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풍경

만리장성

목눌인 2017. 2. 21. 17:28

만리장성 Great Wall of China, 萬里長城         

 

    만리장성

    아직도 그 정확한 길이를 알 수 없는 만리장성. 이 장성을 주제로 윌리엄 에드거 가일은 1909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지구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벽. 필라델피아에서 캔자스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 마르세유까지의 거리만큼 뻗은 벽. 별빛으로 보든 달빛으로 보든 자욱한 먼지 사이로 보든 소나기 사이로 보든, 아니면 눈보라의 눈송이들 사이로 보든, 그것은 거대하고 믿기 어렵고 요지부동이며, 유령 같은 잿빛의 과거 유물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인공 구조물은 무엇일까? 기준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지겠지만 흔히들 꼽는 것이 중국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만리장성의 규모와 관련해 전해지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달에서도 보이는 지구상의 유일한 구조물이 바로 만리장성이라는 것이다.

    만리장성을 우주 공간에서 맨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긴 머리카락도 몇 미터만 떨어지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만리장성이 아무리 길다 해도 인간이 볼 수 있는 한계범위에 들어올 만큼 폭이 넓지 않으면 우주 공간이 아니라 지구 상공의 높은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만리장성의 최대 폭은 7미터인데 이를 볼 수 있는 한계범위는 대략 지상 23.3킬로미터까지이다. 23.3킬로미터 이상 위로 올라가면 만리장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지상 23.3킬로미터는 지구의 성층권이지 우주 공간이 아니다. 그리고 만리장성을 볼 수 있는 높이에선 고속도로 · 운하 · 철도 같은 다른 인공구조물도 볼 수 있다. 2003년 10월 발사된 중국 최초의 유인우주선 ‘선저우(神舟) 5호’를 타고 지구궤도를 선회하면서 양리웨이(楊利偉)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리장성은 보이지 않는다.”

    양리웨이가 우주에서 만리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수십 개의 가지를 뻗치고 있는 만리장성이 인류 역사상 가장 긴 구조물이라는 사실이다. 현재까지도 그 길이를 정확하게 측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상당 부분이 멸실되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지금 남아 있는 2414킬로미터의 두 배에서 두 배 반 정도, 즉 지구 둘레의 8분의 1에서 7분의 1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 수학자의 계산에 따르면 만리장성에 사용된 돌로 피라미드를 쌓으면 30개나 만들 수 있다고 한다.

    현재의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 세워진 것으로, 보하이만(渤海灣)에 접해 있는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출발하여 서쪽을 향하고 베이징(北京)과 다퉁(大同)을 거친 다음 남쪽으로 흐르는 황허(黃河)를 넘는다.(최근 중국은 연개소문이 축조한 천리장성의 동쪽 끝인 박작성[泊灼城, 현 이름은 호산장성(虎山長城)]을 기점으로 삼기도 한다) 계속해서 산시성(陝西省)과 오르도스(Ordos, 현재의 내몽고자치구)의 경계를 따라 남서를 향해 달리다가 다시 황허를 넘는다. 그리고 실크로드의 북서쪽으로 연결되어 자위관(嘉峪關)에 이른다.

    ‘성(城)’은 ‘흙(土)으로 이룬다(成)’는 글자의 조합처럼 원래 흙벽을 의미하고, 장성은 ‘길게 흙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때 ‘성’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돌 등으로 쌓은 ‘성’과는 다르다. 흙으로 만든 성벽은 오래 견디지 못한다. 비가 오면 흙이 흘러내리기 십상이고 겨울의 혹독한 추위는 흙벽을 벗겨낸다. 부단히 보수하지 않으면 서서히 붕괴하여 장성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지경이 된다.

    만리장성은 지역에 따라 흙 · 벽돌 · 돌 등 다양한 재료로 건설되었다. 지금까지도 보존이 잘 된 성벽은 그 밑부분의 폭이 7미터에 이르는데 위로 가면서 조금씩 좁아진다.

    장성은 본래 사람 키 정도의 참호를 파고 그것을 수비하기 위해 쌓아올리는 정도에 불과했다. 말(馬)을 방어하면 충분하기 때문에 현재와 같이 요소요소에 있는 봉황대는 후대에 세운 것이다. 장성을 쌓는 기술도 발전했는데 판축(版築)이라 하여 양쪽에 판(版)을 세우고 그 사이에 흙을 넣어 굳히고 그 작업을 차례로 반복하여 흙벽을 구축했다. 물론 지역에 따라 재료가 달랐는데 어떤 부분은 사용된 회반죽이 너무 단단해 못이 박히지 않는 곳도 있었다. 또한 석재가 많은 곳은 돌과 혼용하거나 석벽으로만 쌓기도 했다.

    만리장성의 서쪽 끝에 있는 자위관

    산하이관을 출발해 숱한 산과 구릉과 평야의 만 리 길을 달려온 장성은 마침내 자위관에서 그 거대한 걸음을 멈춘다. 이곳은 실크로드와 만나는 접점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명나라 때는 영토의 서쪽 끝에 해당하는 곳으로, 중국인들은 자위관 너머의 세계를 서역(西域)이라 불렀다. 나라로부터 추방된 중국인들이 이 관문을 통해 낯선 세계로 던져지기도 했다.

