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신숭겸(申崇謙)

목눌인 2017. 2. 8. 09:26

신숭겸(申崇謙, 전라남도 곡성군 용산재)

신숭겸( ? ~ 927년 9?)은 후삼국시대 태봉 말기 및 고려 초기의 무신으로,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궁예의 부장이었으나 918년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건국에 기여하였으며 927년 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갑옷을 바꾸어 입고 대신 전사하였다. 견훤후백제군이 그의 시신에서 수급을 베어 갔으므로 고려 태조는 순금으로 두상(頭像)을 만들어 시신과 같이 매장하였다 한다. 원래 이름은 삼능산(三能山) 또는 능산(能山)이며, 시호는 장절(壯節), 평산 신씨의 시조이다. 몸이 장대하고 무용에 출중했다.

고려 개국[편집]

 

초명은 삼능산(三能山)이다. 후에 태조 왕건으로부터 평산을 관향으로 하사받고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된다.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협력하여 왕건의 집에 가서 “폭군을 폐위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청컨대 공은 (殷)과 (周)의 옛일을 본받아 실행하셔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왕으로 추대하였다.

“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있으니 왕이 비록 난폭할지라도 어찌 감히 두 마음을 가지겠는가?”라면서 왕건이 일단 거절하였다. 그러나 신숭겸 등은 “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것인데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라고 밝혀 자신들의 거사가 천명임을 강변하였다. 결국 거사를 왕건이 허락하자 그를 고려태조로 세웠다.

전사[편집]

공산 동수 전투에서
(공산성 전투에서 (신숭겸 장군(우측에 선 이)과 태조 왕건(오른쪽에서 두 번째 앉은 이)))

 

927년(왕건 10) 음력 9월 공산 동수 전투에서 김락, 전이갑 전의갑 형제와 함께 왕건을 구하고 전사하였다. 공산 전투 초반 고려군이 승리하는 것 같았으나 싸움의 진행 중 태조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위험하였다.

이때 신숭겸이 제가 대왕과 외모가 비슷하오니 제가 대왕으로 변장하면 대왕께서는 무사히 탈출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왕건의 옷을 빼앗아 입고 왕건이 일반 군졸로 변장하여 포위를 뚫고 탈출하였다.

태조 왕건이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동안 신숭겸왕건의 행세를 하며 왕건의 백마를 타고 군대를 통솔하다가 태조 왕건이 무사히 빠져나간 이후 견훤군에게 발견 견훤군이 쏜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 후백제군은 그의 시신에서 수급을 베어갔다.

이후 신숭겸의 시체를 발견한 왕건은 크게 슬퍼하여 송악으로 철수할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후[편집]

또한 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장을 원윤으로 삼았고, 지묘사(智妙寺)를 새로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대구에는 아직도 파군재, 독좌암, 왕산, 안심, 해안, 반야월, 백안, 연경, 살내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 있어, 당시의 격전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강원도 춘천시에는 신숭겸 장군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묘역에는 묘와 묘비, 신도비, 사당, 영정, 동상이 있고, 묘에는 봉분이 세 개가 있어 특이한 형태로 되었다.

1805년김조순이 비문을 짓고, 신위가 글씨를 쓴 신도비에 의하면 봉분이 3개가 있는데 대하여 두가지설이 있으니 그 하나는 신숭겸이 전사하자 견훤후백제군들이 목을 베어 갔으므로 고려 태조는 순금으로 두상(頭像)을 만들어 시신과 같이 매장하고 어느 것에 시신이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게 하여 도굴을 방지하려 하였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신숭겸의 부인 묘라고 전해지는데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고 기록하였다.[1]

한편 일찍이 숭겸태조를 따라 삼탄에 사냥을 나갔을 때에 마침 세 마리의 기러기가 나는 것을 보고 태조가 말하는 대로 셋째 놈의 왼쪽 날개를 쏘아 맞췄다.

태조가 크게 칭찬하고 평주(平州 : 평산)라는 본관을 주고 기러기를 쏜 근방의 밭 3백 결(結)을 주어 자손 대대로 조(租)를 받게 하였으니, 이 땅을 궁위(弓位)라 불렀다.

 

신숭겸 묘

신숭겸의묘(춘천)

 

 

 

신숭겸(申崇謙.?927.태조 10)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 초명은 능산(能山), 시호 장절(壯節). 본관 평산(平山). 몸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있었다. 궁예(弓裔) 말년의 장수로서, 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 등과 모의하여 왕건(王建)을 추대해서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었다.

927(태조 10) 신라를 도와 공산(公山)에서 견훤(甄萱)과 싸우다 포위를 당하여 형세가 위태할 때 김낙(金樂) 등과 함께 역전(力戰)하다가 전사하여 태조의 위급을 모면케 하였다. 태조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숭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로 원윤(元尹)을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일찍이 숭겸이 태조를 따라 삼탄(三灘)에 사녕을 나갔을 때 마침 세 마리의 기러기가 나는 것을 보고 태조가 말하는 대로 셋째 놈의 왼쪽 날개를 쏘아 맞혔다. 태조가 크게 칭찬하고 평주(平州: 平山)라는 본관을 주고, 기러기를 쏜 근방의 밭 3백 결()을 주어 자손대대로 조()를 받게 하였으니, 이 땅을 궁위(弓位)라 불렀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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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무장.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능산(能山).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으로 태조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며, <고려사> 열전에는 광해주(光海州 : 지금의 강원도 춘천)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 인물조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다.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 등을 보면, 본래 곡성 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태조 즉위 후 7,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와의 긴장관계는 견훤(甄萱)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다. 927년 견훤이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를 습격하고,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크게 분개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었을 때, 대장(大將)이 되어 원보(元甫)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태조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해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였다. 또한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해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994(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되었다. 묘는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있다.

