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김진홍 목사

목눌인 2018. 8. 26. 20:23

김진홍 목사(두레교회)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청송(靑松)땅이다. 청송이라면 이름에도 나타나듯이 산 높고 골 깊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 중에서도 안덕면 사부실 마을은 산골 중의 산골로 내가 나서 자란 마을이다. 1941년 초여름 온 마을이 보리베기 모내기에 한창이던 유월 열여드렛날 나는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일본 동경에서 택시 운전사로 일하셨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모범운전사쯤 되셨던 것 같다. 나는 네살 위인 형, 두살 위인 누나에 이어 셋째로 태어났다. 일본에 살던 어머니는 나를 해산하시려고 고향에 오셨다가 산후조리가 끝난 후 일본으로 가셨다. 우리 가정이 귀국선을 탄 것은 1945년 가을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일본에 남으시고 어머니가 우리 4남매 ─형, 누나, 나, 세살 아래 남동생─를 데리고 귀국하셨다.

나의 첫사랑 「옥수」 우리 집은 가난했다. 농촌에서 논도 밭도 없는 터에 어머니 삯바느질로만 살아가려니 궁하기만 했다. 양식도 채소도 늘 부족했다. 집안의 부족한 반찬조달을 위해 감자를 가져오라고 했더니 마을 아이들은 두말 없이 내 제안을 따랐다. 저녁마다 한 바가지씩의 감자가 모였다. 말하자면 상상력을 동원한 이야기덕분에 집안에 보탬이 되었던 셈이다. 나는 지금도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만화를 많이 읽혀야 한다고 강조한다. 만화책 읽고 동화 듣고 서로가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들의 상상력은 발전한다. 그리고 그런 상상력의 바탕에서 창조력이 자란다. 그 상상력과 창조력은 일생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활력소이고 재산이다. 그러니 국력을 기울여 좋은 만화책을 발간해 어린이들로 하여금 읽게 하여야 한다. 초등학교 시절 나에게 첫사랑이 있었다. 첫사랑이라고 하니까 그럴 듯하지만 내용은 보잘것없는 이야기다. 혼자서 가슴앓이 하다 끝나버렸으니 사랑이랄 것도 없는 내용이긴 하다. 우리 가족과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귀국선을 타고 온 이웃 중에 옥수라는 이름의 소녀가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총명했다. 부모들끼리 친분이 있는데다 교회를 함께 다녀 우리는 가까이 지냈다. 내가 옥수와 나란히 걷노라면 동무들이 놀려댔다. 『얼레덜레요 홍이하고 옥수하고 붙었다네』'얼레덜레요 둘이 붙었다네』옥수는 그렇게 놀림을 받을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싫어했지만 나는 싫지만은 않았다. 학예회 때 연극에서 나는 옥수와 함께 주인공으로 뽑혔다. 옥수는 낙랑공주가 되고 나는 호동왕자가 되었다. 우리는 만장한 청중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나는 그녀 옆에 있으면 즐거웠고 그녀 몸에서 향내가 나는 듯했다. 그 나이에 그녀와 입맞춤 하는 꿈을 꾸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옥수가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가족들을 일본으로 다시 데려가게 된 것이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하늘이 깜깜해졌다.

신동이라 불리게 된 사연 그 즈음 어머니는 밤낮 재봉틀에 앉아 계시고 형은 삼촌댁에가 있었던지라 밥짓기는 누나 몫이었고 땔감 구하기는 내 몫이었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산으로 땔감 구하러 다녔다. 나보다 더 큰 지게를 지고는 이 산 저 산 다니며 땔감을 구해왔다. 외가 행랑채의 한 칸 방에 살고 있었던 우리는 여러 가지로 외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무하러 갈 때마다 낫이며 톱 같은 연장을 외가에서 빌려 사용했다. 그러면서 가끔은 망가뜨리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잦으니 외할머니께서 나를 볼 때면 연장을 가져다 버린다고 핀잔이셨다.나는 외할머니의 그런 핀잔이 못마땅했다. 어느 날 오후에도 산에 가려고 지게를 지고 집을 나서려는데 마루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가 소리를 지르셨다. 『홍아 이눔아 연장이란 연장은 다 가져다 버리고는 또 연장가져가느냐. 지금껏 갖다 버린 연장 다 내놓아라』나는 화가 나서 외할머니 쪽으로 돌아서며 바지를 내렸다. 바지춤에서 고추를 끄집어내어 한 손으로 잡고는 할머니를 향해소리를 질렀다. 『할메요. 연장 여기 있심더. 이 연장이면 다른 연장 다 갚고도 남겠지요』 그러자 할머니는 맨발로 마당으로 내려오시더니 내 쪽으로 달려오시면서 소리질렀다. 『그래 이 눔아 그 연장 이리 내 놔라』나는 질겁을 하고 얼른 고추를 바지춤 안에 넣어 간직하고는 바지춤을 움켜쥔 채 골목 밖으로 냅다 뛰었다. 그 뒤로 할머니는 나를 장래성 있는 외손자라 인정하시고는 연장 때문에 닦달하기를 멈추셨다. 하루는 어머니께 말씀하셨다.『너 그놈 진홍이 잘 길러라. 그 녀석 장래성 있는 녀석이야. 녀석이 연장 내 놓으라는 데 바지를 내리고 물건을 썩 내놓는 녀석이야. 아무나 그렇게 못하는 거다. 그 녀석 한번 크게 될 거다』 그런가 하면 학교에서 내가 졸지에 신동(神童)이란 소문이 나는 사건도 있었다. 하루는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나를 지명하여교과서를 읽으라고 했다. 그날 따라 국어 책을 가져오지 않았던 날이었다. 그러나 전날 저녁에 그날 배울 내용을 읽었던 터여서 옆자리 아이의 책을 빌릴 것도 없이 그냥 서서 외워나갔다. 선생님이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시더니 물으셨다. 『진홍아 너 지금 책도 안 보고 읽고 있는 거냐?』 '예, 오늘 마침 국어책을 집에 두고 왔습니다. 