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중섭[李仲燮]

목눌인 2016. 5. 31. 16:12

이중섭[李仲燮]

 


1916년 4월 10일 ~ 1956년 9월 6일
한국서양화가
 

1. 작품 세계[편집]

살아생전 를 많이 그렸는데, 어렸을 때부터 소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그림 그릴 때는 하루 종일 소만 바라봤다고 한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흰소'(1954년 작)가 있는데 이것은 백의민족이었던 한국을 의미했다. 그림을 보면 소가 말라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해 있는데 당시 6.25 전쟁 이후로 먹고 살기 힘들었던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고...

이중섭의 그림 '황소'는 2006년 35억 ~ 45억원 가격대로 경매에 오르기도 했는데, 정작 생전에는 넉넉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그도 그럴 것이 6.25 전쟁을 직격탄으로 맞은 세대라... 제주도로 피란 간 때의 경험이[1] 창작에 도움이 되기는 했다지만 어쨌거나 안습. 부두 막노동으로 생계를 잇다가 이마저도 건강 문제로 여의치 않게 되자 당시 담배갑에 들어있던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일화 또한 유명하다.

간신히 1955년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전시회를 열었지만, 1년 뒤에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이중섭의 무덤은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묘지에 있다.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사후에는 그 진가를 인정받아 작품이 고가에 거래된다는 점에서 빈센트 반 고흐와 비교되는 예술가.

고가의 거래에 대한 아이러니한 사실이 있다. 이중섭이 피난 생활을 했던 제주도 서귀포시에는 그의 작품들을 모은 전국 유일의 이중섭 미술관이 있는데, 2002년 개관했을 당시 진품을 단 한 점도 소장하지 못한 채 리플리카(복제화)를 전시해야 했다. 2013년 현재도 이중섭 미술관의 소장품 중 '황소' 등 이중섭의 대표작 상당수는 리플리카 신세이다.




2012년 4월 10일 탄생 96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구글 두들. '흰소'를 로고화했다.

참고로 이중섭은 서명을 할 때 항상 풀어쓰기로 서명을 했다고 한다.

2. 가족 관계[편집]

원래 원산 일대의 지주인 부잣집 아들이었다. 광복되기 바로 전에 결혼한 그와 그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는 금슬이 좋았던 걸로 알려져 있다. 1939년에 서울 문화학원에서 문학도였던 아내와 처음 만났고, 양쪽 집안에서 반대했지만 결국 결혼했다. 1943년에 집에 결혼 허락을 청하고 2년 걸렸다고. 마사코와 결혼한 후에 이남덕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직접 지어주었다.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의미라고.

그러나 전쟁 때문에 고향 원산을 떠나 흥남 철수 때 한국으로 내려와 부산, 제주도를 옮겨다니며 개펄에서 게를 잡고 한라산에서 부추를 뜯으며 힘들게 살게 된다. 가난 때문에 1952년엔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냈다. 마사코와 첫째아들의 건강이 무척 나빠진 상태이기도 했고, 장인어른이 돌아가시면서 그녀에게 유산을 남겼는데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원래는 온 가족이 함께 일본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이중섭은 여권이 없어 가지 못하고 마사코와 아이들만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마사코의 집안은 상당히 부유했으며(친정아버지가 미쓰이 창고 주식회사 사장이었다) 그 때문에 둘의 결혼을 반대했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다르다. 마사코는 훗날 자기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마사코의 아버지는 사위가 조선사람인 건 상관없는데, 화가라서 가족을 부양하기 힘들 것 같아 그 점에 대해서만 불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의 의견을 존중해 이중섭과의 결혼을 허락하였으며, 딸의 결혼식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1953년 7월, 이중섭은 친구 구상의 도움으로 대한대운공사 선원증을 얻게 되어 단기체류로 일주일 동안 일본으로 갈 수 있게 되는데, 이 때 마사코의 어머니는 이중섭이 항구에서 벗어나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신원보증서까지 구해주었다. 그것도 보통 사람에게 부탁한 게 아니고, 농림대신에게 부탁해서 보증을 해 주었다고.
가족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일본에 계속 머물러 있으려고 했던 이중섭을, 훗날 훌륭한 화가가 될 텐데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이 앞길을 막아서는 안된다며 설득해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낸 사람 역시 장모다.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 후 죽을 때까지 1년 동안 가족과는 거의 만나질 못한 채 한국에서 홀로 막노동을 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현대판 기러기 아빠랑 비슷한 처지인 것. 이로 인해 그가 간간히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나 그림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고 한다. 아내는 2016년 현재 95세로 일본 도쿄에서 거주중.

