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측천무후 무조(武照)

목눌인 2016. 4. 30. 20:36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여황제

측천무후 무조(武照)    

    


출생일시

624년
사망일시705년
국적  중국

요약 14세에 당태종의 후궁으로 들어갔다가 태종이 죽은 후 그의 아들인 고종의 후궁이 되었다. 고종의 정실 부인인 왕(王)황후를 모함하여 쫓아내고 황후가 되었다. 고종 사후(683년) 세력 기반을 넓히다 스스로 황제에 등극하여(690년), 당 왕조를 멸망시키고 주(周) 왕조를 열었다. 705년 장간지(張柬之)에 의해 폐위되어 8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여황제가 바로 측천무후(則天武后)다. 왕족도 아닌 신분으로 수많은 환란과 우여곡절 끝에 스스로의 힘으로 왕좌를 쟁취하였고 '주(周)'라고 하는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그녀의 이름은 조(照)이고, 아명은 미랑(媚娘)이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은 원래 목재장사를 하던 상인이었으나 우연한 기회에 당고조 이연을 만나 그의 행군사개[行軍司鎧, 태원부(太原府)의 무기를 관리하던 직책]를 맡게 되었다. 나라가 혼란스러운 틈에 그는 작은 군직을 샀고, 좀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픈 마음에 몰락한 귀족 가문과 관계를 맺고자 수나라에서 재상까지 지냈던 양달의 딸을 후처로 삼았다. 양씨는 두 딸을 낳았는데 그중 둘째 딸이 무조, 바로 무측천이었다.

측천무후

아버지가 일찍 죽은 후 어린 무측천과 어머니는 친척들에게 내몰리며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미모가 뛰어났던 그녀는 사냥을 나왔던 당의 2대 황제 태종의 눈에 띄어 열네 살에 그의 하급 후궁인 재인(才人)이 되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무측천은 태종의 총애를 받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무측천에게 애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신분차별과 가난으로 고생했던 무측천이 독한 성격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태종이 어느 날 천리마를 한 필 얻었는데, 성질이 매우 사나워서 길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무측천은 "저에게 그 말을 길들일 수 있는 방법이 있사옵니다. 먼저 채찍으로 때리고, 그래도 복종하지 않으면 쇠망치로 머리를 세게 때립니다. 그래도 복종하지 않으면 비수로 그 목구멍을 자릅니다"라고 하여 태종은 그녀의 잔혹한 성격을 깨닫고 멀리했다는 일화도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중국 최초의 여황제 자리까지 올랐으니만큼 그녀의 성격이 강했다는 것만은 분명할 것이다.

12년이나 태종의 승은을 받지 못한 그녀에게 정작 눈길을 준 것은 태자인 이치(李治)였다. 그는 태종의 문안을 드리러 왔다가 무측천의 아름다움에 반해 태종이 죽기 전 이미 정을 통했을 정도로 대담한 사이가 되었다. 무측천 역시 나이 든 태종보다는 이치의 환심을 사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정관 23년(649년) 5월, 태종이 죽자 무측천은 황실의 전통에 의해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어야만 했다. 활달한 성격의 그녀에게 비구니 생활은 맞지 않았으나 그녀는 권토중래할 날을 기다리며 절 생활을 견뎌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를 잊지 못한 고종(高宗) 이치는 아버지의 제삿날이 되자 새벽같이 절로 가서 무측천을 만났다.

고종이 감업사에서 무측천을 만났다는 소식을 들은 황후 왕씨는 그녀를 데려오라고 건의했다. 당시 고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던 소숙비에게서 고종의 마음을 떼어놓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영휘 2년(651년)에 무측천은 소의(昭儀)에 봉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무측천의 사람됨을 정확히 간파하지 못한 왕씨의 무모한 계획은 역효과를 내어 결국 스스로를 황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엄청난 결과를 만들고야 말았다. 처음에 무측천은 왕씨와 결탁하여 소숙비를 내쫓았다. 하지만 그녀는 비의 자리 정도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황후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왕씨를 내쫓아야 했다. 그녀는 환관들에게 뇌물을 주어 왕씨의 신변을 감시하는 한편 주변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고종과 왕씨 사이를 떨어뜨려 놓기 시작했다. 또한 고종의 마음을 완전히 돌리기 위해 무서운 계략을 꾸몄다.

