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김정호(金正浩)

목눌인 2016. 8. 30. 14:49

 김정호(金正浩)    

                        
중인 신분으로 지리학에 밝아  

지난날의 조선시대 사람들은 과학기술을 지나치게 무시해왔다. 과학기술은 생활의 지혜에서 이룩된 것이요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한 방법이다. 그런데도 조선 왕조는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인 덕목, 곧 충효나 예의, 정절 따위를 지나칠 정도로 강조했다.

이것은 인간답게 살고 질서를 잡는 데에 가장 중요한 덕목이기는 하나 윤리교육에 너무 치중하면 권위주의로 흐르거나 인간의 지혜가 균형감각을 잃어 자칫 창의성이 결여되고 개척정신이 침체된다.

조선시대는 이런 인성교육에 지나치게 빠진 나머지 과학기술은 천업 또는 천직으로 무시해 제대로 발전을 못했다. 그리고 한때 훌륭한 창조적 발명이 있었더라도 지속적인 개량 · 발전을 기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많은 선인들은 이 일에 종사하며 훌륭한 발명을 해내고 발전시켰다.

고산자의 내력과 교우관계

여기서 이야기하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66)는 과학자는 아니었지만 가장 과학적인 태도와 방법으로 우리나라 지도 작성에 평생을 바쳐 완성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자기희생적인 그의 정열에 대한 사회적인 뒷받침은커녕 국가에서는 도리어 견제하거나 푸대접하기만 했다. 다만 몇몇 사람들이 그의 높은 뜻을 알고 도와주고 끌어주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물론, 가계나 태어난 해, 자손들에 대해서조차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지도나 지리에 관한 책 외에는 입으로 떠도는 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의 본관은 청도로 호는 고산자인데, 본래 황해도에서 태어나 서울로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황해도 출신이라는 것도 명확하지 않으며, 서울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도 사람들의 입으로만 전해질 뿐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을 보면, 그는 재능과 기예를 지녔고 지리학에 밝았다고 한다.

순조 연간의 실학자요 철학자인 최한기가 〈청구도〉의 내력을 알리는 글을 쓴 것으로 보아, 최한기와 친분이 있으며 최한기에게서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는 단편적으로나마 그와 사귄 주변인물을 통해 그의 삶을 알아보기로 한다.

실학시대의 뒤를 이은 19세기 중엽은 중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때였다. 중인들은 무엇보다 시사(詩社)라는 이름을 빌려 문학 활동을 왕성하게 벌였다. 예전 중인들은 천문관, 의원, 화원 등 잡직의 벼슬을 맡아왔는데, 이 시기에 들어 양반 선비들이 누리던 문학을 통해 자신들의 행동반경을 넓히려 했다. 농민들은 민란이라는 방법으로 부정한 지배세력에 맞선 데 반해, 이들은 온건한 문학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리하여 문벌정치를 이룩한 지배세력이 정치투쟁이 아닌 이들의 운동을 방관했고 양반 출신 선비들이 때때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김정호도 중인이었고 중인 문사들과 자연스레 어울렸으나 문학인은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인문 지리학자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다른 중인들과 교류하면서 사귄 인사들의 도움이 뒤따랐다. 그러면 그의 동료들을 알아보자.

먼저 최성환(崔瑆煥)을 떠올릴 수 있다. 최성환은 중인으로서 시사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그는 많은 벼슬아치들과도 친분을 갖고 있었다. 이덕무는 〈사소절(士小節)〉을 써서 1775년에 펴낸 바 있었다. 이 책은 선비들은 작은 몸가짐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서자로서 규장각 검서로 발탁되었으나 양반 출신 선비들과 같은 대우를 해주지 않는 풍토를 바로잡으려는 것이었다. 이후 최성환은 〈사소절〉을 다시 찍어 배포했다.

그런데 중인들과 어울리던 최한기는 다시 찍은 이 책을 들고 충주에 사는 이규경(李圭景)을 찾아갔다. 이규경은 이덕무의 손자로, 당시 충주에서 저술에 몰두하던 학자였다. 이렇게 해 최성환, 최한기, 이규경은 자연스레 뜻을 맞추어 어울리는 사이가 되었다.

