를 신분의 차별없이 등용했으나 서자의 차별과 과거를 통한 낮은 신분의 인사들이 벼슬을 할 수 있는 길은 터 주지 못했다. 선대가 만든 잘못된 법과 제도를 고치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완전한 계급타파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도적 개선을 도모할 능력과 환경이 되는데도 이 점을 소홀히 한 것이다.

세종은 늘 병에 시달렸는데 54세가 되어서는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온갖 처방을 써도 효험을 보지 못했다. 명나라 사신 예겸이 성삼문에게 임금의 병명을 묻자 ‘풍증’이라고 대답했다. 풍증은 온갖 신경의 장애로 일어나는 병이다. 곧 끊임없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신경쇠약의 병이다. 늘 노심초사하면서 낮에는 정무를 보고 밤에는 학문에 정진하는 일상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는 병이었을 것이다.

그는 몸이 비대한 탓으로 늘 소갈병에 시달렸다. 또 《세종실록》에는 병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무슨 연유인지 성병에 걸려 고통을 겪기도 했다. 또 늘그막에는 눈병으로 글읽기에 많은 지장을 받았다. 후세는 그를 성군으로 추앙하지만 개인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세종실록

조선 세종 때의 여러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책. 단종 2년(1454)에 정인지 등이 엮은 세종 재위 32년간의 실록이다. 오례의, 악보, 지리지, 칠정산 따위도 함께 수록했다.

세종이 죽기 며칠 전 동별궁 앞에 승려 50여 명이 모여 징을 치며 요란스럽게 임금의 쾌유를 비는 재를 올렸다. 승려들이 모여 재를 올린 것은 단순한 궁중의 관례가 아니라 적어도 세종이 평소 불교를 이단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의 학구적 탐구욕은 불경도 예외의 대상이 아니었다.

세종은 사리판단이 냉철한 이성과 합리적 지도력을 지닌 보수적 군주였지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혁명가나 영웅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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