영휘 5년(564년)에 무측천은 딸을 낳았다. 아이를 좋아했던 왕황후는 공주를 보기 위해 무측천의 방을 찾았고, 무측천은 자리를 피했다. 빈 방을 찾았던 황후는 잠시 방에 머물다가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온 무측천은 딸의 목을 졸라 아이를 죽인 다음 싸늘하게 식은 아이를 안고 달려나와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고종이 달려오자 무측천은 황후가 다녀간 후 아이가 죽었다고 참소하였고, 황후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희곡 〈무측천〉의 삽화

결국 이렇게 황후 왕씨와 소숙비는 쫓겨나 별원의 좁은 방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무측천은 이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재기하지 못하게 하려면 확실하게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황후의 자리에 오른 무측천은 환관을 보내 그들을 죽였으며, 자신이 황후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던 원로대신들까지 모두 음해하여 자리에서 내쫓거나 자결을 명했다. 이는 무측천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녀가 정치에 얼마나 능숙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황후가 된 후 그녀는 현명한 황후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고종이 안질과 두통으로 정사를 돌볼 수 없을 만큼 병세가 악화되고 자신에게 정사가 맡겨지자 서서히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먼저 그녀는 스스로를 천후(天后)라 칭하고 왕씨의 소생인 태자 충(忠)을 폐하고 자신의 소생인 홍(弘)을 태자로 책봉했다. 하지만 홍이 장성하여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기 시작하자 모반의 혐의를 씌워 사형시켰다. 다시 현(賢)을 태자로 세웠다가 이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자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폐하고 다시 셋째인 철(哲)로 바꾸었다. 이렇게 그녀는 정적이라면 자신의 자식이라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함하거나 살해하기를 서슴지 않았고, 그동안 형성해놓은 자신의 심복들과 더불어 자신만의 절대권력의 기틀을 짜나가기 시작했다.

683년, 고종이 죽고 태자였던 철이 중종(中宗)에 즉위하자 무측천은 두 달 만에 그를 왕위에서 폐하였으며 자신의 친아들인 현도 주살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690년에 스스로 왕위에 올라 스스로를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였다. 아울러 당 왕조를 해체하고 무씨(武氏)에 의한 주 왕조를 세웠다. 중국 역사상 희대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무측천은 황제에 오르자마자 당 왕조의 종친과 구대신들을 잔혹하게 몰살시켰으며 국법을 더욱 엄히 하였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제대로 정착되어 있지 않았던 과거제도를 다시 개편하고 신흥 세력을 대거 등용했다. 이들은 훗날 이융기를 도와 '개원의 치(당 현종이 다스렸던 713년부터 741년까지 28년간)'를 성립시키는 데 일조한다. 무측천은 젊고 영리한 신흥 세력들을 많이 중용하여 그들을 지지기반으로 만들었다. 또한 당나라 시절에도 실력이 있던 적인걸, 장간지 등의 대신들을 중용했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그녀가 시행한 정책은 중국 역사상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당대의 중국 사회가 군사적, 정치적 귀족계층에 의해 통치되던 사회에서 사대부 가문 출신의 문인 관료계층이 주도하는 사회로 바뀌게 된 것은 무측천이 추진했던 정책의 결과였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태종 이세민이 다스리던 시대에 버금갈 정도로 태평성대를 구가했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했다. 무측천은 태만한 관리들은 모두 파면했으며, 심지어는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또한 불교를 중흥시켜 전국에 많은 불교사원을 세우고 승려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러한 그녀의 치세를 '무주의 치(武周之治)'라고 불렀다.

705년, 82세가 된 측천무후는 기력이 쇠약하여 더 이상 왕좌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를 간파한 재상 장간지가 난을 일으켜 그녀를 폐하고 그녀에 의해 폐위되었던 중종을 다시 복위시켰다. 이리하여 중국 최초이자 최후의 여황제 시대는 조용히 막을 내렸다. 하마터면 사라질 뻔했던 당 왕조도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측천무후는 그해 조용히 눈을 감고 다시 황후의 지위로 돌아와 고종의 곁에 안장되었다.

건릉벽화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릉인 건릉의 벽화

측천무후가 중국 최초의 여황제라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잔인하고 악랄한 방법을 썼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지만, 중국 역사에서 황제라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 형제와 일가를 죽인 사람은 그녀뿐이 아니다. 그녀를 평가할 때에는 권력을 잡기까지의 행보보다는 잡은 이후에 어떤 치적을 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중국 역사가들이 여황제라는 측천무후의 치적을 과소평가하기에 급급했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그녀가 이룩한 사회개혁과 당 왕조가 이후 공고히 이어지게 된 사회 문화적 기틀을 세웠다는 점을 재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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