한편 첫째 아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안타까워 했으며, 때문에 아들이 관 속에서도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발가벗은 채[2] 즐겁게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을 많이 그렸다. 이 그림들은 그저 '벌거벗었다'는 이유 때문에 일본식 춘화로 취급되어 정부에서 철거해 버리기도 했다. 어린이에 대해서 너무한 거 아니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당시 정부의 수장인 이승만해방 이전 일을 무슨 일을 했는지 생각해 본다면 이런 일은 당연하게 자행되었다. 어디까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그림에는 복숭아 등 동양화에서 장수나 복을 상징하는 사물이 많이 들어가 있다.

그의 사후, 이중섭의 둘째 아들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이 2005년 3월 16일 첫 공개해서 경매에 내놓은 그림 8점이 2005년 10월 가짜로 밝혀져서 파장이 일어났다. 이씨가 한국고서 연구회 고문 김용수와 함께 공모해 사기를 친 것. 이를 기점으로 이중섭 작품에 대한 위작 논란이 있었다. 한국미술품평가원에 따르면 이중섭이 위작이 가장 많은 작가라고 한다. 187건의 감정 중 무려 108건이 위작이고 진작은 77건, 감정 불능 2건이었다. 의뢰된 작품의 58%가 가짜였던 셈이다.




['이중섭, 백년의 신화' 展] [미리 만나는 작품] 上

‘발 치료해 주다’, 1941. 종이에 펜, 채색.
‘발 치료해 주다’, 1941. 종이에 펜, 채색.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이중섭의 시 '소의 말' 중).

1951년 원산을 떠나 서귀포로 피란 간 이중섭(1916~1956년)은 작은 방 벽면에 이런 시(詩)를 붙여놨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네 식구 누우면 몸 돌릴 틈조차 없는 손바닥만 한 방에서도 분신과도 같은 '소'를 노래하며 삶의 의지를 지폈다.

우리 국민에게 이중섭은 곧 소요, 소는 곧 이중섭이다. 오산고보 시절 미국 유학파 화가였던 은사 임용련의 영향으로 향토색 짙은 소를 그리기 시작한 걸로 알려진 그는 시인 구상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림에 순도(殉道)할 때까지" 소를 놓지 않았다.

이중섭의 소를 한자리에서 보며 안복(眼福)을 누릴 절호의 기회가 왔다. 오는 6월 3일부터 네 달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이다. 총 200여 점의 작품 중 '흰 소'(1955년), '황소'(1953년경), '싸우는 소'(1955년) 등 유화로 그린 이중섭의 소 그림 10점이 전시된다. '소'를 시작으로 전시 개막에 앞서 독자들에게 주요 출품작을 지면(紙面)을 통해 세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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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소 그림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1955년 작 ‘흰 소’(홍익대박물관 소장, 가로 41㎝×세로 29㎝). 추사체 같은 역동적인 붓질로 기운생동하는 소의 움직임을 표현했다. 이중섭에게 소는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우리 민족이자, 자신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먹으로 일필휘지 그린 듯한 검고 굵은 선의 소를 통해 이중섭은 일제 강점기와 6·25의 혼란 속에서 우리 민족이 소처럼 꿋꿋이 버텨내기를 소망했다. 홍익대박물관이 소장한 '흰 소'(1955년)는 이중섭의 바람을 가장 극적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회색 조의 바탕에 강하고 속도감 있는 필선으로 그려낸 흰 소는 격정적인 몸짓으로 민족의 저항정신을 고취시킨다. 서울미술관이 소장한 '황소'(1953년경) 작품 속 거칠면서도 우수에 찬 소의 눈빛에선 일본으로 떠난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황소 머리 부분만 집중해서 그린 '황소'(1953~1954년) 두 점은 배경에 쓰인 붉은색의 채도와 소의 표정만 다를 뿐 거의 구도가 비슷한 '닮은꼴'이다. 이 중 배경이 조금 어두운 황소 작품은 처음으로 전시에 출품됐다. '회색 소'(1955~1956년경)와 '가족과 비둘기'(1950년대)는 드물게 종이 앞뒤에 그린 양면화(兩面畵). '가족과 비둘기'를 먼저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 정신분열을 앓던 시절 뒷면에 '회색 소'를 그린 것으로 알려진다. 희미하게 그려진 선과 초점 잃은 소의 눈빛은 말년의 이중섭을 떠올리게 한다.

 

[인물 정보]
전문가들이 꼽은 '꼭 봐야 할 이중섭의 작품'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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