    만리장성하면 진시황제가 떠오르지만 진시황제가 처음으로 만리장성을 건설한 건 아니다. 처음에 장성은 춘추전국시대에 현재의 산둥지방에서 일어난 제(薺)나라가 중원에 있는 각 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 후 화베이(華北)에 세력을 가진 연(燕)나라와 초(楚)나라 등 여러 나라가 북방 이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계속해서 장성을 건설했다.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북방 유목민족 흉노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이미 건설되었던 각국의 성벽을 보강하고 연결했던 것이다.

    만리장성의 옛 모습

    춘추전국시대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만리장성은 주변 지역의 여건에 따라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축조되었고 그 모습도 오늘날과는 달랐다.

    흉노는 날카로운 무기로 무장한 기마부대로 중국을 위협했고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했을 무렵에는 황허 이남의 오르도스 일대를 점령할 정도였다. 기원전 215년 진시황제는 장군 몽염(蒙恬)에게 원정을 명하여 잃어버린 땅을 회복한 후 기존에 건설되어 있던 장성들을 연결하도록 했다.

    당시는 망국의 한을 풀고자 하는 사람들이 호시탐탐 진시황제에게 반기를 들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선 외적 불안요소인 흉노의 침입을 막는 사전 대비책으로 만리장성을 구축하는 것이 참으로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진시황제는 기존의 장성을 보수하고 장성이 없는 지역에는 새로이 성벽을 쌓으면서 10년에 걸쳐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만리장성 건설은 흉노가 쳐들어오지 않으면 진나라도 공격하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진시황제가 보인 평화 정책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 후 한나라가 역시 흉노를 막기 위해 장성을 연장했고 명나라 때에는 몽골의 침입에 대비해 장성을 확장 · 강화했다.

    농사를 지으며 정착 생활을 하던 중국 한족에게 유목 생활을 하던 북방의 기마민족은 늘 두통거리였다. 산업화 이전 시대에는 말을 능숙하게 다루는 기마부대가 무시무시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 기마민족은 오랫동안 중국은 물론 유럽에 숱한 공포심을 안겨주며 세계사를 뒤바꿔놓곤 했다. 만리장성은 이들 기마민족에 대항한 중국 한족의 오랜 고뇌의 산물이기도 하다.

    장성을 쌓는 건 돈도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쉽게 작업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장성의 유적을 보면 버드나무와 갈대를 단단히 묶은 것과 점토를 교대로 사용해 장성을 축조한 곳이 있지만 어떤 지점에서는 3킬로미터 높이의 산꼭대기까지 2톤이 넘는 화강암 석재를 운반해 장성을 쌓아야 했다. 기중기도 없던 시대에 그냥 오르기도 힘겨운 그 꼭대기까지 무게가 2톤가량 되는 화강암 석재를 어떻게 운반할 수 있었는지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라오룽터우(老龍頭)장성

    자위관에서 산하이관까지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온 만리장성은 바다로 이어진다. 산하이관을 지나 바다까지 연결된 장성을 ‘라오룽터우장성’이라고 부른다.

    장성 쌓기가 가장 어려웠던 지역 가운데 하나는 산하이관 부근이다. 이곳에선 짧은 거리이지만 바다를 건너 장성을 연결해야 했다. 그래서 거대한 바윗돌들을 실은 배들을 바다 속에 가라앉혀 그 위에 장성을 쌓았다. 당시의 공사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중국 4대 민간 전설 중의 하나인 ‘맹강녀(孟姜女)’ 전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진시황제 때 맹강녀의 남편 범희양이 축성(築城) 노역에 징용되었다. 오랫동안 편지 한 장 없던 어느 날 맹강녀의 꿈에 남편이 만리장성에서 일하다 죽는 모습이 나타났다. 맹강녀는 급히 남편에게 겨울옷을 입히려고 몇 달에 걸쳐 만리장성 건설 현장에 도착했으나 남편은 이미 죽었고 시신마저 찾을 길 없었다. 당시 축성 노역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이 죽으면 시신은 성채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맹강녀가 성벽 앞에 옷을 바치고 며칠을 엎드려 대성통곡하자 성채가 무너지더니 남편 시신이 나왔다. 맹강녀는 시신을 거두어 묻고 나서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산하이관 인근에는 맹강녀묘(孟姜女墓) · 맹강사당(孟姜祠堂) · 맹강녀원(孟姜女苑)이 있다. 맹강녀원 내에는 ‘지아비를 위해 천리 길을 울며 장성에 도착하였다’는 전설을 위주로 하여 ‘밤새 겨울옷을 만들고’, ‘만 여 장정의 장성축조’, ‘망부석’ 등 20개의 장면이 그려져 있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는 관문인 산하이관