그래도 어제 저녁에 미리 읽었던 내용이어서 그냥 읽습니다』『너 신동이구나, 우리 학교에 신동이 나왔구나!』그래서 나는 졸지에 신동이 되었다. 그 후로 사람들이 나를 보고 신동이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되니 나 자신도 내가 신동인가 하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좁은 산골에서나 통할 수 있는 신동이었다. 중학교 때 대구로 나와 보니 나 정도 되는 신동은 골목마다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대구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서울로 와서는 내가 신동도, 수재도 아니고 보통 사람밖에 되지 않음을 절감했다.이제는 세계여행을 많이 하면서 세계에는 정말로 특출한 인재들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나 같은 사람은 오히려 둔재에다 게으르기까지 하여 그냥 하루하루를 지내다간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되기 십상임을 느끼게 됐다. 그러니 유일한 길은 자신을 갈고 닦아 스스로 자기 발전을 꾀하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절감하고 있다.-------------

「마음의 고향」복동교회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교회이야기다. 우리 가족이 다닌 교회는 복동교회(福洞敎會)였다.두메산골의 교회였지만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전통이 깊고 많은 인재를 배출한 교회이다. 오래된 당나무가 서 있는 마당에 한옥(韓屋)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복동교회는 나이 들어가면서 더욱 그리워지는 마음의 고향 같은 교회이다. 나이 들어 고향을 떠난 후로 삶에 지칠 때면 나는 곧잘 고향 교회를 꿈꾸곤 했다. 고달픈 감옥살이 때에, 세상살이가 벅차기만 하여 좌절감을 느꼈을 때에, 병으로 누웠을 때, 그런 때에 나는 복동교회 꿈을 꾸곤 했다.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 부활절 같은 교회 명절이 왔을 때는 유년주일학교 학생들의 발표회가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개 회 인사말 순서를 맡았고 독창을 하거나 연극을 했다. 해마다 5월이 되어 어린이 주일이 되면 교인들이 푸짐한 음식을 장만 하여 야외예배를 가곤 했다. 밤나무 숲이나 사과 밭에 터를 잡 고 온종일을 즐겁게 보냈다. 그런 날이면 으레 뽑혀 독창을 했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노 래가 있다. '보리밭에 종달새 노래 부르고 나물 캐는 처녀가 하늘을 보면 어디서 오라는지 보이지 않고 호랑나비 한 마리 날아갑니다』 오월 하늘의 아지랑이를 뒤로 하고 들녘에 앉아 있는 온 교인 앞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 교인들은 박수를 보내며 『아이고 그집 아들 창가 잘하네』 하며 칭찬해 주었다. 이런 세월들이 내 영혼에 쌓여 훗날 방황 길에서 좌절하지 않고 다시 교회로 돌 아오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어느 해였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나는 교회 다니지 않던 마을 친구 셋을 인도하여 교회로 갔다. 그날은 각 가정에서 감이니 사과니 떡이니 온갖 음식들을 장만하여 감사절 예배 후에 잔치가 벌어진다. 그때는 너 나 할 것 없이 생활이 어려웠던 시절 이라 그날 주는 음식이 아이들에게는 큰 선물이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이 되면 교회가 차고 넘칠 만큼 아이들이 모여들었 다. 하필이면 그날 음식이 모자랐던지 여전도사님이 앞장서서 소리 높여 말했다. 『교인 집 아이 아닌 아이들은 떡 주지 마라. 떡만 얻어먹으러 왔지 교회 온 아이들이 아니다』 그리고는 그날 처음 온 아이들은 떡 타는 줄에서 골라내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데려 간 아이들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교회 가 이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처사라 생각되었다. 설령 음식이 모자란다면 교인집 아이들보다 처음 온 아이들에게 먼저 나누어주는 것이 옳은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교인집 아이들이 서 있는 줄에서 빠져나와 친구들과 같이 떡을 받아 먹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 누구에게 들었는지 어머니가 물었다. 『홍아, 너 오늘 추수감사절에 주는 떡을 타 먹지 않았다던 데!』『그래요, 오늘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왜 속이라도 좋지 않았니?』 『아녜요. 속도 말짱했어요』 『그럼 왜 그랬니? 무슨 속상한 일이라도 있었니?』 『딴기 아니라요, 오늘 교회 갈 때 춘이하고 영일이하고 태식 이 셋을 전도해서 갔걸랑요』 『그것 참 잘했구나 근데?』 『예배 후 음식 줄 때요. 예배당 안 다니던 애들은 주지 말라 고 해서요. 걔들이 줄에서 밀려났어요. 그래서 나도 안 받았지 요』『아이고 그런 일에 있었구나. 근데 걔들이 못 타먹어도 너까 지 먹지 않고 하루종일 생으로 굶었더냐?』 '아니지요. 그럼 안되지요. 내가 전도해간 친구들이 못 먹는데 나 혼자 먹을 수는 없지요. 그리고요 예배당서그러카몬 안되지요. 그렇게 할 수 없지요. 예수님은 주라 하셨는데 예배당은 예 수 믿는 사람들만 주고 예배당 안 다니는 애들은 주지 않으면 예수님 생각하고는 다르잖아요?』『그래 네 말이 백번 옳다. 오늘은 예배당서 잘못했다. 내 다음 제직회 때 따지꾸마 근데 너 배고프겠다. 감자라도 삶아주련?』 다음 달 교회 제직회 때 어머니는 추수감사절에 있었던 이야기 를 하시며 교회가 그날 취한 처사가 잘못되지 않았느냐고 이의 를 제기했다. 제직회는 그 일로 한참 논란을 거듭한 후에 그 일은 교회가 확실히 잘못했으니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의 한 끼 단식이 효과를 본 셈이었다 고 할까….