신숭겸장군 유적(申崇謙將軍遺蹟)

고려 전기 개국공신 신숭겸장군이 순절한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파군재(破軍峴) 일원의 유적을 지정한 것.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

신숭겸 장군은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있으면서 배현경(裵玄慶) 등과 포악한 궁예(弓裔)를 내몰고 왕건(王建)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하였다. 그 뒤 대장군이 되어 927(태조 10) 태조와 신라를 도와 후백제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대구 공산(公山) 싸움에서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태조가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 자신이 왕으로 변장하여 김락(金樂)장군과 같이 싸우다가 왕건을 대신하여 전사하였다. 왕건은 이틈을 타 장졸로 변장하여 적의 포위망을 뚫고 단신 탈출하였다.

태조는 장군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光海州, 지금의 춘천)에 예장(禮葬)하고, 전사한 자리인 이 곳 대구 공산에 순절단(殉節壇)과 지묘사(智妙寺, 美理寺)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하는 한편 일품전지 삼백무(三百畝)를 하사하여 이를 수호하게 하였다.

그 후 지묘사는 고려의 멸망과 함께 폐사되었으나 1607(선조 40)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柳永詢)이 이 자리에 표충사표충단충렬비를 건립하여 공의 혼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는 1672(현종 13)이 서원에 사액을 내려 관리하도록 하였으나 1871(고종 8) 서원훼철령에 의해 표충사가 훼철된 뒤로 후손들이 재사(齋舍)를 신축하여 지켜오고 있다.

이 유적 주변에는 왕건이 탈출하여 잠시 앉았다는 독좌암, 표충사 뒤의 왕산(王山), 공산싸움에서 유래된 안심(安心)해안(解顔)반야월(半夜月) 등 지명이 있다.

신숭겸 영각 유허비(申崇謙影閣遺墟碑)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6.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평광동 산 36. 유허비는 927(태조 10) 동수전투에서 전사한 신숭겸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832(순조 32)에 건립된 석비로 고려의 삼국 통일과정에서 왕건군과 견훤군 사이에 일어났던 동수전투의 흔적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가치가 있다.

춘천 장절공 신숭겸 신도비(春川 壯節公 申崇謙 神道碑)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55. 소재지 : 춘천시 서면 방동리 821-1번지 서면 방동리 821-1번지. 1805(純祖 5) 건립한 신숭겸 신도비는 비각을 건립하여 보관하고 있다. 비는 조선시대 일반적인 형태인 팔각지붕형 갓석과 비신, 비대석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金祖淳이 썼으며, 글씨는 申緯가 썼고, 篆字徐邁修가 썼다. 신위는 조선시대 4대 명필가였으며, 서매수는 당시 좌의정이었다. 비의 규모는 비신의 높이 228cm, 106cm, 두께 39cm이다.

춘천시 서면 방동리 821-1번지내에 위치하고 있는 신숭겸 신도비는 신장절공 묘역(강원도 기념물 제21, 1967.6.17 지정)과 인접하여 있으며 주변의 금산리에는 춘천 한백록 묘역 및 정문(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1, 2000.11.18 지정)이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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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숭겸(申崇謙)의 전사(戰死)>

신숭겸(申崇謙)의 초명(初名)은 능산(能山)으로, 광해주(光海州: 춘천) 사람이다. 고려 태조(太祖)를 내세우는 데 유공(有功)하였고, 태조 10년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과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싸웠다.

이때 견훤의 군대가 우세하여 태조는 포위당하여 태조의 생명이 위급할 때 신숭겸(申崇謙)이 김낙(金樂)과 같이 싸우다가 전사(戰死)하였다. 태조 대신 죽었다 하여, 태조가 몹시 슬퍼하였다. 후일 장절공(壯節公)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신숭겸(申崇謙)이 평산(平山) 신씨(申氏)의 시조(始祖)가 된 것은, 송도(松都)에서 평산이 가까워 때때로 태조와 사냥을 나갔으므로 이곳을 자기의 본향으로 받았다고 한다. 또 그는 무술(武術)이 출중하였으므로 곡성(谷城)에서는 신(: 山神)으로 모시기로 하였다.

-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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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신숭겸 묘)

 

(춘천 신숭겸 묘역)

 

(춘천 신숭겸 신도비)

 

(춘천 신숭겸 신도비각)

 

(춘천 장절사 및 신도비각)

 

(대구 신숭겸 유적)

 

(대구 신숭겸 유적)

(대구 신숭겸 유적)

 

(대구 신숭겸 역각유허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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