최성환은 세도가인 박종보의 집 활자를 빌려 책을 찍기도 했다. 박종보는 순조의 생모와 오누이 사이로 출세를 거듭해 1806년에는 호조판서로 재직하면서 비변사 제조를 겸직했다. 박종보는 최성환을 천문학자요 과학자인 원로대신 남병철(南秉哲)에게 소개시켰고 남병철은 다시 최성환을 박지원의 손자인 명신 박규수(朴珪壽)와 정약용의 장남인 정학연(丁學淵) 그리고 여러 판서를 거친 고관인 신헌(申櫶)을 연결시켜 주었다.

최성환은 이를 다시 김정호에게 끈을 달아준 것이다. 그런데 이 복잡한 인맥을 거꾸로 짚어보면 김정호는 최성환, 남병철, 신헌으로 이어진다(이 인맥 관계는 서울시립대 교수 배우성의 견해를 참고하라).

특히 신헌의 주선으로 김정호는 비변사 소장의 관찬 지도와 중국 지도를 열람하거나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런 기회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변사는 모든 대신들이 외침에 대비해 회의해 결정하는 군국대사를 맡은 기구이다. 따라서 이곳에는 많은 지도가 보관되어 있었다.

최성환과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작성하기에 앞서, 뜻을 맞추어 함께 지리서 〈여도비지(輿圖備志)〉를 만들기도 했다. 여기서 지도 작성방법으로 사용한 천문학상의 좌표를 뒤에 그대로 사용했다.

정확한 지도가 필요하다

김정호는 많은 지리서와 지도를 열람해 지식을 쌓았다. 그러고 나서 〈청구도〉를 만들었다. 최한기는 〈청구도〉의 내력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의 벗 정호는 소년 시절부터 지리학에 뜻을 두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지리책을 읽고 몸소 전국을 누비며 모든 지도 작성법의 좋고 나쁜 점을 살폈다. 그리고 한가할 때에 사색을 더해 간편한 집람식(輯覽式, 지도를 부분적으로 작성해서 이용하기 좋게 펼쳐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을 발견했다.

여기서 보면 그는 어릴 적부터 우리나라 지도 작성에 뜻을 두었으며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지난날의 지도와 책을 모두 터득해 더 정확하고 바른 지도를 만들기에 고심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스스로 집람식을 발견해 자신이 만든 지도에 이용했음도 알 수 있다.

김정호 이전에 정상기(鄭尙驥)라는 지리학자가 있었다. 정상기는 성호 이익과 친구 사이였는데 종래의 지도가 부정확하고 실생활에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에 늘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는 실학자 중에서도 특이한 분야에 관심을 가져 〈동국전도(東國全圖)〉와 〈도별분도(道別分道)〉를 완성했다. 이것은 종래의 단점들을 보완해 땅의 넓고 좁음, 멀고 가까움을 표시한 획기적인 지도였다.

그러나 김정호의 눈에 비친 이 지도 역시 매우 부정확했다. 그리하여 그는 몸소 곳곳을 누볐다. 백두산 · 제주도는 물론 작은 산과 작은 섬까지 실제로 답사하며 하나하나 그려 첫 번째로 완성한 것이 〈청구도〉이다. 이는 1834년에 완성된 우리나라 지도이다. 그는 이 지도를 그리면서 경위선표(經緯線表)를 사용했고 여기에 역사적 경계까지 첨부해 역사 지도도 겸하게 했다. 그리고 각 고을의 경계를 분명하게 해 산 · 강 · 섬 그리고 나루 · 봉수 · 성곽의 위치까지도 정확하게 표시했다.

이것을 완성한 뒤에 착수한 것이 오늘날 말하는 인문지리서의 편찬이다. 다시 말해서 〈청구도〉가 지니고 있는 부족함, 곧 실생활에 필요한 여러 설명을 덧붙이려 한 것이다. 그는 〈청구도〉에서 다 표시하지 못한 산 · 강 · 도로 · 제방 그리고 역사적인 사실들을 새로이 보태어 달았다. 종래에 전해오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을 참고하면서 실제와 다른 부분, 빠진 중요한 부분들을 모두 바로잡거나 고쳤다. 그리고 이것을 《대동지지(大東地志)》라 했는데 무려 3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것이다.