예수님, 저를 중학교에 꼭 들어가게 해주세요 세월은 흘러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었다. 자연히 나의 중 학교 진학 문제가 가정의 근심거리로 대두되었다.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중학교에 갈 처지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는 우리 가정의 그런 형편을 살피시고는 어느 대장간에 심부 름꾼으로 나를 들여보내기로 부탁해 두고는 어머니께 권했다.『혼자 몸에 아이들 교육시킨다고 골빠지게 고생만 하지 말고 진홍이는 대장간에 보내라. 내가 이야기 잘 해두었다. 풀무질 잘 배워두면 앞으로 자기 앞은 추스려 나갈 거다』 『아버지. 그 애는 그렇게 썩을 애가 아니에요. 그런 길로 나가기에는 재주가 너무 아까운 애예요. 그러고 그 애 아버지 유언 이 무언데요? 다른 애들은 몰라도 셋째는 꼭 공부시키라고 당 부하고 숨을 거두었다 합니다. 제가 굶더라도 홍이는 학교 보내렵니다』 『그 왜 죽은 사람은 자꾸 들먹거리는 거야, 그렇게 자식교육에 열성이거든 죽질 말고 감당했어야지. 죽은 사람 말에 매여 살지 말고 산 사람은 살아갈 도리를 찾는 게야』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시고는 역정을 내며 가버렸다. 나는 두분의 대화를 곁에서 들으며 어머니께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참 좋은 어머니다. 장래 훌륭한 사람이 되어 어머니를 기쁘 게 해드려야지. 저런 어머니께 효자노릇하려면 공부 열심히 하 는거다」 하고 생각했다. 그 후로 나는 새벽마다 교회로 가서 예수님께 기도드리기 시작 했다. 기도제목은 중학교에 들어갈 길을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면 장래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 같 은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 사부실에서 교회가 있는 마을까지는 4km가 넘는 거리였다. 새벽에 그 길을 혼자 걸어 교회로 가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나는 열심히 다니며 기 도했다. 『예수님, 저를 중학교에 꼭 들어가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래 야 큰 일꾼이 되어 나라 일도 하고 가문도 빛내고 어머니도 모 실 것 아닙니까? 제가 대장간에 머슴으로 들어가버리면 아무것 도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 중학교만큼은 꼭 들어가야겠습니 다』 새벽길을 혼자 걸어 교회로 가노라면 때로는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 무서움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 길에서 호랑이가 나타 난 것을 보았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쉽지 않은 길이었다. 나 는 무서움을 이기느라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찬송가를 높이 부르며 달리기와 걷기를 되풀이하곤 했다. 그런 어느날 새벽에 진짜 호랑이가 나타났다. 중개만한 크기의 호랑이가 마을이 끝나는 자리쯤에서부터 나를 따라오고 있었 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공포심에 몸이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하늘을 우러러 소리 높여 도 움을 청했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지금 제가 재난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호랑이는 사라지지 않고 줄곧 따라오더니 급기야 나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내 혼을 빼려는 작전으로 나왔다. 나는 젖먹던 힘까지 다하여 소리 질렀다. 『사탄아 물러가라. 여호와의 백성을 해치려 말라!』 그러나 사탄은 물러갈 기미는 전연 없이 오히려 나에게로 다가 왔다. 그제서야 호랑이치고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리를 살랑이며 깡충깡충 뛰는 모습이 나를 해치려는 마음은 아닌 것 같았다. 의아한 생각이 들어 자세히 살폈더니 호랑이 가 아니라 우리 집에서 기르는 개 바둑이였다. 바둑이가 새벽 에 교회 가는 나를 따라온 것이었다. 나는 반가운 생각으로 바둑이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오라 바둑이구나. 네가 나를 그렇게나 놀라게 할 수 있니? 아무튼 반갑다 너 나하고 교회까지 같이 가련?』

드디어 나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친척들의 만류와 빈정거림에 도 아랑곳않으신 어머니의 열성이 나를 안덕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입학은 하였으나 학교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입학금을 못내고 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입학 후 한 달 가량은 아무 소리 없더니 두 달째부터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님이 교실에서 나는 불러세우시고는 집에 가서 입학금 가져다가 서무실에 내고 교실로 들어오라는 것이 었다. 하는 수 없이 책가방을 싸들고는 교실 밖으로 나갔 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마침 나와 같은 처지의 동료가 셋이 있었다. 우리들은 냇가로 갔다 냇가 아카시아 나무 그늘에 앉아 놀다가 학교가 파할 즈음에 집으로 갔다. 그런 생활이 일과처럼 되었다. 그 즈음 어머니는 대구로 나가신 후였다. 시골에 있어서는 우 리를 가르칠 길이 없음을 짐작하시고는 누나와 함께 대구로 가신 후로 소식조차 없던 때였다. 