    산과 바다를 끼고 있다고 하여 산하이관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한편 산하이관에는 ‘천하제일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중국인들이 이 관문에 부여했던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만리장성은 장소에 따라 벽의 높이가 3미터에서 8미터까지 다양한데 일반적으로 하단부의 너비는 7미터, 정상으로 올라가면 그 너비가 4~6미터로 줄어든다. 요철형의 흉곽 길이는 안으로 1미터, 밖으로 2미터이다. 서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 12미터 정도의 탑을 세웠는데 이곳은 무기고나 초병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건설상의 난관이 있더라도 만리장성을 구축하는 일은 방대한 군대를 유지하는 것에 비하면 수월한 일이었다. 그래서 통일 전쟁에 동원했던 방대한 군대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대규모 성벽을 건설하여 전쟁에 동원되었던 군사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고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만리장성은 별로 효율적이지 않았다.

    강과 구릉 지대는 물론 바다와 험준한 바위산까지 끊기지 않고 계속되는 만리장성은 인간이 만든 가장 큰 구조물인 동시에 가장 거대한 공동묘지일지도 모른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손톱이 들어갈 정도로 틈새가 넓게 돌을 쌓은 일꾼들은 목을 잘랐다고 한다.

    한편 만리장성이 국방의 목적이 아니라 중국인의 ‘중화’ 의식의 산물이라는 말도 있다. 중화민족이라는 우월주의와 폐쇄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작품이라는 뜻이다. 장성이 어느 정도 흉노의 침입을 막을 순 있었지만 사실 흉노가 만리장성을 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흉노를 포함한 북방 유목민들은 세력이 강성할 때마다 장성을 유린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에 축조한 것으로 특히 장대하다. 그러나 명대 장성도 벽돌로 표면을 쌓아 올려 견고한 곳은 수도 베이징에서 가까운 바다링(八達嶺) 등 특별한 곳과 관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장성이 중국인과 야만인들을 구별한다는 권력자들의 정책적인 의지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명나라 때 성벽은 과거와는 달리 요새뿐만 아니라 통상로로도 이용되었다. 19세기 초 중국주재 나폴리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 신부는 “15미터 높이의 총안 성벽 상부에 말 다섯 마리가 나란히 지날 수 있는 안전한 길이 있었다”고 했다. 만리장성이 왕래의 중추 기능을 갖고 있었다는 설명으로, 출입구 부분에는 시장도시들이 번성했다.

    명나라 때 축조된 바다링의 장성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만리장성의 모습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장대가 있어 위층은 초소로, 아래층은 병사들의 숙소나 무기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성벽을 따라 설치된 봉수대에서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긴급한 전갈을 보냈다. 또한 성벽 위의 길은 상인들의 교역로로 이용되기도 했다.

    한편 중세 유럽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고 네모나거나 원반 모양으로 생겼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중심은 예루살렘이고 그 서쪽에 서유럽이 있으며 반대편에는 기이하고 환상적인 다른 세상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 유럽인들에게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는 페르시아 넘어 동쪽에 찬란한 문명이 있음을 알렸다. 그가 유럽인으로서 세계 최대의 문명국인 중국(원나라)을 다녀간 최초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가 쓴 《동방견문록》은 서유럽 사람들에게 꿈과 환상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마르코 폴로

    베네치아의 상인이자 여행가였던 마르코 폴로는 1271년 아버지, 숙부와 함께 동방으로 길을 떠난 뒤 17년 동안 원나라에서 살다가 1295년에야 베네치아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학자들은,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가 다른 여행가들에게서 흔히 듣던 풍설을 정리한 것일 뿐 그는 단 한 번도 중국을 방문하지 않았다고 의심한다. 마르코 폴로가 임종하기 직전에 그의 친구들은 그가 쓴 아시아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들이 진실이 아닌 상상의 산물이라고 고백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의 반밖에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한다.

    많은 학자들이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전혀 방문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그가 중국을 방문했다면 반드시 보았을 몇 가지 중요 사항, 즉 차 · 젓가락의 사용 · 전족 등 중국의 대표적인 풍물과 풍습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만리장성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은 그런 의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으로 가는 길에 여러 번 지나쳐야 하는 만리장성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까? 《동방견문록》을 철저하게 연구한 헨리 율(Henry Yule, 1820~1889)도 여행 일정으로 보아 마르코 폴로가 몇 번이고 넘었을 만리장성에 대해 설명이 없다는 점에 의문을 표시했다. 물론 현재 잘 알려져 있는 만리장성, 즉 벽돌과 돌로 쌓아올린 장벽과 흉벽으로 이루어진 만리장성은 몽골제국 멸망 후 명나라 때 지어진 것으로 마르코 폴로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는 한나라 때 쌓은 만리장성들이 존재한다. 원래 높이는 10미터가량 됐지만 현재는 3미터 정도의 높이로 남아 있다. 마르코 폴로가 방문했을 때는 이미 이 장성들이 허물어져 방치되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중국을 대표하는 만리장성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은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방문했다는 것을 의심케 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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