불후의 명작 〈대동여지도〉를 완성하다

다음으로 그가 착수한 것이 〈대동여지도〉이다. 이것은 〈청구도〉가 지니고 있는 결점을 보충한 면도 있으나 각 지역과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총도(總圖)의 성질을 띤 것이다. 이것은 스물두 장의 첩(帖)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하나하나 붙이면 그대로 우리나라 전도가 된다. 연이어 붙인 서첩(書帖)을 보고 힌트를 얻은 것 같다.

대동여지전도

1861년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축소하여 제작한 우리나라 전도로 알려져 있다.

이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앞에는 ‘지금의 임금 12년 신유’(1862년 철종 12)라고 쓰고 〈대동여지도〉라는 표제를 큰 글씨로 새겼고 끝에 ‘고산자 교간(校刊)’이라 부기했다. 다음 첫 장에는 각 첩의 지명 위치를 표시하는 칸을 만들어 제시하고 첫 첩에는 두만강 아래 지역의 지도를 게재했다. 이어 게재한 지도표(地圖標)에는 지도에 표시하는 표를 제시했는데, 영아(營衙) · 읍치(邑治) · 성지(城池) · 진보(鎭堡) · 역참(驛站) · 창고(倉庫) · 목소(牧所) · 봉수(烽燧) · 능침(陵寢) · 방리(坊里) · 고현(古縣) · 고진보(古鎭堡) · 고산성(古山城) · 도로(道路) 등 14개이다. 이 표는 단순한 지도가 아니라 역사 · 인문 · 자연 · 지리가 모두 포함되었음을 알려준다.

이어 수록한 〈지도유설(地圖類說)〉에는 중국에서 여러 지도 작성자와 병법가들이 지도의 중요성을 말한 내용을 요약해 설명했다. 이는 그가 중국의 모든 지도책을 보았음을 증명해준다. 특히 마지막 〈방여기요(方輿紀要)〉에서는 지도의 효율과 용도를 설명하고 마지막 그 내용에 따라 이렇게 결론지었다.

천자는 안으로는 만국을 어루만지고 밖으로는 사이(四夷, 주변 나라)에 군림하니 가지와 줄기의 강하고 약한 구분, 변방과 중심이 무겁고 가벼운 형세를 몰라서는 안 된다. 재상은 천자를 도와 나라를 경영하니 무릇 변방의 이롭고 병이 되는 곳, 군사를 조치하는 방법 등을 몰라서는 안 된다. 모든 중앙 기구는 천자를 위해 백성의 일을 종합해 다스리니 재부의 나옴과 군국의 소용되는 모든 것을 몰라서는 안 된다. 감사와 수령은 천자에게서 민사를 기탁받았으니, 강역의 뻗고 섞임과 산택의 솟음과 고임 그리고 무릇 갈이하고 뽕 심을 때의 수리의 이로움, 민정과 풍속의 다스림을 모두 몰라서는 안 된다. 사민이 일을 하려 왕래할 적에 무릇 수륙의 험하고 평탄함과 나가고 피하는 실상을 모두 몰라서는 안 된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를 이용해 외침이나 강폭의 무리를 막을 수 있는 방법, 시절이 평화로우면 이를 가지고 나라를 경영하고 인민을 다스리는 방책을 우리의 서책에서 취해야 한다.

〈방여기요〉는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를 줄인 이름인데 청나라 고조우가 편찬한 지지이다. 여기에는 여러 역사책에 나온 역대 주성(州城)의 형세, 산천과 들판의 구분과 험이, 지명의 변천 등을 망라해 담았다. 아마 김정호는 이 책의 내용을 많이 참고하고 방법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지도가 단순한 용도가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여러 정책과 방안을 찾을 수 있는 길잡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자신의 견해를 쓰지 않고 중국 지리서의 말을 인용한 것일까? 그는 관찬의 지도를 만든 것이 아니라 개인이 만든 탓에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 뒤 우리나라의 〈문헌비고(文獻備考)〉 등 전적에 표시된 거리를 이(里)로 표시했는데, 끝에 압록강 연안 2,034리, 두만강 연안 844리라고 해 작은 단위까지 적고 있다. 그러고 나서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서울 지도)〉와 서울에 배치된 관서 · 방리 · 사원 · 산천의 이름을 표시했다.