나는 아침에는 여느 아이들처럼 가방 들고 학교 가서 교실에 앉기는 했지만 으레 선생님이 불러세워 공납금 가져오라고 보내셨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냇 가로 가서 노닥거리며 놀다가는 집으로 가곤 했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는 중에도 개교 기념일에는 뽑혀서 독창을 했다. 부른 곡이 개교 기념식 분위기에는 전연 맞지 않는 『황 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푸르러…』였다. 기억나기로는 교장실에 불려갔더니 무슨 곡을 부를 수 있겠느냐, 아는 노래를 한 곡 불러보라기에 「황성 옛터」를 불렀다. 교장선생님이 마음에 드셨던지 개교기념식장에서 그 곡을 그대로 부르라고 하셨던 것 같다. 어린 시절에 나는 노래를 곧잘 불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하루는 음악시간이 끝난 후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러 정색을 하며 이르셨다. 『진홍이 너는 음악에 소질이 있으니 앞으로 베토벤 같은 음악 가가 되어라. 잘 갈고 닦으면 훌륭한 성악가가 될 소질이 있다 고 본다』느닷없는 선생님의 권면에 엉겁결에 『예, 열심히 해보겠습니 다』 하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선생님도 나도 어떻게 해야 베토벤 같은 음악가가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악보를 읽을 수 있는 선생님이 한 번도 부임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음악교육이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그냥 목소리가 좋은 편이어서 중학교 1학년 때에 「황성 옛 터」를 부르기는 했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구로 나와 어린 나이에 유리공장에 취직하여 하루 종일 뜨거 운 불가마 앞에서 일하는 동안에 목소리가 달라지고 말았다. 지금은 음악적 재능은 쇠퇴할 대로 쇠퇴하여 고작해야 「두만 강 푸른 물에」나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같은 대중가요 를 흥얼거릴 정도가 되고 말았다.

신문 빼돌려 호빵 사먹다가 안덕중학교에서 첫 학기를 그렇게 보내다가 여름방학을 맞았다. 방학이 되면서 나는 대구에 계시는 어머니께 호소문을 보 냈다. 「그리운 어머님 보시옵소서」로 시작되는 편지는 셋째 아들이 처한 곤궁한 처지를 그림으로 그려가며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엄지 발가락이 삐져나오는 운동화, 무릎이 드러나는 바 지, 너덜거리는 소맷자락 등이 서신에 그려져 있었다. 대구 어머니 곁에 불러만 주시면 신문팔이든 담배팔이든 해서나 먹을 만큼은 해결할 터이니 불러만 달라고 호소했다. 어머니는 편지를 보시고 감동하셨는지 9월 초순에 나를 데리러 오셨다. 그때까지도 못낸 입학금과 밀린 공납금을 치르고는 전학증을 떼어 대구로 갔다. 대구에서 우리 가정은 신암동 산 위 빈민촌에서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방직공장에 나가시고 형은 인쇄소 직공으로 나갔으며 누나는 식모살이였다. 나도 신문팔이로 대구생활을 시작했다. 학교는 영신중학 야간부에 적을 올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신문팔이를 하다가 얼마 후에 한국일보 신문배달로 바꾸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신문지국으로 가서 1백여부 되는 신문을 받아서는 맡은 구역을 도는 것이었다. 신암동 신천동을 돌아 산격동의 경북대학 뒤편까지 도는 구역이었다. 배달구역 이 그렇게 넓다 보니 배달이 끝날 무렵에는 지치고 배고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느 때는 해장국집 앞에 서서 구수한 음식 냄새를 한참이나 맡다가 발걸음을 옮기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아침 나절에 신문을 팔에 안고 골목길을 다니다 보면 지나던 사람들 중에 나를 불러세워 『너 신문 팔 것 있니?』하 고 묻는 경우가 있었다. 당연히 팔 것이 없다는 대답이 나와야 하는데 내 입에서는 차마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 가 쭈뼛거리는 동안에 손님은 신문값 20원을 내놓고는 신문 한 장을 뽑아가버렸다. 나는 20원을 들고 가게로 가서 호빵 하나를 사서 먹는다. 빵맛 을 음미하여 천천히 먹는다. 그 순간에는 뱃속이 심히 행복함 을 느낀다. 그러나 행복은 잠깐으로 끝나고 고민에 빠지게 된 다. 한 부 모자라는 신문으로 인하여 어느 집을 빠뜨려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가장 뒤탈이 적을 듯한 집을 건너뛰고는 배 달을 끝낸다. 그러나 아침신문을 기다리던 그 집에서는 신문지국 사무실에 전화를 건다.그런 일이 잦아지니 지국장이 내게 주의를 주었 다. 배달 사고가 너무 잦으니 확실히 하라, 계속 그렇게 하면 그만두게 하겠다. 나는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다음날에도 배달이 끝날 즈음에 가서 『어이 신문배달 신문 한 장 사자』 하며 20원을 내밀면 그렇게 하면 안 되지 하면서도 손은 이미 20원을 받아쥐고 있다. 그리고는 다시 가 게로 가서 호빵 하나를 집어든다. 그러기를 얼만가 계속했더니 한국일보 지국장이 하루는 나를 불러서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 동안 많이 봐주었는데 이젠 안 되겠어. 배달 사고가 너무 잦으니 후임자에게 구역을 물려줘라. 마음 같아선 패주고 싶지 만 참는다』호빵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나는 결국 해고당하고 말았다. 세끼식사를 해결하지 못하는 가난한 형편에서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야간고교에 들어가서는 염세주의에 빠졌다. 퇴학과 복학을 거듭하면서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결국 소록도 나환자촌에서 크게 느낀 바 있어 마음을 다잡아 입시공부를 했 다.