이것을 모두 맞붙여놓으면 도로와 산과 들과 강이 연결되고 각 지역의 위치가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곧 오늘날의 우리나라 전도와 거의 같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이 지도만 펼쳐놓으면 여행은 물론 중앙의 행정, 군대의 작전계획 등에 일목요연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의 지도 또는 지리서 제작의 의도를 알 수 있다. 곧 첫째 군사 목적에 필요하며, 둘째 조세 · 농사 등 일반정책에 이용할 수 있고, 셋째 지방의 풍속 · 민정을 잘 살필 수 있다.

1862년에 이 지도를 판각해냈으나 나라에서 어떻게 이용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벼슬아치들은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난의 역정과 죽음의 의문

김정호는 서울 동대문 밖 용두동 또는 마포 공덕리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예전의 용두동은 백정 같은 천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요, 예전의 공덕리는 장사치나 하층민들이 살았던 곳이다. 그러니 생업을 버리고 살았던 그가 가난했을 것은 뻔한 일이다. 딸이 이 지도 작업을 힘껏 도왔다는 말도 전해진다.

이렇게 생계가 말이 아니었을 터인데도 그는 손수 제작한 지도를 판에 찍어냈다. 경비가 많이 드는 지도의 판형을 그가 어떻게 자금을 염출해서 만들었는지는 모르나 앞에서 소개한 인사들, 곧 그의 친구 최한기 등의 힘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도를 만들어서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흥선대원군에게 바쳤다고 한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나라의 기밀이 누설될 위험이 있다”며 그를 옥에 가두어 문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그가 만든 지도의 판각을 불살라버렸다고도 하고 문초를 받다가 옥중에서 죽었다고도 한다. 모두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당시에는 누구나 그의 지도를 간직하고 있었다고 하니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을 터인데 이와 관련된 기록도 거의 없다.

앞서 소개한 《이향견문록》의 저자 유재건은 중인으로 중인 인사의 일화를 많이 소개했다. 그는 김정호와 같은 시대에 살면서 그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글을 보면 잡혀가서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리고 《철종실록》이나 《고종실록》은 물론 철종과 고종 당시 범죄자의 심문기록을 충실하게 모은 《추안급국안》에도 김정호와 관련한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김정호에 얽힌 고난의 이야기는 민중이 그를 전설적 인물로 만들기 위해 지어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감독해 발행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그가 옥사했다는 이야기를 실어 마치 정설인양 가르쳐서 더욱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교과서인데도 전설이라고 밝히지도 않아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일제 때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깎아내리려 지어냈다고도 말한다.

한동안 필자는 김정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을 찾기 위해 여러 자료를 뒤져보았다. 그의 교우관계와 가문을 추적해 찾아보았지만 이삭줍기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조정에서 그만큼 그의 공을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묵은 선비들의 시구 따위는 수없이 널려 있는데도 말이다.

한편 그의 지도를 제대로 써먹은 것은 엉뚱하게도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 군대였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적에 일본군대는 〈대동여지도〉를 입수해 군수물자의 수송, 군사작전 등에 활용했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을까? 만일 나라에서 그의 지도를 찍어 관가나 일반에게 널리 돌려 이용하게 했더라면 그 효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 더욱이 19세기 말 일제와 맞서 의병을 일으킬 적에 의병의 손에 이 지도가 들려 있었더라면 그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을 터인데, 이것을 의병들이 이용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희생으로 이룩한 그의 공적을 곰곰이 되씹어보며 이런 인물을 역사 속에 파묻히게 한 그 시대의 잘못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지금 〈대동여지도〉 판본은 숭실대학교와 성신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동대문 밖에 그가 살았다는 거리를 ‘고산자로’라 이름 지어 그를 기억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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