계명대 철학과에 입학한 나는 이번에는 모태신앙(기독교) 을 부정하는 사상적 방황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전공과목인 철학만큼은 열심히 공부했다. 워 낙에 철학이 나의 체질에 맞는 과목이었다. 철학에 관계되는 책만 들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를 만큼 그 속에 빠져들곤 했다. 그래서 그 시절에 내게 붙은 별명이 「미스터 소크라테스」였 다. 2학년 때부터 해마다 열리는 전국철학학술대회에 참가했 다. 2학년 때는 「플라톤의 이데아연구」란 제목으로, 3학년 때는 「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연구」로, 4학년 때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한 철학적 배경」이란 제목으 로 발표했다. 그러자 주위에서는 나를 장래 철학교수가 될 인물로 인정했다. 나 스스로도 장차 한국 철학계를 짊어지고 나갈 기둥이 되 겠다는 자부심을 품고 공부했다. 그래서 「도서관 지킴이」가 되었다. 도서관에 가장 일찍 들어가 가장 나중에 나온다 하여 붙은 별명이었다. 하루는 여전히 도서관에 앉아 형이상학(形而上學) 읽기에 몰두하고 있는데 철학과 선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어이 미스터 소크라테스. 형이상학 연구에 소출이 있냐?』『별로 없심더. 아직은 형이상학까진 못가고 하학(下學) 에서 중학(中學)정도까지 오르고 있심더』『딴기 아니고 자네에게 급하고 중요한 일로 대화를 나누고 싶으니 지금 도서관 앞 잔디밭으로 좀 나오소』 홍응표란 이름의 선배는 그렇게 자기 할 말만 하고는 성큼 성큼 나가버렸다. 나는 도리없이 읽던 책을 덮고는 따라나갔 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홍선배는 내가 미처 자리도 잡기 전에 물어왔다.『김진홍. 자네 거듭났는가?』'예? 선배님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깁니까!』『거듭났느냐고. 예수 믿고 거듭났느냐를 묻는 것이네』 『아니, 선배님 먼 질문이 그렇습니까? 급하고 중요한 일이란 기 바로 그깁니까? 세상에 그런 황당한 걸 물어보려고 공부하고 있는 사람을 불러낸 것입니까?』'아문, 급하고 말고.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 가? 자네가 임마누엘 칸트를 아무리 읽어보았자 그 속에서 생 명을 얻을 순 없네, 자네에게 고민만 더하여 줄 따름이네. 자네도 그만큼 열심히 읽었으면 이제쯤은 질릴 때도 됐을 텐데. 칸트의 전공은 질문일세. 그에게는 해답이 없어. 해답은 나사렛 예수에게만 있는 거야. 자네도 칸트처럼 평생을 해답없는 질문만 계속할텐가? 형이상학(形而上學)을 한다는 것은 출구 없는 숲속을 헤메는 것과 같아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길을 잃 고 마는 것이네. 자네는 영특하니 잘 판단하게나. 내가 자네에게 급하다고 한 것은 자네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니까 그렇게 말한 것이네. 지금의 자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나사렛 예수를 평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거듭나는 일일세』 홍선배는 나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설득이 내게 통 할 리 없었다. 나는 그런 선배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소위 형이상학을 다룬다는 철학도가 저런 형이하학적인 수준의 사고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그의 지능이 낮은 탓이라 생각했다. 아 예 나와는 토론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는 한마디 일러 주고 자리를 떴다.『홍선배님 혼자 거듭나시라요. 거듭나서 천당을 가든지 만 당을 가든지 가서 잘 먹고 잘 사시라요. 나는 선배 같은 수준 의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면 동행할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거듭나지 못해서 지옥에 간다면 인간답게 가겠습니다. 변증법을 공부하고 형이상학을 논하는 사람이 어떻게 거듭났냐, 구원 받 았냐, 그런 질문을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런 사 람들이 가는 천당에 가 머리없는 도야지로 사느니 차라리 지 옥가서 생각하는 소크라테스로 살랍니다』『글쎄 자네가 지금은 그렇게 고상한 말을 하고 있지만 시 간문제일세. 언젠가 나의 말에 고개 숙일 때가 올 것일세. 그 날이 오도록 내가 기도하지. 자네는 자네가 원하는 변증법, 형 이상학 하러 가게나. 나는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로 가서 거듭 나는 길을 전하러 가겠네. 자네가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해진 후에 만나세나. 형이상학 먹다가 영양실조 걸려 기진맥진해질 때쯤에 내가 영양분이 넘치는 생명의 떡을 다시 전해 주겠네』

계명대학에는 해마다 5월이 오면 개교기념 행사가 있고 행 사기간에 메이 퀸(May Queen)과 메이 킹(May King)을 뽑는 행 사가 있었다. 메이 킹으로 뽑힌 남학생이 메이 퀸으로 뽑힌 여학생에게 「오월의 여왕」관을 씌워주는 행사였다. 과별로 메이 킹 후보 한 사람씩을 뽑아 전교생이 모인 자리 에서 한 명의 킹이 뽑혔는데 각 후보에게 10분의 시간을 주면 후보자들이 장기자랑을 한 후 인기투표로 결정했다. 나는 2학년 때부터 졸업 때까지 거듭 메이 킹으로 뽑혔다. 비결은 장기 자랑에 나갔을 때 전교생을 웃기는 솜씨였다. 내가 마이크를 잡고 온갖 잡설로 웃기고 나면 너무 웃어 다음날 뱃가죽이 아프다는 여학생들도 있었다. 이래저래 대학시절은 멋있는 시절이었다. 열심히 공부했고 화끈하게 놀았다. 철저히 방황했고 뜨겁게 사랑했다. 비록 그 사랑이 짝사랑이긴 했지만 순수하고 뜨거웠다. 나는 지금도 대학시절을 꿈꿀 때가 있다. 그 시절의 강의실, 캠퍼스, 친구들 과 여인들이 지금도 내 꿈자리의 단골메뉴다. 4학년이 되었을 때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시위로 온 나라가 시끄러워졌다. 대학마다 데모열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계명 대학이라고 예외일 순 없었다. 어느날 전교생이 강당에 모인 자리에서 가두시위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잡아달라는 부탁 을 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내가 선동에는 소질이 있으니 솜씨 를 발휘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동료들의 부탁을 받아들여 전교생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고, 전교생이 스크럼을 짜고 거리로 나섰다. 경찰이 제지하고 우리는 돌을 던졌다. 우리가 던 진 돌에 경찰서장의 코가 부러졌다. 화가 난 경찰들이 거칠어 졌고 학생들의 흥분도 고조되었다. 밀고 밀리는 소란을 겪은 후에 나와 몇몇이 주동자로 잡혔다. 대구경찰서에서 3일밤을 자고 훈방되었다. 이것이 나의 첫번째 유치장 경험이었다. 우 리들의 돌질로 부러진 콧대에 붕대를 싸맨 경찰서장께서 우리를 훈방하며 말했다. 『학생들이 나라사랑으로 시위를 하는 뜻은 갸륵하나 학생 때는 공부하는 땐기라. 그것이 자신에게도 나라에도 유익한기 여. 내보내줄 테니 나가서 공부들 열심히 해라』 데모하는 학생들도 막는 경찰도 한결같이 순진했던 시절이 다. 요즈음은 데모가 너무 살벌해지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사라 졌다. 민주주의하자면 데모가 없을 순 없겠는데 그때처럼 순수하고 낭만있는 데모가 되었으면 좋겠다.

키에르케고르냐, 그룬드비그냐 대학생활이 졸업기로 다가오면서 나의 마음에 한 가지 갈등 이 일기 시작했다. 조금은 색다른 갈등이었는데 한마디로 키에 르케고르냐, 그룬드비그냐 하는 고민이었다. 그들 둘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덴마크의 선각자들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사색 하는 철학자로 살아 실존철학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그룬드비 그는 행동하는 목사로서 덴마크 국민들의 혼을 깨우치고 민족 정기를 일으키는 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나는 이들 둘의 대조적인 삶에서 나 자신은 어느 길을 갈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색하는 철학도의 길이냐, 행동 하는 선각자의 길이냐를 두고 고심에 고심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코펜하겐 대학을 다녔다. 키에르케 고르는 철학을 공부하느라 연인 레기나와 맺은 약혼도 파기했 다. 그는 스스로를 일컬어 『나는 높은 산 위에 홀로 서 있는 노송(老松)과 같은 사람이다. 고독하고 고독하여 새들도 와서 깃들이지 않는다. 나는 고독 속에서 신 앞에 단독자(單獨者)로 서기를 나의 철학의 주제로 삼는다』고 했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며 자신의 혼을 실은 글들을 남겼고 그 글들로 후대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룬드비그의 길은 달랐다. 그는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졸업하던 해에 목사고시를 치렀다. 그 고시에서 그는 낙방했 다. 고시과목 중에 설교시험이 있었는데 그는 「덴마크 교회 지도자들이여 회개하라」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고시위원들이 그를 낙방시켰다. 요즘 말로 하자면 「괘씸죄」에 걸린 것 이었다. 목사고시에 떨어진 후 외딴 섬으로 전출된 그는 신경 쇠약에 걸렸다. 젊은 날의 투지도 기백도 사라지고 자신의 한몸도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몰렸다. 이런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 그는 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이여 나에게 은총을 베푸시옵소서. 이 어두움에서 나를 건져 주시옵소서』 그는 간절히 간절히 부르짖었다. 생사를 걸고 하늘에 호소했다. 드디어 어느 날 하늘이 열리는 체험과 함께 신의 손길이 그 에게 닿았다. 이어서 뜨거운 성령 체험에 사로잡혀 감격과 감 사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이런 영적 체험 후 그는 치유되었고 그의 설교는 불을 뿜었다. 확신과 비전이 넘치는 설교자로 변신한 것이다. 그는 뜨거운 열기를 지니고 덴마크 국민들에게 「하나님 사랑」 「땅 사랑」 「사람 사랑」의 3애(三愛)정신 을 불어넣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젊은이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크리스티 안 콜이란 젊은이는 그의 설교에 감명받아 농촌으로 내려가 농 민학교를 세웠다. 그 유명한 덴마크 국민고등학교 운동의 시작이다. 달가스란 이름의 퇴역장교는 황폐해진 덴마크 땅에 나무 심기를 시작했다. 어떤 이는 체조운동을 일으켰고, 어떤 이는 생활개선 운동을 벌였다. 이들 운동을 통하여 덴마크 역사가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덴마크 민족이 좌절의 역사를 딛고 일어나 복지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나는 대학시절의 막바지에 키에르케고르의 길을 가느냐, 그 룬드비그의 길을 가느냐, 철학자의 길이냐, 개혁자의 길이냐를 두고 갈등과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고민에 젖어 있던 졸업학기인 11월에 나는 모교의 해 외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전액장학금을 지원 받아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 만 해도 미국유학이 어려웠다. 나는 모교의 재정지원을 받아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모교에 돌아와 철학교수로 종 신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철학에 대한 끊임 없는 의문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졸업이 다가오면서 전공과목인 철학 서적을 읽노라면 끊임없는 의문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다름아 니라 『철학이란 해답없는 질문의 연속인 학문이 아니냐』는 의문이었다. 「정답이 없는 질문」 그것이 철학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다. 서양으로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동양으로 말하자면 공자 맹자로부터 오늘에 이르 기까지 철학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질문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도 어느 철학자에게서도 해답은 나오지 못했다. 각자가 해답 이라고 말들은 하였으나 그 어느 것도 정답이 되지 못했다. 뒤 를 이은 후배가 그 해답을 부정했고, 다음 세대는 그 이론을 무너뜨리곤 했다. 철학자 중의 철학자로 인정받는 독일의 임마누엘 칸트는 모 든 철학적 질문을 3가지로 모았다. 그리고 하나 하나의 질문에 한권의 책을 썼다. 첫째 질문은 도대체 인간은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느냐의 질문이었다. 그의 주저 『순수이성비판』에 담긴 내용이다. 둘째 질문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의 질문이다. 『실천이성비판』이란 책에 담긴 내용이다. 세번째 질문은 인 간은 무엇을 바랄 수 있느냐의 질문이다. 『판단력 비판』이란 책으로 나타났다. 첫번째 질문인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느냐는 인식론의 문제 요, 두번째의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윤리학의 문제다. 그리 고 세번째 무엇을 소망할 수 있느냐는 종교의 문제다. 칸트는 이런 질문을 내걸고 평생을 사유하였으되 그 역시 해답을 얻지 못했다. 어느 날 밤이 깊은 시간에 나는 책상 위에 20여권의 철학서 적들을 쌓아두고 생각했다. 『이 책들 속에 담긴 내용에 나의 인생을 걸 수 있을까!』 나는 무언가 흡족지 못함을 느꼈고 내 영혼 깊은 곳에 채워지 지 못하는 갈증을 느꼈다. 『이래서는 안되는데…. 무언가가 잘못 되었어…』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중에도 졸업식은 다가 왔다. 1966년 2월이었다. 수석 입학에 수석 졸업을 한 덕분에 조교로 남게 되고 미국 유학 수속을 밟으며 나는 철학자가 되는 길을 걷고 되었다. 내가 모시 던 철학과 교수님들은 사정이 생기면 햇병아리 조교인 나에게 대강(代講)을 맡기곤 했다. 1966년 5월 어느날 영문학과와 철학과 1학년이 수강하는 교 실에서 나는 철학개론을 강의하고 있었다. 인생관에 대한 주제를 걸고 열강을 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손을 들며 물었다. 영문과 학생이었다. 『교수님, 진리가 무엇입니까?』 돌이켜보면 그때 그 학생의 한마디 질문이 내 인생 여정에 한 전기가 되었다. 애초에 내게는 벅찬 질문이었다. 대답할 만한 적합한 말이 떠오르지 않은 나는 망설임 끝에 임마누엘 칸트의 진리 개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칸트는 그의 주저 「순수이성비판」의 앞 부분에서 진리에 대하여 논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하여 나의 머리 속에 있는 개념과 그 사물 혹은 사건 자체가 일치할 때 그것이 진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 손에 쥐여 있는 만년필로 말하자면 나의 머 리 속에 담겨있는 이 만년필에 대한 생각과 이 만년필 자체가 일치될 때 그것이 진리란 것이다. 일컬어 인식론상(認識論上)의 진리이다. 나는 이런 내용을 열심히 설명하고는 알아들었느 냐는 몸짓으로 그 학생의 얼굴을 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픽 웃 으면서 되물어왔다. 『교수님, 그런 진리말고요. 내가 그것을 위해 살다가 그것 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그런 진리를 묻고 있습니다. 칸트가 말 했다는 그런 진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유학 포기하고 세상 속으로 나는 몹시 당황했다. 내 정신세계의 가장 큰 약점을 그가 지적한 셈이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런 진리는 나도 모르고 있습니다. 나도 지금 그런 진리 를 찾는 중입니다』 나의 어색한 대답에 그는 다시 따지듯 물어왔다. 『교수님 오늘 강의를 시작하면서 철학은 진리를 찾는 학문이라고 전제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수님은 진리가 무엇인 지 아직도 모르고 계신다니 그렇다면 수업을 더 계속할 필요가 없는 거 아닙니까? 모르시는 것을 모르는 우리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서로가 시간낭비 아니겠습니까? 그만 수업을 마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의 말에 온 교실의 학생들이 『와 …』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난처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남은 시간을 어물어물 넘 기고는 끝나는 벨소리가 나자마자 연구실로 갔다. 의자에 앉자 심호흡을 몇번 하고는 생각했다. 그 학생이 제기한 질문은 타당하였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마치 장님이 장님을 안내하는 만큼이나 난센스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 가? 내가 그것을 위해 살다가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그런 진리가 체득(體得)되기 전까지는 가르치기를 중단해야 할 것인가? 지금은 풋내기 조교니까 강단에 서지 않으면 되겠지만 장 래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런 확고한 진리를 깨달아 소유한 후 에 철학교수가 되어야 하는가? 맹자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에 대 한 의문 깊어지자 왕궁을 떠났다. 눈 덮인 산에서 7년의 고 행을 쌓은 후에 도를 깨쳤다. 그리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사 렛 예수도 그랬다. 그는 유대땅 후미진 마을 갈릴리에서 목수 로 일하다가 서른이 넘어서야 하늘의 뜻을 터득했다. 그리고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예수가 가르치기 시작한 첫 마디였다. 때가 찼다는 말은 무 슨 뜻일까? 자신이 가르칠 때가 찼다는 말일까? 아니면 백성들 이 들어야 할 때가 찼다는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하늘의 뜻이 백성들의 삶의 한 가운데로 임하는 때가 찼다는 말일까? 나도 석가모니나 예수처럼 깨달음에 이르고 때가 찼음을 확신하게 된 후에 가르쳐야 할 것인가? 다른 선배 철학교수님들은 어떤가? 무언가 깨달음의 자리에 오른 후에 가르치고 있을까? 모르 긴 해도 나와 오십보 백보의 차이일 것이다. 물론 그 지식의 넓이나 인간이해의 폭을 나와는 비할 바 아니겠으되 「모르고 가르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대학 할 것 없이 철학과 교수님들은 자신이 체득한 삶의 의미를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자들의 저서를 읽고 번역 소개하는 수준이 아닐까. 그래서 모 대학의 모 박사는 칸트전공이다, 모 대학의 누구는 하이데거 전공이다 하여 자기가 전공한 철학자의 책을 읽고 번역하고 논문을 낸다. 학위를 받 고 세월이 흐르면 권위가 붙는다. 자기 삶으로 익힌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이해한 칸트나 하이데거를 말한다. 그걸 들은 학생들은 그러잖아도 모르던 데서 더 모르게 되고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나도 선배 철학교수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교비장학생으로 선발되었으니 미국에서 학 위받고 귀국하여 강단에 서게 되었을 때 무엇을 가르칠 수 있 을까? 그때에도 어느 학생이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온다면 무슨 대답을 하게 될 것인가? 자신 없는 일이었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시간 이후로 나는 장고(長考)에 장고를 거듭해 한 결론에 이르렀다. 『세월이 흐른 후에 나 자신에게나 후학들에게 이렇게 사는 삶이 진리로 사는 삶이요, 참된 가치를 창출(創出)하는 삶이 다』그렇게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론이다. 비록 생활수단으로서의 직업은 이발사건 농부건 간에 자신 이 확신하고 그렇게 사는 것을 말하고 자신의 삶의 현장속에서 터득한 가치를 구체화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 고민하는 대학교수보다 건강한 농부가 바람직하다. 신경쇠 약 걸린 박사보다 단잠자는 노동자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철학다운 철학을 하려면 미국 유학을 하고, 박사 학위를 받 고 책 속에 갇혀 사는 삶이 아니라 나의 마음을 갈고 닦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조상님네들의 혼과 얼이 밴 이 땅 어딘가에서 내 삶의 뜻을 깨우쳐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그때까지 계획하고 진행시켜 오 던 일체를 중단하고 백지상태에서 인생수업을 나서기로 작심했 다. 스님이 되려는 사람들이 출가(出家)하여 머리를 깎는 마음 가짐으로 나는 세상 한복판에 자신을 던져 구도의 길을 걸어보기로 다짐했다.

김진홍 목사 계명대학교 신임이사장에 피선

2001년 11월 24일 계명대학교 신임이사장에 두레마을 김진홍 목사를 선출, 계명대학교, 계명문화대학, 계명유치원, 동산의료원 등 학교법인의 대표로 활동하게 됐다. 계명학원 이사회는 오는 12월 14일 김진홍 목사가 계명대 성서캠퍼스 바우어관에서 취임식을 갖는다고 밝혔다.

신임 이사장 김진홍 목사는 지난 1971년 서울 청계천에서 활빈교회를 창립한 바 있으며 1966년 계명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새벽을 깨우리로다' 등의 저서를 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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